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3일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그러니까, 솔직히 그곳에 가기로 한 건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나와 아내는 석 달 전에 일본행 비행기표를 사면서 단지 가루이자와(軽井沢)에 가서 쉬다 오자는 계획만 세웠을 뿐, 정작 가서 어디를 가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태풍 20호-우리나라에서는 태풍 '란'이라고 불렀는데, 일본은 태풍에 국제기구가 명명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발생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다-가 막 훑고 지나간 일본에 도착해 도쿄에서 호쿠리쿠 신칸센(北陸新幹線)을 갈아타고 가루이자와 역에 도착한 뒤 숙소에 막 짐을 풀고 자전거를 빌려 나온 상태였다.
서울이 이제 막 가을의 한가운데로 진입한 상태였다면 가루이자와는 가을의 끝물에 살짝 발을 걸치고, 여차하면 겨울로 돌입할 듯한 느낌이었다. 공기는 맑고 차가웠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막 통과한 태풍으로 떨어진 나뭇잎과 잔가지들이 아직 축축한 도로에 찰싹 달라붙어 기묘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낮게 뜬 구름은 바람을 타고 하늘을 묵묵히 가로질렀고, 이미 열기를 잃은 태양이 구름 사이로 오렌지빛 햇살을 사선으로 뿌리고 있었다. 공기 중에 물방울이 가끔 흩날렸는데, 구름이 내뱉은 마지막 빗방울인지, 아니면 키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비바람의 흔적들이 바람을 못 견디겠다는 듯 투신(投身)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우리는 숲의 바닥이 습기를 머금어 피어 올리는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가루이자와의 오래된 별장 지역을 천천히 달렸다. 큰길을 벗어나 작은 오솔길로 접어드니 실로 다양한 일본의 성씨(姓氏)들이 적힌 팻말이 군데군데 무리 지어 화살표로 제 주인의 별장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야마다(山田)와 우에노(上野), 고바야시(小林)의 별장, 왼쪽으로 꺾으면 호리에(掘江)와 야나기하라(柳原)의 별장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별장들은 여름 한 철 주인의 휴가에 맞춰 존재한다는 듯, 거의 모두가 입구부터 쇠사슬이나 목책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얼핏 얼핏 보이는 마당은 한동안 치우지 않은 낙엽들로 가득했고,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나 블라인드가 남김없이 내려져 있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성당을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얼기설기 얽힌 별장지의 오솔길에서 이정표 삼아 찾아갈 만한 곳이 이 정도밖에 없었다. 애당초 어디를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한 곳도 없었으니, 꼭 가면 안된다는 곳도 없는 셈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별장들이 모여 있는 한적한 포장도로를 따라 천천히 페달을 돌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해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완전히 어두워져 숙소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바로 구모바이케(雲場池)였다. 그러니까, 그곳에 가게 된 건 솔직히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기 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곳은 이런 느낌이었다.
하릴없이, 그저 사진만 찍었다.
이 영상은, 일종의 보너스.
우리는 구모바이케에서 다시 페달을 밟아 몇 시간 전에 큰 가방을 달그락거리며 통과한 가루이자와 역 근처로 복귀했다. 편의점에서 군것질 거리를 좀 산 뒤 자전거를 달려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가루이자와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