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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ul 30. 2023

너무 쉬운 길만 택하셨군요, <드림>

캐릭터 구축부터 메시지 전달까지 줄줄이 실패한다면

‘5점에 후하다.’

영화에 별점이라는 것을 남기기 시작했을 때부터 별점 어플 프로필에 적어놓은 일종의 변명 같은 문구다. 물론 나는 평론가도 작가도 아니기에, 별점 정도야 자유롭게 매긴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때때로 주관이나 선호에 취해 잣대가 흔들리는 나와 달리, 세상에는 -또 감사하게도 내 주변에는- 분명한 기준으로 영화와 마주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이 있다. 꼭 그들과 같을 필요는 없다며 또 한 번 자신을 어르고 넘어가지만, 정규분포를 벗어나 치우친 나의 그래프를 볼 때면 하나둘 부끄러움이 쌓여가는 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영화에 일단 4점을 부여한 채, 가·감점을 하는 방식으로 별점을 매긴다. 감탄하게 되면 올리고, 아쉬움을 느끼면 내리고. 전반적인 별점이 위로 쏠려 있는 것은 아무래도 4라는 기본값이 높기 때문이겠지만, 필시 내가 2.5점에 하한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 때문일까, 어찌 되었든 작품을 만들어준 그들에게 감사하기 때문일까. 설령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많더라도 하한선을 넘기지는 않으려고 한다. 물론 그 수가 적을 뿐이지 선을 넘어 두 개 이하의 별만을 남길 때도 있다. 즐겁고 감사하기는커녕 불쾌함과 분노만을 남기는 영화, ‘작품’이라고 부르지조차 아니할 정도로 거북해지는 영상들에는 나도 당연히 별을 깎는다. 아쉬움이 쌓여 별로였던 영화와 불쾌함이 쌓여 별로였던 영화는 다르니까. 애석하지는 않지만, 이병헌 감독의 <드림>은 후자였고 말이다.



<드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특정 집단을 띄워주기 위해 나머지를 모두 깎아내려 버리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이란 탄탄한 캐릭터 구축을 바탕으로 한 이해와 수용으로 이루어진다 생각한다. 그들의 상황과 목적을 이해하여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과 이어지는 게 아닐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했듯 ‘탄탄한’ 과정이 필요하기에, 몇몇 창작물들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빠르고 단순한 방법을 택하고는 한다. 주인공을 약자로 설정하여 언더독 효과를 끌어오거나, 신파와 애국 정서를 집어넣어 캐릭터를 성역화하고, 주인공의 대적자들은 모두 천인공노할 악인으로 설정하면 그만이다. 그럼 자연히 관객들의 심리가 주인공에게 기울어갈 테니까.


이야기의 중심 집단은 노숙자들이다. 작중 투자사 직원의 대사처럼 그들은 주로 부정적인 연상을 야기하는데, 그래서인지 영화는 열심히 그들을 광내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양아치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범수(정승길), 사회복무요원에게 막말을 듣는 인선(이현우), 사업에 실패한 환동(김종수)에 보증을 잘못 선 효봉(고창석)까지. 여기에 각각 구구절절 사연까지 더해지니 ‘선량하고 마음 넓은’ 관객들이 어찌 그들을 미워하겠는가. 그래, 비록 저들이 과거 가정 폭력을 일삼고 가계를 휘청이게 했으며 술 동냥이나 하며 매일을 보냈다 할지라도, 지금은 꿈을 품고 다시 일어서려는 청춘이나 다름없으니까. 기꺼이 응원하고 지원하며 성공을 기원해 주는 것이 무릇 마땅한 도리겠지.



그렇게 그들을 돕는 홍대(박서준)의 주변에도 악인들은 가득했다. 오프닝부터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 해맑은 기자(박명훈)부터 시작하자. 그는 기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강령 및 윤리헌장을 따르지 않았다. 강제성을 지닌 규칙이 아니기에 책임을 묻거나 처벌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의 행동이 올바른 언론인의 모습과 크게 동떨어져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제지를 무시한 채 독단적 취재를 계속했으며, 그 과정에서 취재원의 인격을 무시했고, 무엇보다 특정 견해에 함몰되어 해당 기사로 인해 발생할 불이익에 대해 어떠한 방어권도 보장하지 않았다.


그래, 분명 그는 시쳇말로 ‘기레기’라 불리는 비윤리적 언론인들을 상징해 풍자하는 캐릭터겠지. 영화는 영화로, 코미디는 코미디로 보는 게 맞는 거겠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 <드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대체 왜 웃기지도 않는 캐릭터를 내가 구태여 코미디로 봐주어야만 하는 걸까. 세상에는 제아무리 밉상이고 저질이라도 얼마든지 웃으며 넘겨지는 캐릭터들이 있다. 불쾌함을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단번에 코미디로 느껴지니까. 그러나 기자 해맑은을 포함한 이 영화 속 상당수의 조연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그저 불쾌할 뿐이요, 노력한다 한들 결코 재밌게 보이지는 않았다.



홍대의 엄마인 선자(백지원)는 그 캐릭터가 참으로 아까워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1번으로 두지는 않을 수도 있다. 양육의 의무, 인구 재생산에의 기여 등을 놓고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보는 게 아니라, 일단 그들도 인간이니 그럴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모성애나 부성애, 형제애 등 가족이라는 집단의 구성원 사이에서 어떠한 유대감이 형성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초법적인 감정에 따라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는 훌륭한 작품에서 그러한 역할 갈등을 보여주었고 말이다.


