욕심내지 않는 마음
예쁜밭은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오늘은 노루뫼 밭에 와서 여기저기를 구경한다. 다른 분들의 밭은 지난 가을 심은 양파, 마늘과 봄꽃들과 상추와 새 작물들이 자라고 있다.
내 밭도 예쁘다. 지난해 가을 이사온 전호나물과 돌미나리, 쪽파와 양파, 마늘이 자라고 루바브는 초봄인데도 커다란 잎을 여러장 냈다. 이것저것 많이 자라고 있지만 내 밭에는 아직 공간이 많이 남아있다. 틀밭으로 만들어놓은 것중 몇 곳을 비워두었다. 지금부터 무언가를 열심히 가져다 심어도 되지만 올 한해의 농사계획에 맞추어서 이른 봄부터 꽉 채울 생각은 하지 않게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작물을 너무 여러개 심지도 않는다. 이제는 꽉 채우기보다는 작물이 성장했을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공간을 비워두는 능력이 조금쯤은 생겼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농사하는 자아가 철이 좀 들었다고 해야할까?
작은 씨앗 하나가 싹이트는것도 신기하지만 떡잎이 나오고 난후 날씨에 맞추어 몇달동안 거대하게 자라 나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열매를 다는걸 보면 놀라우면서도 항상 모종을 너무 과하게 많이 낸 봄의 나를 후회하게 된다. 모종이 많아서 누군가에게 나눠주면 다행히지만, 어느시점이 되면 모두가 밭은 좁고 모종은 남는때가 온다. 어쩔수없이 모종을 빽빽히 심거나 하면 과거의 나때문에 미래의 나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씨앗들이 희망을 품고 싹을 틔웠는데 제대로 못키우는것이 미안해진다.
또 제철 열매를 한정없이 먹으려면 더더더 넓은 땅을 가지고 고랑마다 이것저것 많은 양의 모종을 심고 가꾸면 되지만, 제때에 순을 잘라주고 지주대를 세울 체력이 없으면 적당히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한다. 매해 땡볕에서 일할때마다, 또 찬바람이 슝슝부는 가을마다 “내년엔 적당히 뿌리고 정리해서 키울거야!” 마음먹는다. 조금씩 너무 힘들지 않을정도로 다양한 작물을 키우겠다 마음먹고도 혹시 잘 자라지 않을까봐 넉넉하게 모종을 냈는데 올해는 정말 각 종류마다 너댓알씩만 모종을 냈다. 거기에 4월 말이 되면 또 주문한 모종들이 온다. 거기에 옥수수와 오크라 모종을 내면 지금의 노루뫼밭과 파주 슬픈밭까지 꽉 채울 수 있을것 같다. 사과 참외와 토종 오이, 토마토와 고추, 가지를 주문했는데 이녀석들까지 심으면 정말 공간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한여름 땡볕에 내 밭이 얼마나 무성해질지 상상해보았다. 한쪽에선 부추와 감자가, 또 다른쪽에선 생강과 토마토가 자라겠지. 그리고 때가되면 양파와 마늘을 수확하고 거기에도 맛나고 예쁜 작물을 심을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올해 심을 작물들을 준비한다. 마트에서 항상 만지작 만지작 하지만 너무 비싸 사먹지 못했던 샐러리부터 을밀님이 준 다양한 씨앗들까지 모종을 낼것이다.
상토를 모종판의 칸칸에 맞춰붓고 물을 주어 촉촉하게 만든다. 상토가 너무 가벼워서 물을 세게 부으면 가루들이 넘쳐버린다. 마치 커피원두의 뜸을 들이듯이 조심조심 붓는다. 상토에 물을 붓고 있으니 치치가 옆으로 와서 물장난을 친다. “치치, 물장난을 치는건 좋지만 모종판을 엎으면 안돼~”하고 엄한 목소리로 한번 이야기 해본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어느정도 상토가 차분해지면 씨앗봉투에서 자고있는 씨앗들을 핀셋으로 꺼내서 자리를 잡아준다. 하나의 종류마다 4-5알씩만 모종을 낼 것이다.
마트에서 먹어보면 큰 토마토, 방울토마토, 배추방울 토마토 정도지만 을밀님에게 밭은 씨앗들은 이름도 신기하다. Yellow pear tomato, Pink jazz tomato, Big rainbow tomato..이름을 보기만해도 그 모습이 상상되지만 맛은 또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진다. 잘 키워서 꼭 씨까지 받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가보씨앗으로 농사를 짓고싶다. 하지만 일단은 씨앗이 안전하고 튼튼하게 자라는데 중점을 둔다. 오늘 씨를 넣었으니 당분간은 잊지않고 물을 주고 싹이트길 기다려야한다. 날씨가 도와주면 제일 좋지만, 결국 내가 잘해야 이녀석들이 튼실하게 큰다는걸 잘 알고있다. 나의 여름을 위해, 부암동 언니의 여름을 위해 어서 모종을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