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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lvetmandarine May 05. 2016

8th jeju

제주도 푸른밤



제주의 바다, 하늘 그리고 초록의 이야기



하루 먼저 휴일을 만끽하고 있던 친구로부터 생존 신고형 문자와 사진이 도착했다. 서울은 흐림, 제주는 맑음 맑음 몹시 맑음.

그리고 늦은 저녁부터 무거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까지 이어진 비에 배낭이 젖을까 우산 속으로 몸을 우겨넣는다.

제주 시내는 이미 푹 젖어 있었다. 빠른 비트의 노래 소리는 빗 속에 부서졌고 침묵속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달렸다.

잊고 있던 한 가지가 있었다. 제주의 날씨 그 누구의 말도 믿지 말 것. 예측도 하지 말 것. 닫혀있던 하늘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려 줄 배려가 필요했다. 걱정스럽던 빗방울들은 어느새 구름 조각이 되었고 사람들도 하나 둘 바다로 쏟아져 나왔다.



서로를 마주보니 이내 참았던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건 다 날씨 탓이었어! 여유를 되찾은 우리처럼 무채색 하늘에도 옅은 분홍빛이 퍼져나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세 사람은 동시에 차 속으로 통통 튀어 들어갔다. 다른 바다가 궁금해졌으므로.

평대와 월정 바다를 지나 김녕까지 달리는 동안 멋진 순간들의 연속이었고 누군가의 수줍은 고백이었다. 단 1초 조차도 눈을 뗄 수 없었기에.


일찍이 비를 피해 숙소로 숨어버렸다면 놓쳐버렸을 모든 것들이었다. 기다림이 준 선물이다.



처음 제주 땅을 밟았을 때 기억들이 오버랩 되었다. 하늘이며 바다가 온통 좋아하는 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때부터였다. 제주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다. 밤에 가까워질수록 제주 하늘은 점점 더 따뜻한 그림이 되어갔다.



숙소로 향하는 동안에도 하늘만 바라보았던 것 같다. 제주의 하늘이 준 감동은 쉽게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해가 저물고 까만 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느낌이 좋아 내일의 하늘이 기대되었다.



여느 때처럼 알람이 울리자마자 커튼 밖을 찾았다. 따사롭다 못해 따가울 정도의 햇빛이 앞마당에 가득했다. 폭신한 침대를 마다하고 서둘렀다. 문을 열고 나오니 완연한 가을이었다. 저 멀리 조천 앞바다가 보였고 같은 채도의 하늘도 함께 했다. 기대했던만큼 파랑이 짙었다.



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김영갑 선생님의 오름. 나의 첫 오름. 산도 대지도 아닌 오름. 이름마저도 사랑스러운 새별 오름에.



윈도우 바탕화면 아님.


영양가 없는 농담을 던지며 느린 걸음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름은 이름처럼 순하고 착했다. 숨이 찼다면 결코 힘들어서가 아니다. 한 번씩 뒤를 돌아 둘러보는 풍경에 큰 숨을 몰아쉴 수 밖에 없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달라지는 높이 만큼 오름 아래 세상도 달라졌다.



정상에 서니 바람이 불어왔다. 갈대들이 사그락 사그락 노래를 부른다. 나무 한 그루 없이도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오름이 새삼 대견스럽다. 저 멀리 보이는 남벽도 여전히 안녕했다.


어째서 그동안 오름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제주에는 수백개의 오름이 있는데 오름이 있어 제주가 있을거란 생각도 잠시 해본다. 언젠가 올레길에서 만났던 거대한 언덕이 오름이었단걸 그제서야 알아챈다.



멀리서 노란 새 한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다가올수록 점점 몸집이 커졌다. 아니 큰 새가 아니었다. 여유로운 한 때를 즐기고 있던 패러글라이더의 날개였다. 제주의 일요일 아침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는 동으로 달렸으니
오늘은 서로 달리자


오후에는 모슬포항을 돌아 커피콩 나무가 자라는 한림에 자리를 잡았다. 서쪽은 날 것 그대로였다. 거칠게 다듬어진 농장 울타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한림(翰林)이라는 지명이 마음에 들었다. 제주의 그 어느 곳 보다 푸르름이 가득한 땅.



잠시 멈추기로 했다. 시동을 끄고 트렁크에서 챙겨온 것들을 꺼냈다. 챙이 넓은 모자와 충분히 물에 젖어도 좋을 신발 타월 등등 몇 가지를 들고는 길 위로 올라섰다. 오늘은 서쪽 바다를 향해 네 개의 바퀴 대신 두 다리에 의지해 달려보자.


