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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Mar 24. 2023

마트에서 부추를 사지 않는 이유

소울푸드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그날은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꽃다발을 받았다. 사시사철 꽃집에서 만날 수 있는 장미도 아니요, 이 맘 때 많이 보이는 국화나 코스모스도 아닌 부추꽃이었다....(중략)... 다시 버스를 타고 무릎 위에 꽃다발을 꽂은 가방을 올려두고 앉아있다 보니 부추꽃에서 어딘가 익숙한 향이 났다. 꽃향기는 아니어서 눈을 뜨고 보면 낯설었지만 눈을 감고 맡으니 우리 집 담벼락에 배어있던 향이었다.
                                                                                    - <#낫워킹맘> '부추도 꽃이 핀다' 중에서



최근 네 명의 엄마들이 모여 펴낸 <#낫워킹맘> 3장에는 각자의 이름을 단 몇 꼭지의 글이 실려 있다.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나'를 이루는 글을 모은 챕터라 각자의 삶이 가장 잘 드러나있는 장이기도 하다. 나는 그 챕터 마지막에 '부추도 꽃이 핀다'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부추라는 채소에 대해 열심히 조사해 보았다. 고기며 해산물이며, 국물요리며 무침요리며,  안 어울리는 데가 없는 감초 같은 부추는 그 쓰임새도 요긴하거니와 자라는 형태 또한 기특했다. 부추는 다른 채소와 달리 한 번 종자를 뿌리면 그다음 해부터는 뿌리에서 싹이 돋아난다. 마치 나무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 집 앞 작은 밭에 강낭콩이 자랄 때에도, 감자가 자랄 때에도, 무가 자랄 때에도 우리 집 담벼락에는 늘 부추가 자라고 있었다. 또한 멀리서 보면 꼭 잡초처럼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잡초보다 더 올곧고 푸르른 것은 어린 내가 발견한 특징이다.


시골에 산다는 것은 문명과의 단절, 생활의 불편함 같은 것을 늘 옆구리에 동반하곤 하지만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부추가 심겨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피자 치즈가 죽죽 늘어나는 피자보다 식용유를 넉넉하게 둘러 부친 부추전을, 초콜릿이 얇게 발려있는 초코틴틴보다 간장에 살짝 찍어 먹는 부추전을, 질소가 아니라 찬 물로 바삭함을 유지하는 부추전을 더 좋아했다. 가끔 아빠가 술안주를 하고 남긴 오징어회가 있다면 그날은 저녁 대신 오징어를 잔뜩 넣은 부추전으로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동해안에서 부추를 키우는 집에 사는 건 분명 축복이었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부추를 둘러놓은 집에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두 번의 수해를 겪은 후 우리는 삼척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이름도 '원조 아파트'라 꼭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생긴 것 같은 낡은 아파트였지만 아빠는 이곳에 살면 다시는 수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정한 듯싶었다. 원조 아파트 101동에서 좁은 통로 계단을 하나 지나면 바로 슈퍼가 있었고 그곳에는 과대포장 되지 않은 초코틴틴과 질소 가득 바삭한 감자칩이 늘 줄 세워져 있었다. 막상 슈퍼가 코앞에 있으니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올 때 주머니 속에 잔돈이 있으면 들러 과자를 사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만약 유년시절 걸어서 20분 거리에 슈퍼가 있는 근덕면 오리에 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10kg쯤은 거뜬히 나갔을 것이다.


늘 김치처럼 꺼내먹던 부추는 그렇게 여러 가지 단당류와 합성첨가물로 대체되었다가 결혼을 하고 살림을 시작하면서 다시 마트에서 나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푸릇푸릇한 식단을 먹이고 싶을 때 나는 종종 부추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손에 들린 부추 한 단은 쉽게 장바구니로 도달하지 못했다. 늘 고민하다 대파로 대체하거나 가끔은 조금 더 향이 강한 미나리로, 깻잎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브로콜리로 우회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부추는 금방 무르니까'라고 결론짓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늘 공짜로 먹던 부추를 돈 주고 사는 것이 아까웠던 것이다. 비슷한 예로 나는 절대 감을 사 먹지 않는다. 집에 늘 감나무가 있어서 언제든 툭 따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절대로 공짜로 먹을 수 없는 부추와 감인데, 왜 나는 마트에 가면 부추와 감 앞에서만 인색해지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제주도민들도 타지에 나와 살면 귤을 사 먹지 않나요?


비슷한 질감의 고민을 유럽여행에서도 한 적이 있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지만 며칠에 하루 정도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거기서 시킨 물 한 잔이 화근이었다. 분명 탭워터(tap water, 수돗물)를 달라고 했는데 종업원이 가져온 물에는 뚜껑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생수 따듯 뚜껑을 돌렸을 땐 이미 늦었고, 그래봤자 3-4천 원이겠거니 했던 물은 그날 내가 시킨 음식의 절반 가격인 만 원이었다. 물 한 잔을 만 원 주고 사 먹은 어리석은 동양의 여행객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일종의 인종차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날 나는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큰 물병에 든 물을 남김없이 다 마시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부추도 나에겐 물처럼 영원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그 가치를 0원(영원)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부추가 멸종되고 나서야 나는 부추의 참맛을 깨달으려나.


그러기 전에 내일은 마트에 들러 부추 한 단을 사야겠다. 마침 집에 아이가 좋아하는 냉동 새우가 있는데 함께 부침가루에 넣고 찬 물에 잘 섞어 바삭한 부추전을 부처 먹어야지. 그리고 다짐해 본다. 아이에게도 나의 소울푸드였던 부추전처럼  너무 흔해서 소중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이야기 몇 줄 읊을 수 있는 소울푸드를 만들어 주리라.


나무도 아닌 것이 한 번 자리를 내리면 뿌리를 박고 매 해 꿋꿋이 자라나는 부추처럼, 아무도 향기를 맡으러 오지 않고 자태를 보고 감탄해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우는 부추처럼 살고 싶다.

                                                                                  - <#낫워킹맘> '부추도 꽃이 핀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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