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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J in Wonderland Jun 15. 2017

이 더운 날에 고생들 한다

2015년 8월 6일 점심시간에

(사진 : 프레시안)


뙤약볕 아래 하늘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젊은이들 백여 명이 같은 색깔의 깃발을 앞세우고 세종문화회관 앞을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몇몇은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몇몇은 야구모자에 선글라스를 썼다. 4열 종대로 행렬을 갖추기는 했는데 그 안에서의 걸음걸이와 표정은 제각기 자유로웠다. 


행렬이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쪽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세종로 사거리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때 나는 늦은 점심을 먹고 세종문화회관으로 오르는 넓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행렬이 내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계단 마지막 단에 서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상급생인지 조장인지 모르겠지만 학생 서넛이 행렬에 섞이지 않고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는데, 그들도 나이는 매한가지로 보였다. 


사실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을 때 시야의 좌측에서 다가오는 행렬을 보고 어딘가의 고리타분한 행사에 동원된 아르바이트 학생들이라고 생각했다. 용돈을 벌거나 흔한 말로 '스펙'을 쌓기 위해 방학 중에 자원하는, 다시 말해 시간을 내 주고 쥐꼬리만큼의 돈과 경험을 받지만, 그 경험이라는 게 나중에 알고 보면 그다지 쓸모가 없고, 더 지나고 나면 '착취 당한' 씁쓸한 기억만 남는, 그런 종류의 행사 말이다. 인솔을 하는 저 친구들은 그럼 '감독'인가? 


아무튼,  이 더운 날에 고생들 한다. 


문득 행렬 안에 있는 몇몇의 입이 규칙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걸 보고 노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노래인지-행사의 주제곡이라도 되는가 해서-듣기 위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들어 보니 행렬 앞의 절반과 뒤의 절반은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의 그룹이 하는 노래는 처음 듣는 곡이었고, 뒤의 그룹이 하는 노래는 나도 대학생때 교정을 지나며 많이 들어본 민중가요였다. 노래는 마음먹고 하는 제창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시작돼 하나 둘씩 입으로 옮겨 간 것 같았다. 몇몇은 노래가 폭염 속 도심 걷기라는 단순 노동의 배경음이라도 되는 듯 손에 쥔 부채로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목청을 높이지는 않았고, 그 중에는 부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문득 눈을 오른쪽으로 돌려 이미 내 앞을 지나간 행렬의 선두에 있는 깃발을 봤다. 바람은 없었지만 다행히 기수가 살짝 깃대를 흔들고 있어서 깃발의 글씨를 볼 수 있었다. 한대련 통일대장정. 


'통일 대박론' 이후 스스로 '1등'이라고 하는 한 신문은 '통일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매일 2면을 털어 통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무슨 펀드에 참석한 사람, 회사, 단체들의 기사를 싣고 있다. 가구당 월 만 원씩 모아서 통일을 대비한 남북 공동사업, 대북 지원사업을 하겠다는 건데 그 신문의 기사대로라면 엄청난 '유행'을 끌고 있다는 그 펀드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용되는지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기사를 보면 수도 없이 반복되는 '펀드에 기부했다'는 표현이다. 펀드의 사전상 의미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모금한 실적 배당형 성격의 투자기금'인데, 거기에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기부'라는 단어를 쓸 수가 있나. 투자하면 실적이 나고, 그러면 배당을 하기는 하는 걸까.


생각난 김에 그 펀드를 운용한다는 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대체 무엇을 할 예정인지 찾아봤다. '기금은 공평한 심사를 거쳐 남북간 교류 협력 강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단체들에 지원됩니다'라는 설명이 있고, 여섯 가지 '할 일'이 적시돼 있다. 남북 동질성 회복, 통일 공감대 확산, 북한 어린이 지원, 북한 보건 향상, 남북 지역결연, 이산가족 상봉 지원. 북한 모자(母子)에게 영양식을 지원하고, 일반 의약품을 원조해서 결핵과 말라리아 등 질병을 퇴치하는 건 내가 예전에 통일부 출입할 때 가끔 만나던 대북 지원 단체들도 하는 일이니 그 단체들을 '펀드'로 지원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남북 동질성 회복(남북주민간 신뢰 형성), 남북 지역결연, 즉 남한의 시·군·구와북한 카운터파트와의 맞춤형 결연 사업은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통일 공감대 확산 항목에는 '차세대 통일리더 양성 사업'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이들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현재의 우리나라 교육이 향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차라리 그 돈으로 지금 통일대장정에 나선 대학생(한대련이니 한국 대학생 연합 정도 되겠지)들이 걸음을 쉴 때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모금씩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모두가 돈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는 세상이지만, 돈이 한 곳으로 모일 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면 적어도 그 곳에 꼼수와 맹목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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