항구 마을의 사잇골목을 벗어나니 섬 하나가 보였다. 말로만 듣던 비양도였다. 모양새가 꼭 어린 왕자 속 보아뱀 같기도 하고.


방파제 근처에는 그물과 바짝 말린 해초들 바다로부터 흘러들어온 화산송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발 아래에 펼쳐진 삶의 흔적들로부터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매일이 한결같지 않겠다만 단 며칠이라도 이런 공간 속에서 일하는 기분은 어떨까.


여러 가지 생각이 바다와 함께 둥둥 떠다녔다.



하루 중 가장 해가 긴 시간에 걸었지만 모두들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되려 이유 모를 흥분에 어깨를 들썩이며 전진했다. 차를 포기하고 출발한지 삼사십여분만에 해변에 도착. 비양도가 손에 잡힐만큼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협재포니아


여기다.

우리의 바다! 협재포니아!



이미 신발을 벗어던지고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를 걷는 친구의 뒷 모습을 보니. 우리 정말. 신나긴 했나보다.


하얀 모래가 발을 간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맥주 거품 같은 파도가 발목을 덮었다. 9월의 제주 바다는 차갑기도 따뜻하기도 했다.



아빠와 딸, 떠나온 연인들, 솔로 셋. 누구 하나 행복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잔잔한 바닷물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천국은 아마도 이런 곳이겠지.


돌아가는 길 위로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도심속이었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택시, 택시!를 외쳤을거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바짝 마른 빨래, 키작은 나무들을 구경하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어제의 하늘과 바다가 잔잔한 여운이었다면 오늘은 열정에 가까웠다. 부서지는 석양에 괜시리 코 끝이 찡- 해졌다.



다시 어둠이 내리고 여정을 마감하는 장소로 작은 천문대가 있는 별빛누리 공원을 선택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별을 보고 싶었으니. 꼬마들 사이 별 이야기를 열심히 듣던 세 명의 어른이 있었다. 북두칠성의 유명세에 가려진 다른 별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왔고 머리 끝이 등에 닿을 정도로 빠져들었다.


제주 시내의 야경은 소박했다. 저 멀리 바다에서 깜빡깜빡 어선들이 보내는 빛은 가을 하늘의 별 같았다. 화려함이 더해지지 않길 바랬다.




드디어, 사려니에


제주에는 예쁜 이름을 가진 숲들이 많다. 이런 이름을 가진 숲이 있어 '사려니'. 지난 겨울 누군가의 한 마디를 듣고는 사려니에 가겠다며 무모하게 길을 나섰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허탈히 돌아왔던 날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사려니 숲에 가까워질수록 두려움과 설렘이 배가 되었다.


꽤 길고 어지러운 길을 지나니 말로만 듣던 삼나무 숲이 펼쳐졌다. 비밀의 정원이었다. 걸어서 이 곳을 찾기에는 충분히 어려웠을거다. 되돌려 보내진 그 날이 더 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비자림도 좋았지만 내가 생각하던 제주 숲은 사려니에 가까웠다. 덜 꾸며져 있었고 좁은 길도 종종 나타났다. 심심한 맛이 사려니의 매력일테지.



3일만에 하늘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먹구름이 하늘을 무섭게 뒤덮었다. 잔뜩 빛을 머금은 숲은 포기해야 했지만 곧 구름과 나무들이 만든 그림에 우와. 쏟아낼 수 있는 감탄사들을 모두 조합해 본다.



종잡을 수 없는 너


당장이라도 후두둑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출출하기도 했고 서귀포 시내의 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돌아다니길 몇 번. 천장의 포개진 틈 사이로 햇살 한줄기가 비친다.


또 속았버렸네.



떠나는 순간까지도 제주 날씨와의 밀당은 계속 되었다. 하늘은 다시끔 맑아졌다. 헤어짐을 아쉽게 만드려는듯이. 정말 종잡을 수 없구나 너.



끝으로


마지막 날의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바라보는 제주는 눈이 부셨다. 바다, 하늘, 그리고 초록과 함께 해 순간이 뭉클했던 여덟번째 제주 이야기도 끝을 맺는다.


누군가가 물었다. 제주가 왜 좋아요?


제주는 멈추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한 것들 속에서 끊임 없이 생각들과 이야기를 만든다. 기록을 남기는 순간까지도.


이른 가을날의 제주가 그립고 그립다.



#150912 #9월의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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