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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Aug 02. 2023

요란한 우주 속에 또 한 번의 비상선언을, <더 문>

날개만은 가장 컸던 BIG 4의 2번 주자

달에 대한 영화, 고립에 관한 영화.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한다면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그래비티>라던가 <마션>이라던가. 어쩌면 <인터스텔라>가 떠오를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떠올려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담컨대 김용화 감독의 <더 문>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앞선 작품들은 필시 그 제목조차 언급되지 않으리라. <더 문>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여타 우주 영화들과는 조금의 공통분모도 이룩하지 못했다. 오히려 <타워>나 <싱크홀>, 심지어 <비상선언>의 반복이라고까지 느껴졌다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우주라는 배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곳이 화재가 일어난 고층 빌딩이든, 땅으로 푹 꺼진 싱크홀 속이든, 저 달에 덩그러니 남겨진 착륙선 안이든 간에, 결국 이야기는 요구조자의 생존과 구출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물론 달이라는 배경이 주는 황량한 긴장감과 우주이기에 발생하는 산소 결핍, 체온 하락 등의 위기감이 나름의 조미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더 문> 역시 재난 영화라는 큰 틀 안에서 익숙하게 흘러가기를 택했다. 그렇다면 재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위해 신파를 넣고, 무엇을 위해 선악을 부여하는 걸까.



안타깝게도 현실과 영화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우리는 절대 이야기 속 인물들과 하나 될 수 없다. 극에서 사건이 일어나도 내 가족은 안전하며, 재해가 덮쳐와도 내 지구는 평온하다. 스크린 속 열차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한들 누구 한 명 도망치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저들과 분리된 안전지대에 있음을 객석의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작품에 빠져들지 못한 채 그저 영상을 관망할 뿐이라면, 분명 눈앞의 모든 장면들이 재미없고 지루하게만 느껴질 테다. 그야 저건 내 일이 아니니까. 갈수록 고되지는 세상 속에서, 나와 관계없는 일에까지 집중력을 소비할 정도로 우리는 더 이상 여유롭지 않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관객을 얼마나 극 중 인물에게 동일시시킬 수 있느냐다. 우리가 그들에게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감정이 공유되어 자연스레 극에 몰입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재밌다고 느끼게 된다. 당연하겠지만 더 많은 관객에게 작용하기 위해 주인공은 인류 보편의 아픔을 겪게 되며, 그것이 과장되고 반복되어 시쳇말로 신파가 된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흑백 구도는 인물들을 두 집단으로 단순화하는데, 이를 통해 작품 내외에 공통의 적이 세워져 우리의 감정도 주인공의 감정과 함께 더욱 증폭되고는 한다. 즉 이러한 방법들이 결코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적절한 신파와 이항 대립의 구도는 앞서 말했듯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니까.



흥행 공식을 따르며 신파를 욱여넣고 적당히 악인을 세워놓는다고 결코 나쁜 영화는 아니다. 애초에 이런 틀이 생기고 그것이 쓰인다는 것은, 그 틀이 실제로 흥행을 가져왔다는 뜻인데, 어찌 자본주의 사회에서 황금알 낳는 거위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단지 황금알만 믿고 드러누운 거위의 나태함에 심히 실망했을 뿐이지. 누군가는 살얼음판 위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며 한 발자국 더 내디디려 하고 있는데, 다른 누구는 심심한 자가복제에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신작이라 내놓는다. 투자를 잘 받으면 무엇하나. 스크린 확보가 잘 되면 무엇하나. 제아무리 CG가 발전한들 영화를 채우는 이야기가 그 시절 그대로인데, 도대체 무슨 성취가 있을까.


<더 문>은 <비상선언>처럼 위험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두 영화는 비슷한 길을 걸었다. 사건의 발생, 미국의 협조 거부, 요구조자의 구조 거부와 그에 대한 설득, 그리고 전임자의 조력 및 트라우마 극복까지.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희생을 결정하는 장면에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공감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컸던 <비상선언>과 달리, <더 문>에서 황선우(도경수)가 생존을 포기하는 장면은 그 대사에 배우의 표정과 숨소리가 더해져 나름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잃고, 동료들을 잃고, 수차례의 귀환 시도 끝에 선체마저 한계였다. 아버지의 진실을 알고 있었기에 사명감이 남달랐을 테고, 팀의 막내로서 형들에게 의지하는 마음 또한 분명 컸으리라. 이토록 절절한 상황이니 영화도 신파를 빼놓을 수 없었겠지.



하지만 영화는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순간 착륙선을 가득 메웠던 비관과 무력감이 화면을 넘어 관객석까지 전달되도록. 왜 그는 달에 가야 했는지, 그토록 살아남으려 했으면서 왜 이제는 포기하려 하는지를 우리도 곱씹고 되뇌며 인정해야만 했다. 어차피 그는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오겠지만, 앞선 감정에 납득하지 못한 채로는 결말의 안도감도 퇴색되어 버릴 테니까. 그런데 영화는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곧바로 마이크를 들어, 왜 그를 살려야 하는지 김재국(설경구)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쏟아냈다. 양심고백을 하고 지겨운 대사도 날리고. 하지만 아무렴 대사로 하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겠지. 기어이 카메라는 재국과 선우를 지나 모두의 눈물을 화면 가득 보여주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소리치던 사람들이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는데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혹시 <비상선언>에 대한 오마주일까? 아니면 우리를 파블로프의 개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어떠한 감정적 동화도 없이, 오히려 너무 급해 남아있던 감정마저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단지 회상 몇 번에 우는 얼굴을 보여준다고 우리가 따라 울 것이라 판단했던 걸까. 만일 그랬다면 그것이야말로 나태의 끝이겠다. 이 불쾌함을 차치하더라도 영화의 조급함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불러왔는데, 이리저리 폭발하는 감정 속에서 황선우의 선택마저 마치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처럼 왜곡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고심 끝에 포기를 외쳤고, 결의를 다지며 다시 일어났을 테다. 하지만 쏟아지는 신파의 급류 속에서 그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았는지, 영화는 그저 눈에 보이는 눈물만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다.



마무리를 하자면, 김용화 감독의 <더 문>은 아까웠어야 할 영화다. 그 시절 재난 영화의 아이콘인 설경구와 성공한 연기돌 도경수, 거기에 이름이 곧 브랜드인 김희애까지. ‘달 탐사’라는 소재로 ‘최초’ 타이틀까지 얻었으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웬걸 감독이 걸려버렸다. 분명 이 영화의 신파는 <신과 함께 시리즈>보다 그 세기가 줄었으며, 우연성이나 억지스러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는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정도가 줄었을 뿐 인물들의 동기와 목적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 여전히 신파에 과하게 의존했고, NASA와의 관계나 통신 두절 등에서는 다소 편의적인 설정이 눈에 띄어 어색하게 다가왔다.


<더 문>은 한국 영화의 무대를 다시 한번 우주로 확장했지만, 그 실상은 이제까지의 재난 영화와 다를 게 없었다. 고증도 엉망이고 연출은 어지러운데, 그래도 ‘최초’라고 응원해야 할까? 또 한국 영화의 도전이니 실패할지라도 응원해 줘야 할까? 글쎄,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짜내어 본다면, 더 이상 대중이 억지 신파에 호응하지 않음을 280억이나 써서 직접 보여줬다는 게 아닐까. 우주 영화로서도, 재난 영화로서도 성취하지 못한 <더 문>은, 조금도 아깝지 않은 그저 2시간짜리 텅 빈 자학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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