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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Jul 01. 2024

억압 속에서도 그들이 피어내고자 했던 것

프라하에도 봄이 오길 바랐던 두 감독의 작품들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저항 정신이란 경직된 구조 속에 성장과 순환을 일으키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여기서 저항이란 물론 1969년 미국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처럼 사회적 억압이나 전쟁 등으로부터의 반항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주류 문화를 비판하며 대두되는 새로운 예술 사조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치 고전주의에 반하여 낭만주의가 꽃피웠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로서 인상주의가 등장했듯, 우리의 역사는 저항을 통해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저항 정신은 영화의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영화사 속 수많은 물결들 중 가장 두드러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20세기 초중반 일련의 뉴 웨이브 운동들이다.


프랑스 시네필들이 주도한 누벨바그로부터 시작되어 자연스레 중부와 동부 유럽으로까지 확산된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은, 이윽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도 그 힘찬 물결을 일으켰다. 이 뉴 웨이브 운동들은 유럽 전역을 관통하며 몇몇 도전적인 특징들을 유지하고 공유하기는 했지만, 각각의 나라가 직면한 상황에 따라 서로 구분되는 고유한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가령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를 다소 단순하게 비교해 본다면, 인과가 뚜렷한 도식적 내러티브를 거부했던 프랑스와 달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많은 작품들이 원작을 따르며 이야기의 완결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극장 앞에 한데 모여 자유로이 예술을 탐미할 수 있었던 프랑스와 달리, 체코슬로바키아의 거리에는 좌절된 희망과 무거운 피로가 즐비해 있었다. 길어지는 전후 복구와 강해지는 공산당의 영향 속에서 사람들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었고, 그렇게 체코슬로바키아 뉴 웨이브 영화들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유와 순수성에 대한 갈망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본 글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뉴 웨이브의 시작을 알린 슈테판 우헤르 감독의 <Slnko v sieti>(The Sun in a Net)(1963)와 유라이 야쿠비스코 감독의 <Vtáčkovia, siroty a blázni>(Birds, Orphans and Fools)(1969)를 살펴봄으로써 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뉴 웨이브 감독들의 저항 정신을 살며시 들여다보고자 한다.



먼저 두 작품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Slnko v sieti>는 주인공 파욜로와 그의 여자친구 벨라가 여름 방학 동안 겪게 되는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이를 통한 정신적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파욜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끄럽고 복잡한 거리를 벗어나 건물 옥상에서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고는 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세상을 들었고,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일견 여유로운 듯 보이면서도 이따금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벨라에게는 다소 답답했던 것일까. 러닝타임이 흐르며 두 사람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고, 이후 파욜로가 아버지에 의해 도시를 떠나 시골로 수확 작업을 떠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각각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


여름이 지나 다시 도시로 돌아온 파욜로는 함께 시간을 보내던 옥상에서 벨라와 재회했지만, 그는 이전의 불안정한 관계를 다시 이어가는 대신 서로 간의 어긋남을 인정하며 헤어지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해소가 벨라에게도 어떠한 계기가 되었던 걸까. 앞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며 그저 겉돌기만 하던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엄마를 피하지도 도망치며 부정하지도 않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엄마에게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거짓말은 이전처럼 현실로부터의 회피를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가족과 함께하기 위한 그 나름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Slnko v sieti>가 목가적인 이미지를 통해 도시와 자연의 대비를 보여주었다면, <Vtáčkovia, siroty a blázni>는 더욱 적나라하게 전후 황폐해진 도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인공 요릭과 그의 친구 안드레이, 마르타는 폐허가 된 교회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전쟁고아들이었다. 그들은 버릇처럼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며 매일 그들만의 파티를 즐겼는데, 그 모습은 그들의 신체적 성숙도와 별개로, 또 그들 곁에 술과 담배가 끊이지 않던 것과 별개로, 마치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놀이와도 같아 보였다. 그렇게 그들은 전쟁의 아픔으로부터 도망쳐 나름의 무정부주의적 자유를 즐기고 있었지만, 두 남자가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며 이들의 웃음 넘치는 관계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주인공 요릭은 숫총각인 안드레이가 삼각관계 속에서 뒤처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마르타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안드레이를 돕고자 했다. 혹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까. 요릭은 지은 죄가 없었음에도 갑작스레 경찰을 찾아갔고, 한낱 부랑자에 불과했던 그는 감옥에 들어가 1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영화는 그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뛰어넘어 모든 것이 변해버린 1년 뒤를 관객에게 들이밀 뿐이었다. 재건된 도시는 더 이상 폐허가 아니었고, 임신한 마르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물론 요릭 역시 더 이상 예전의 웃음 넘치던 그가 아니었고 말이다. 이제는 바보가 될 용기가 없다던 그는 아이다운 순수함을 잃었고, 끝내 제 손으로 마르타와 태아를 살해함으로써 완전히 망가진 어른이 되고 말았다.



