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이 그려온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이 욕망했고, 이윽고 자연히 타락해갔다. 종교적 배덕이라기보다는 주체성의 상실로 인한 인격체로서의 타락으로. 스스로 주인이라 꿈꾸는 노예들의 모습을, 그는 덤덤하게 카메라에 담아왔다. <항생제> 속 우상은 대중에게 소비되는 상품에 불과했고, <포제서>의 호스트는 암살을 위한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들에게도 감정과 의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무력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 목소리를 내고 조금은 반항도 해보지만, 결국은 타아의 손에 의해 소비되고 마는 그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이용하는 팬들과 암살자는 과연 온전하게 주체적인 인물이었을까. 내가 돈을 냈고, 내가 조종했으니, 선택의 주체는 다름 아닌 나였던 걸까. 어쩌면 거리를 가득 채운 기업의 광고물과 상부에서 내려온 작업의 시나리오가 어느새 내 선택을 대리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브랜든 감독의 작품에는 특유의 기이한 설정과 불쾌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끄덕여지는 친숙함이 있다. 그곳이 우리가 단 몇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정말로 마주하게 될 세상이기 때문일까. 그곳을 당연하다 받아들일 정도로 이미 나도 자본의 노예이기 때문일까. 이런들 저런들 꾸준하게 자본주의적 타락에 대해 이야기해온 그가 이번에는 <인피니티 풀>로 돌아왔다. 이제껏 작품들이 병적으로 정제된 배경을 취해왔기에, 휴양지를 무대로 한 이번 작은 자연히 가장 경쾌했고, 현실과의 시각적 괴리감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항생제>부터 <인피니티 풀>까지. 작품을 거듭할수록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져, 앞서 말한 친숙함이 점점 더 커져가는 성장이 느껴졌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에 만족하고 있음에도 몇 가지 아쉬움은 남았는데, 우선 개인적으로 본작에서 바디호러적 이미지의 충격이 상당히 줄어든 느낌이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나름의 인상을 준 뒤틀린 얼굴은 가면이라는 특성상 페르소나의 의미를 지녔겠지만, 이미 <포제서>에서의 황홀했던 경험을 알고 있기에 납득보다 의문이 더욱 크게 남았다. 차라리 개구기를 낀 제임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얼굴이 더 기억에 남더라. 기존의 직설적인 화법 대신 모티프를 끌어온 점 역시 대체로 흥미로웠으나, 설명 없이 그저 몽환적으로 표현된 일부 장면들은 오히려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무엇보다 강하게 남은 아쉬움은 영화가 다루는 소재로 이어갈 수 있는 질문들을 겨우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로 유기한 점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피니티 풀>에 만족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택한 마지막에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던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 제임스를 이끄는 과정에서 일종의 오이디푸스 모티프를 채용했는데, 그에게 있어 어머니는 개비(미아 고스)였고 아버지는 알반(자릴 레스페르)이었다. 생각해 보자. 사실상 백수와 다름없던 그가 개비의 앞에서는 작가일 수 있었고, 내게도 팬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으스댈 수 있었다. 중식당에 가자던 아내의 말에는 코웃음을 치던 그가 개비의 말 한 번에 젓가락을 집었으니 이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후 제임스의 소변 후 이어지는 수음 장면, 그리고 부인 엠(클레오파트라 콜먼)으로부터의 전화 대신 개비와의 밀회를 택하던 모습 역시 그의 본능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더욱 확실히 했다.
문제는 알반이었다. 개비에게는 -본인도 마찬가지지만- 배우자가 있었고, 그는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도 또 리톨카에 대한 경험적으로도 더 우월한 존재였다. 결국 여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 남아가 그렇듯, 아버지를 넘을 수 없던 제임스는 타협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처음에는 그를 이어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보았고, 다음에는 그를 따라 폭력적 일탈에 함께했다.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시되어 모두가 타락하나 싶었는데, 재미있게도 영화는 모티프를 살짝 틀어 부자 사이에 승과 패를 나누었다. 환각과 함께 벌어진 난교 장면에서 아들은 마침내 어머니를 취했고, 아버지는 아들의 발끝에서 홀로 자위하고 있었다. 무일푼인 그가 이 부자들 위에 오르다니. 그야말로 이야기의 주인공다운, 자본주의 성공 신화가 아닐 수 없었다.
앞서 말한 브랜든 감독의 세상 속 인물들과 달리, 제임스는 점점 자존감과 주체성을 회복하는 듯했다. 그는 여권을 숨김으로써 섬에 더 머무르기를 택했고, 엠의 전화를 무시함으로써 일탈에 빠져들기로 택했다. 나아가 알반을 뛰어넘고 방해물인 형사까지도 제압하며 그는 점점 역동적으로 되어 갔다. 그러나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그의 앞에 현실은 최악의 모습으로 드러났다. 구타당해 바닥에 쓰러진 건 그 형사가 아니라 만든 기억조차 없는 나의 대역이었더라. 그제야 그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자아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구나. 나도 그저 돈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에 불과했구나. 허영에 눈멀어 으르렁대던 나의 모습 역시 저들에게는 하나의 쇼일 뿐이었겠구나. 이제까지 거쳐온 자기 파괴적 유희의 반동이 순간 그를 덮쳐왔고, 그는 단지 그곳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승리한 줄 알았는데 승부조차 아니었다니. 애초부터 그들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너무나 달랐다. 뛰어넘었다 여겼던 아버지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품에 안았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내게 조금의 애정조차 품고 있지 않았다. 이제라도 깨달아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제아무리 반항한들 결국은 그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를 움직이는 실은 이미 개비 일행이 잡고 있었기에. 대체 저들은 제임스에게 무엇을 바랐던 걸까. 장난감으로서 완전한 종속을 원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들과 같이 타락하기를 바랐던 걸까. 이윽고 완전히 길들어 개와 같아진 대역을 제임스 제 손으로 죽이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본능을 스스로 거세했고, 이어 아이의 모습으로 퇴행해 젖을 빨며 일말의 주체성마저 서서히 잃고 말았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제임스는 일상으로 돌아간 일행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으나,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끝내 리톨카를 떠나지 않았다. 엠에게 돌아가지 않고, 또 저들과 함께하지 않고. 홀로 섬에 남겠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리라. 물론 우기가 찾아와 리조트는 문을 닫았고, 철조망 속에 머무르니 섬사람들과 함께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가 택한 해방은 곧 소극적 의미의 자살과 같을 것이다. 목줄을 찬 본능을 거세했기에 원초적 동기는 남아있지 않고, 제복을 입은 이성을 상처 입혔기에 이상적 목표 또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허영과 충동적 선택 끝에 남은 것은 빈 껍데기와 같은 자신뿐이었다. 그렇다면 섬에 남기로 한 그의 선택은 필시, 껍데기 속 아슬하게 남아있던 이성의 마지막 반항이었으리라. 실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바닥에 떨어질지라도, 나로서 스러지겠다는 무언의 외침이었으리라.
이전 작품들 속 인물들과 같이 그 또한 바닥까지 타락했지만, 자본주의적 이상에 굴복한 이들과 달리 그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의 의지로 타락의 연쇄에서 벗어났다. 무일푼에 홀로 남은 그는 당연히 그곳에서 죽게 되겠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인간인 채로 삶을 끝맺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휴양지의 화사함도 경쾌함도 없는 무채색의 마지막이었지만, 적어도 그의 얼굴에서는 처음으로 불안과 혼란이 느껴지지 않았다. 통일되는 메시지를 다루면서도 작품마다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감독이 다음에는 어떤 선택으로 나아갈지 어김없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