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한국 영화계를 지탱하는 네 편의 작품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영화가 바로 <비공식작전>이다. 능글거림으로는 1, 2위를 다투는 두 주연 배우의 합은 이미 쌍 천만으로 증명되었고, 긴장감을 다루는 감독의 역량 역시 <끝까지 간다>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를 기다리기에는 충분했지만, 내게는 <모가디슈>나 <교섭>에 이은 기시감이 무엇보다 진하게 눈길을 사로잡았다. 혹시나 <모가디슈>의 만족감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교섭>의 아쉬움을 채워줄 수 있을까. 황갈색의 유사성 속에서 앞선 두 영화를 어떻게 뛰어넘을지, 어떤 개성을 부각하여 아류라는 꼬리표를 떼어낼지. <비공식작전>이 보여줄 선택에 기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전에 영화 <교섭>을 보았을 때 나는 감독의 선택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었다. 미화도 비판도 하지 않을 것이라면 대체 무엇하러 극 속 인질들에게 현실의 사건을 덧씌웠는가. 샘물교회 선교단을 연상케 하는 그들의 행적은 일종의 자업자득이었고, 그것은 관객에게 있어 몰입을 막는 거대한 벽이 되었다. 때문에 구태여 전화를 연결하고 영상 편지를 띄우던 신파적 노력조차 제힘을 내지 못했고, 동분서주 땀 흘리며 그들을 구하려 했던 외교관의 이야기마저 덧없이 퇴색되고 말았다. 차라리 각색을 통해 인질을 정말 무고한 민간인으로 그렸다면, 혹은 인질의 묘사를 최소화한 뒤 자국민을 구하려는 국가 요원들의 모습으로 극을 채웠다면. 분명 조금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인질극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소 날카롭게 표현하자면, 결국 저 인질에게 이 정도로 투자하여 구할 가치가 있는지, 그 여부를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세상에 안 소중한 생명은 없다고들 한다지만, 그 무게는 저울질을 해보고서야 알게 되는 곳이 바로 우리네 세상이지 않은가. 만일 저 인질의 무게에 관객이 끄덕이지 못한다면, 그를 구해야 한다는 영화의 대전제가 흔들리며 극의 긴장감은 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티브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비공식작전>은 <교섭>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올라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연민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던 샘물교회 피랍 사건과 달리, 1986년 레바논에서 벌어진 외교관 납치 사건은 죄송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비공식작전>은 피랍된 서기관(임형국)의 드라마에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 납치되던 순간까지도 강인했던 뒷모습이 그토록 수척해졌음에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쩌면 쇠창살 안으로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이, 한국에서 기다리는 가족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는 것이, 또 하나의 폭력일 수 있음을 영화는 경계했던 걸까. 감독의 의도가 어떠했든 영화는 그들이 견뎠을 아픔과 슬픔을 단지 예사로운 신파로 소비하지 않았다. 기억에서 지워진 채 방치되었던 피랍자와, 그의 목숨을 저울질하며 기싸움만 거듭하던 정부 부처. 관객의 감정을 유도하기 너무나 쉬운 상황이었음에도 영화는 도식적인 과장 대신 인간적인 절제를 택했다. 아쉽게도 강점보다 약점이 더 두드러진 작품이었지만, 이 선택만큼은 분명히 이 영화의 강점이자 성취였다.
문제가 있다면 신파에 대한 경계가 과히 단단했는지, 인질뿐만 아니라 두 주인공의 드라마까지도 건조하게 지나갔다는 점이다. 인질극에서 인질에게 포커스를 두지 않는다면, 자연히 구조원인 외교관이나 납치를 한 괴한들에게 조명이 비치기 마련이다. <비공식작전>의 경우 납치범들과의 협상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지나갔기에, 결국 외교관 민준(하정우) 그리고 그와 동행하는 판수(주지훈)가 극의 중심이 되리라. 하지만 왜 민준이 그토록 서양권 발령에 목을 매었는지, 판수는 어쩌다 이역만리 레바논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영화가 곁가지를 조금도 펼치지 않았기에 작품 속 인물들이 심히 평면적으로만 느껴졌다. 그 결과 앞으로 인물들이 할 선택까지도 간단히 예측되어 버렸고, 그 선택이 불러왔어야 할 신뢰의 가치나 성장의 숭고함까지도 가벼워져 기계적인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포스터에서부터 카 체이싱을 내세웠듯 액션 장르의 쾌감을 위해 의도적으로 드라마적 요소를 조절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더 이야기하자면, 정작 그렇게 내놓은 액션조차도 생각보다 부실하고 어색했다는 점이다. 우선 이 영화에서 카 체이싱을 제외한 액션은 거의 전무하다. 건물이 습격당해도 쫓아오는 이는 한두 명에, 적당히 숨어있으면 어느샌가 다들 사라져 버리니, 긴장감은커녕 어색함만이 맴돌아 틈틈이 몰입을 방해받았다. 영화 내내 울리던 총성과 폭발음 역시 그저 배경으로만 간신히 들려왔으니, 대체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가뜩이나 드라마의 부재로 몰입이 쉽지 않았던 상태에서 액션의 어색함까지 겹쳐지니 관객석의 나는 점점 더 이야기로부터 튕겨져 나갔다.
그렇다면 영화의 자랑인 카 체이싱만큼은 앞선 약점들을 뒤덮을 정도로 큰 강점이 돼주었을까. 재미있는 점은 유사한 배경의 <모가디슈>와 <교섭> 역시 일종의 카 체이싱 장면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모가디슈>는 탈출과 생존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따라 남과 북이 함께 책과 문짝으로 차를 보강하여, 화합과 보호의 가치를 담은 방어적 추격을 보여주었다. 부딪히며 경쟁하는 것도, 그저 멀리 도망치는 것도 아닌,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며 달려가는 카 체이싱의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반면 <교섭>은 전통적 의미의 자동차 추격전을 계승하며 배우의 이미지까지도 적극 활용했는데, 바이크를 통해 가볍고 날렵한 액션을 보여줌으로써 직전의 긴장감을 이어갔고, 이후 자동차로 뛰어든 배우 현빈의 기술을 더해 캐릭터의 의지가 넘쳐나는 매우 공격적인 추격전을 선보였다. 이처럼 두 작품은 각각 카 체이싱이라는 범주 내에서도 저마다의 특색을 살려 정반대의 인상을 자아냈는데, 과연 <비공식작전>도 저들에 버금가는 변주를 이루어냈을까.
솔직한 감상으로는, 무색하며 무취했다.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밋밋하며 몰개성 하다는 의미로. 구태여 특징을 뽑아내자면 추격전 중 좁은 골목에 차가 끼어버린 정도일까. 오도 가도 못 한 채 멈춰버린 그 상황을 추격이라 불러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초에 영화의 중반 이후 택시 기사인 판수에게서 차를 빼앗은 선택으로부터 영화는 만들 수 있었을 강점들을 하나둘 유기해 온 게 아니었을까.
카 체이싱을 내건 영화에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운전대를 넘겨주다니. 결말까지 장장 2시간이라는 반복 동안, 평소라면 지나쳤을 약점들까지 기어이 눈에 박히고야 말았다. 그렇게 하나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해가자, 머릿속에 '옆그레이드'라는 말이 떠오르더라. 분명 업그레이드인 줄 알았는데, 특별히 두드러진 발전이 보이지 않을 때, 시쳇말로 그것을 옆그레이드라 부른다. <교섭>을 뛰어넘고 <모가디슈>까지 노려보기를 바랐지만, <비공식작전>은 끝내 <교섭>의 옆그레이드에 그치고 말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