돈을 우선할 수도 있고, 사랑을 우선할 수도 있으며, 그 외에 무엇이든 자식보다 소중한 것이 존재할 수 있겠지. 호감을 주는 캐릭터는 아닐지언정,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는 캐릭터다. 그렇게 <드림>의 선자도 넘어가려던 찰나, 영화는 그에게 ‘홍대의 계기’라는 역할을 부여하더니 갑작스레 모성에 대한 찬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가 그토록 전통적인 어머니와 동떨어져 행동했던 이유도, 구태여 뻔뻔스러운 대사를 골라하며 스스로 악역처럼 가장했던 이유도, 선자라는 한 인간의 개성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단지 좋은 부모 나쁜 부모 이데올로기를 관객에게 때려 넣기 위함이었다. 제주도로 간다며. 적어도 마지막 경기장에는 오지 말았어야지. 결국 부모는 자식을 위하고, 자식은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그 틀에 박힌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홈리스 월드컵 영화에서? 캐릭터를 한순간에 이렇게나 재미없게 만들 줄이야. 내가 코미디 영화를 보러 온 게 맞나 싶었다.



홍대의 기획사 대표(박형수)를 이야기하기 전에, 영화 속 다른 조연이었던 사회복무요원에 대해 잠시 적어보고 싶다. 인선의 개인 파트에서 등장했던 그들은 해맑은 기자 이상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 영화는 어떠한 대체 복무 혐오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영상물인가? 물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작중 그 ‘공익’이 뱉은 말, 공익이 마지막이라고 하면 뭐가 어쨌다는 식의 그 말은 단어 선택부터 태도와 상황까지 전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첫째로 공익이 마지막이라고 한들 그들을 관리·감독하는 주무관의 허가 없이 독단으로 내린 결정은 무의미한 일탈적 월권일 뿐이다. 둘째로 설령 민원인 혹은 이용자가 부정한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우선 주무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 자리에서 상대방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엄밀히 따지지 않더라도 병역법 위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셋째로, 허가받지 않은 옥외광고물의 부착이야 당연히 막아야 하지만, 미아 찾기와 같은 실종 전단은 예외로서 신고 대상에서 배제된다.


정리하자면 <드림> 속 사회복무요원은 심히 과장되어 작정하고 악인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물론 저보다 더한 공익들도 있다. 나 역시도 사회복무로 병역을 대체했기에, 직접 두 눈으로 보기도 했고 말이다. 문제는 상황이다. 영화 속 지하철역에서 복무하는 사회복무요원들은 개인에게 무심하며 매몰찬 공권력으로 상징되고, 그에게 핍박받는 인선은 나름 가슴이 아플 수도 있는 절절한 사연을 지닌 상대적 약자로 그려진다. 언더독.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가 주연으로 고른 저 집단을 빛내기 위해 선택한 이 오류투성이의 방법이 나는 너무나 불쾌했다.



드디어 기획사 대표다. 박서준, 아이유, 고창석 씨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넘쳐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반가웠던 인물이 바로 박형수 배우다. 홍대를 연예인으로 새 출발시키려고 하는 그는 입버릇처럼 나쁘게 살자고 말했는데, 물론 그 개인의 잣대로 판단한 거겠지만 대체 무엇이 그리도 나쁘다는 거였을까. 오히려 정글 프로그램의 미팅까지 참여해 놓고 펑크를 내버린 홍대야말로 민폐고 악인이 아니었나. 함께 감독으로서 출국한다는 내용이 계약서 상에 적혀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버린다느니 떠난다느니 이용을 했다느니 그렇게 구태여 대사로 힐난하는 건 아무리 노숙자라도 너무 더럽지 않았나 싶다. 아, 누가 보면 홈리스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멀끔했던 그들에게 더럽다는 표현은 알맞지 않겠구나.


후반부 홈리스 월드컵 경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일단 나 자신이 스포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저렇게 붙잡고 늘어지는 게 축구인 건지 진심으로 모르겠고 말이다. 어쩌면 홈리스 월드컵은 규칙이 다를 수도 있겠다만. 간략하게만 적자면 일단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훨씬 현실적인 축구 시합이라 느껴졌고, 왜 외국 선수들은 저렇게 노골적으로 마킹을 하는데 한국 대표들은 당하기만 하는지, 나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도저히 모르겠더라. 설마 이것도 상대편을 무자비한 악인으로 만들어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전략은 아니었겠지? 골키퍼에 노인을 세워놓고 만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던 것도 그냥 내가 또 너무 나쁘게만 생각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전설적인 ‘대~한민국’ 장면은, 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꼭 이야기하고 싶다. 위에서 실컷 비꼬고 욕 해놓아서 진정성이 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앞으로 어느 나라의 영화든 조심해 줬으면 하는 부분이다. 다문화 가정, 동성애, 장애 등등. 세계가 다원화되고 더욱 포용력 있는 사회로 나아가면서, 이제껏 약자라고 여겨지고 또 한구석에서 멸시까지 당해왔던 이들이 드디어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몇몇 창작물들은 이러한 인물들을 그저 하나의 ‘코드’로만 소비하고 있더라. 적당히 장애인 캐릭터 집어넣고, 누구 한 명 커밍아웃 대사 집어넣고, 다문화조차 여전히 이질적으로 여겨 갈등의 소재로만 집어넣고. 그러한 도구적 태도가 어쩌면 저들에게는 이전보다 더 큰 아픔을 줄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아픔은 무시한 채 그저 자본주의적인 코드 아래에서 자신은 이렇게나 열려있는 사람이라 자위할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구역질이 밀려온다. 차라리 기획사 대표의 말처럼 우리 같이 나쁘게 살아보는 게 어떨까. 착한 척, 깨어있는 척, 이해하는 척 이제는 제발 그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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