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슬픈 외국어

그래서 달리고 싶은가 보다

by SJ in Wonderland

이 글의 제목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4년에 고단사에서 출간한 길지 않은 에세이의 제목이다. 안자이 미즈마루가 일러스트를 그렸고, 일본 위키피디아에 284페이지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 그저 적당한 길이에 쉬엄쉬엄 위트있는 일러스트가 있는 전형적인 하루키풍 에세이다. 그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때로 학생들을 만나고 때로는 글을 쓰고, 그리고 대개는 찰스 강을 따라 달리기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눈보라가 치든 묵묵히 찰스 강을 달리며 주변을 관찰하는 하루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며칠 전, 문득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TV를 보다가 이 책의 제목이 훅 하고 떠올랐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 원제는 「やがて哀しき外国語」인데 제목을 시작하는 부사 「やがて」의 사용이 묘하다. 「やがて」를 네이버 일본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얼마 안 있어’, ‘머지 않아’, ‘곧’, 그리고 그 다음의 의미가 ‘이윽고’로 돼 있는데, 뭘로 번역했든 지금 보니 「やがて」는 참 절묘한 선택이다. 그 이유를 잠깐 생각해 봤다.


회사 일로 일본에 온 지 이제 한 달을 넘겨 일상적인 생활, 즉 몇 시에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대략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직장인은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미션이 주어지는데, 그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과 남아메리카처럼 시차가 완전히 뒤집혀도 마찬가진데, 일본의 경우 한국과 시차가 없으니 그 점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낯선 천장의 집에서 낯선 잠에서 깨어 낯선 차를 몰고 낯선 곳으로 출근하는 일은 한 달 쯤 반복하고 나니 그리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일단 직장인으로서의 공간적 이동은 이 정도로 정리가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시간은 지난 한 달이 간 것처럼 뭐 가만히 내버려두면 스스로 흘러가니(찰스 강처럼) 나머지는 시공간을 제외한 ‘생각’의 영역인데, 그 생각이란 건 이런 거다.


일본에 처음 올 때는 지난 2016년 6개월 연수의 기억도 있고, 그동안 그래도 그럭저럭 챙겨 온 일본어 실력도 있고 해서, 사는 데 ‘전혀’ 까지는 아니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진짜로 전혀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일본어 초보는 아닌 외국인으로서 일상의 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정도는 되겠다는 짐작이었다. 실제로 살아보니 한 70% 정도는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문제는 나머지 30%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첨언하자면, 그러니까 일본어 원어민이 100이라고 했을 때 내 일본어가 70이라는 게 ‘절대’ 아니고,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생각한 내 일본어 능력이 100이라고 했을 때, 지금 내가 느끼는 능력이 70이라는 의미다.)


그 30%에서 ‘이윽고’가 발생한다. 발생은 이런 식이다. 밤 늦게 맥주 한 캔을 들고 혼자서 TV의 별 의미없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소스라치게 깨닫는다. 돌발 개그에 킥킥 웃고 난 뒤, 혹은 감동적인 스토리(여긴 이런 게 의외로 많다)에 살짝 뭉클한 감정이 든 뒤 ‘이윽고’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방금 느낀 감정이 과연 같은 프로그램을 동시에 본 일본인들의 감정과 같은 것인가. 그들과 같이 울고, 같이 뭉클했지만(옆에는 아무도 없지만 일본의 TV는 친절하게도 출연한 누군가의 리액션을 대개 작은 화면으로 함께 보여준다) 저들의 웃음, 또는 훌쩍거림 속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접근할 수 없는 코어의 감정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 할 수록(대개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를 할 때다) ‘이윽고’로 야기된 감정은 신기하게 ‘슬픔’으로 향한다.


그러면 왜 ‘슬픔’인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들이 100% 경험한 콘텐츠를 나는 훨씬 덜 느낀 데서 오는 감정인 것 같다. 같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성적이 훨씬 안 나오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어디를 얼마나 더 공부를 해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는지, 공부를 하면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를 잘 모르는데 서 나오는 슬픔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보면, 솔직히 나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도, 조금 더 팍팍하게 보면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이들의 언어로 ‘먹고 살지는 않을’ 거란 걸 숙명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애초에 사고의 기본적인 체계가 다르고, 그건 어차피 완벽하게 좁혀질 가능성이 없는 ‘언어’ 때문인 거지. 참으로 희한한 건, 생각이 여기까지 오면 나는 다시 한 번 더 슬퍼진다는 것이다.


슬픔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더 슬퍼질 위험이 있으므로), 가만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면 그건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원제는 훨씬 길고, 심지어 스포일러이므로 익숙한 제목으로)]의 전반부와, 헐리우드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2003)]의 역시 전반부 중간쯤에 어물쩍 머무르는 느낌이다. 두 작품 모두 후반부에는 그 슬픔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니까, 나의 이 ‘이윽고 슬픈’ 감정도 결국은…아 참, 슬픔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흠흠, 그러니까, 참으로, 묘한 제목이라는 것이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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