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완성하게 한 모든 것들에게

첫 브런치 북에 마침표를 찍으며.

by velopenspirits

첫 브런치북을 마무리하며

지금의 저를 살게 하고, 만들어내고, 글을 쓰게 한 모든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심리상담을 글로 옮기면서 저는 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제 글은 혼자 쓴 글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써 내려온 이야기라는 것을.

문장들에 스민 모든 것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들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가족이네요.

좋지 않은 이야기를 써서 죄송한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글을 쓸 수 있게 한 것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전자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상처도 받았지만 무엇이든 끝까지 하는 끈기와 집념,

골몰하는 버릇까지 역시 부모님께 받은 감사한 축복이에요.

한 배에서 태어났지만 성격도, 생김새도, 걸어온 길도 전혀 다른 내 동생.

가끔은 나와 다른 네가 내 동생이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너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어.

이제는 널 오빠라고 불러야 할 것처럼.



무너진 나를 일으켜준 두 친구

너희 둘이 발리에서 해 준 말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J의 “내가 마침 일을 안 하고 있어서 힘들 때 언니를 지켜줄 수 있어서 좋았어”

Y의 “지금의 언니모습이 그동안의 어떤 모습보다 더 멋있고 아름다워.”

그 말을 들으며 한참을 울었지.

한동안, 난 망가졌고 다시 일어설 동력이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희와 함께한 시간은 나에게 신뢰의 경험을 선사해 줬어.
그건 나에게 가장 큰 회복이었어.



보내지 못한 천 통의 편지, 그 받는이에게

난 가끔 생각해.

나의 글쓰기는 너를 만나면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고.

아침, 점심, 저녁-하루에 세 통씩 너에게 편지를 쓰던 그때부터 말이야.

답장은 드물었지만 난 성실히 너에게 내 마음을 전했지.

돌이켜보면 그건 너와 함께하는 상담이자 글쓰기였고,

나를 향한 부지런하고 정직한 보살핌이었어.

그러다 갑자기 네가 사라져 버렸을 때 난 마음 둘 곳을 잃었어.

이후로 난 사람을 믿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널 용서하기 힘들었어.

그러면서도 널 놓지 못했지.

넌 내가 마지막으로, 가장 솔직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오히려 네가 날 용서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걸.

너와 같은 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너의 상처가 보였어.

똑같이 아파봐야만 알 수 있었던 너의 마음, 그때의 난 참 미성숙했지.

미안해. 진심으로.

그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아직도 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가 남아 있더라.

이 편지는 과연 전해질 수 있을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대학 선배

죄송해요.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메신저로 선배와 나눴던 대화는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때 저는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털어놓았죠.

그때 언니는 말했어요.

“지금 너에게 아픈 일이 생겼지만,

그걸 이겨낸다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극복의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거야.

하늘은 그걸 위해 너에게 시련을 내려준 거야.”

글을 쓰면서 자주 그 말을 떠올렸어요.

돌아보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때 선배가 말한 일이더라고요



작은 섬, 길리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

오천 킬로미터 떨어진 인도네시아의 작은 섬을 아직도 그리워합니다.

도로가 없고 길에는 차 대신 말이 다니는 그곳.

툭하면 전기와 수도가 끊기는 그곳.

그 섬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바다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입니다.

카드를 잃어버렸을 때 은행까지 함께 가서 통역을 해 준,
여행 후반엔 나를 보러 옆 섬까지 놀러 와준 아이라는 이름의 소녀.

아픈 나를 위해 숙소에서 선착장까지 캐리어를 끌고 배웅해 준 이름 모를 직원,

만 원짜리 숙소에서의 따뜻한 마음이 그 어떤 특급호텔의 서비스보다 감동적이었어요.

아직도 저의 파란 캐리어를 끌고 앞서가는 왜소한 그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섬에서의 긴긴 생활은

가진 것에 감사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홀로 남겨진 자유를 만끽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을 선물했습니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브런치

가장 힘든 시기에 브런치 작가 심사를 신청했습니다.

글을 쓰면 조금은 해소가 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오히려 더 힘들었어요.

그건 브런치 작가 심사포맷으로 보잘것없는 나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작가소개, 활동계획, 글 세편, 그리고 SNS 주소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막상 그 네 가지를 쓰려니까 막막했어요.

전 당시 그 흔한 SNS 계정도 하나 없었거든요.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글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질문들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평범한 저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깊은 전문지식도, 특별한 경험도 없었거든요.


그 시절, 저는 마음이 힘든 만큼 술을 많이 마셨어요.

결국 술 마시는 이야기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일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어요.

에디터픽도 몇 번 받았지만 잠시 신기한 경험일 뿐이었죠.


하지만 브런치가 저와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웹상에서 작게나마 제 목소리를 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혼자 간직만 하다 흘려보냈을 생각들을

브런치에 하나씩 적기 시작했고 그 글들을 모아 첫 브런치북을 내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비로소 브런치가 내게 던졌던 첫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세상에 어떤 말을 건네고 싶지?'

이제는 조금 알 거 같아요.

저에게 브런치 글쓰기란 특별한 나를 내보이는 것이 아니라

평범함 속에서도 빛나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작지만 강한 힘을 가진 것들

글의 모든 에피소드에 함께하고 영향을 준 상담사님들.

홀로 조용히 나를 돌아보게 했던 두 달간의 여행.

지면과 필력의 한계로 실리지 못했지만 여전히 마음속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글들.

향으로 오래전 상담실에서의 감도를 뚜렷하게 해주는 교보문고 디퓨저.

생각정리와 운동을 한꺼번에 할 수 있게 해주는 산책길.

아무 말이나 하며 웃고 울고 감동할 수 있게 해주는 술.

글을 쓰기 위해 언제나 들고 다니는 내 2kg짜리 무거운 노트북.

내 더러운 성격을 견뎌가며 사랑을 알려준 전 남자친구들.

엉성한 내 글을 보기 전 나를 먼저 읽어준 사람.

건조한 내 성격에도 찰싹 붙어있는 촉촉한 사람들.

질식할 거 같은 회사에서 숨통을 틔어준 인공호흡기 같은 동료들.

나를 미워하고, 또 내가 미워했던 모든 이들이 선물해준 글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을 글쓴이. 나 자신.











이전 25화인간이 말하는 AI심리상담 Q&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