두 작품은 결코 계획된 시리즈물이 아니었음에도, 상당한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우선 두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모두 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해진 체코슬로바키아 제3, 제4 공화국 시기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해당 시기에는 전쟁으로 파괴된 도심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몰리며 시골 지역의 노동력 부족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었다. 작중에서 파욜로가 도시를 떠나 시골로 파견 작업을 갔던 것도, 요릭이 아직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폐허에서 살고 있던 것도 한창 공산주의 도시계획이 진행되던 시기의 모습이었기에, 이러한 시대적 장치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관객들에게 작품의 현실성과 동시대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인물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으로는, 이야기가 흐르며 파욜로와 요릭 모두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버렸다는 점이 있다. 비록 그 성장이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파욜로는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시골에 다녀왔고, 요릭은 자신의 의지로 감옥에 다녀왔다. 작품 속에서 돌아온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차갑고 무기력하게 비쳤으며, 두 인물 모두 기존의 관계를 스스로 끝내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실제 그들이 떠나 있던 기간은 1달과 1년으로 심히 길지는 않았기에 그들에게서 육체적인 성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둘 모두가 조금도 예전의 모습에 겹쳐지지 않을 만큼 완전히 변해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들의 변화를 ‘어른으로의 성장’이라 바라보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른 어른들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영화 모두 청년 계층을 조명하여 성인의 출연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랬기에 더욱 짧게나마 등장한 어른 캐릭터들의 특징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작품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어른의 특징은 필시 그들 대부분이 대사 한 마디 없었다는 것일 테다. 등장하는 어른들은 그저 말없이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시골의 인부들이거나, 말은커녕 표정조차 없이 부랑자를 잡아가는 도시의 경찰들이었다. 조금 과장하여 표현한다면 그들은 마치 시스템에 묶여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는 기계와도 같았다.


물론 이들과 다른 소수의 어른들 -선함과 인자함, 그리고 순수함을 간직한 인물들- 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들 모두는 작중에서 늦든 빠르든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어쩌면 앞서 빗댄 기계적 군상의 모습이 곧 두 감독이 바라본 어른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의 몰락 뒤에는 나치와 소련으로 거의 1,000년의 시간 동안 차례차례 지배받아온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감독들은 피어나지 못한 채 꺾여버린 운동가들과 피어나려 하지조차 않았던 군중들을 작품 속에 투영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파욜로와 요릭이 각각 벨라와 마르타와의 관계를 끊어낸 것도, 현실에 순응하며 목소리를 잃어버린 자신,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려 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앞서 체코슬로바키아 뉴 웨이브의 특징으로 자유와 순수성에 대한 갈망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자유와 순수성이란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저항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탈피를 넘어 더욱 넓은 의미를 갖는다. 두 작품을 감상하며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실존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소련의 문화 기조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사회주의적 대의를 위해 노동자들을 계몽해야 한다는 목적 아래에서 탄생되었지만, 그 실상은 검열의 합리화와 프로파간다의 범람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뉴 웨이브 역시 일종의 계몽 의식을 담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공산당에 의한 계발이 아닌, 개인 저마다의 선택을 통한 제각각의 자아 형성을 강조했다.


이를 영화 속에서 찾아보기 전에, 우선 두 주인공의 마지막을 통해 그들의 미래를 조심스레 상상해 보자. 벨라와 헤어진 파욜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정해진 레일 위에 오르게 될 테고, 그 역시도 결국 아버지처럼 정부의 평가에 매달리고 불안해하는 그 시절의 흔한 어른으로 자라 갔을 것이다. 마르타를 해한 요릭의 미래는 더욱 분명하다. 범죄를 저질렀으니 다시 감옥으로 보내질 것이고, 그곳에서 사회주의식 사회화를 거쳐 언젠가는 순종적 일꾼이 되어 다시금 돌아오게 되리라.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간 고개가 기울어지는 결말이다. 만약 이대로 저들의 미래가 이어진다면, 그들도 작품 속 다른 어른들처럼 체제의 일원이 되어 말 못 하는 기계로 자라 갔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위와 같은 비극을 그리는 대신, 마지막에 한 조각씩 희망을 남겨두었다. 상술했듯 파욜로의 변화는 벨라의 성장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집 밖으로 겉돌기만 했던 벨라는 이제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며 한 걸음 나아가게 되었다. 분명 작품의 주인공은 파욜로이며 러닝타임 내내 카메라가 그의 행적을 좇았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결말에서 카메라는 파욜로가 아니라 벨라의 선택을 프레임에 담았다. 작품의 마지막 스포트라이트가 누구를 비추는지에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으리라. 나는 그것이 벨라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성장한 벨라가 다시금 파욜로 혹은 그처럼 자아를 잃어가는 누군가와 재회하여, 이번에는 자신이 다른 이를 일깨워주리라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넌지시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요릭의 경우 그는 이전처럼 경찰을 찾아가는 대신, 무거운 동상을 들고는 강 위의 다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상과 자신의 목을 밧줄로 묶었고, 이후 너무나 편안하고 해맑은, 마치 이전의 아이와 같았던 표정으로 돌아와 동상과 함께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추락했다. 그의 자살은 과연 배드엔딩일까. 자살이라는 소재가 주로 금기시되고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그의 선택이 마치 일종의 해방으로 보였다. 이 결말에서 중요한 것은 자살이라는 키워드가 아니라, 그것이 삶이든 죽음이든 그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했다는 점이 아닐까. 물론 당을 위해서라면 수용 시설로 돌아가 마땅히 사회화를 받아야 했겠지만, 과연 우리는 그 미래를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두 감독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암울한 현실이기에 더욱 이루어내야만 했던 실존주의적 성장이 아니었을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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