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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ni Jun May 24. 2018

캐릭터를 통해 바라본, <양의 나무>

누구에게나 세컨드 찬스는 주어진다


지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지석상’을 받으며 대중의 주목을 받은 영화 <양의 나무>가 J필름 페스티벌(JFF)을 통해 한국 관객들을 다시 찾아왔다. 영화제 당시에는 <금구모궐>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으나 JFF에서는 일본어 원제를 번역한 현재의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님은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고민하게끔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바로 등장인물들이다. 때문에 요시다 감독님의 영화에서 각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강렬한 특색을 갖고 있으며, 스토리와 연출도 캐릭터를 부각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다. 예를 들어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에서는 같은 하루를 여러 캐릭터의 시선에서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서로 다른 인물들의 입장 차이와 심리 상태 등이 강조되었고, <아름다운 별>은 가족 구성원 네 명이 모두 각각 다른 행성 출신이라는 점이 영화 전체를 꿰뚫는 주요 설정이다. 이번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여섯 명의 전과자들이라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캐릭터들을 분석하며 왜 그들이 그렇게 설정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우오부카’라는 일본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마을에, 시골 소외 방지 및 세금 절감을 위한 정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섯 명의 전과자가 도착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처음에는 관객들에게도, 주인공인 츠키스에에게도 여섯 명에 대한 정보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전과자이며 모범수였기에 가석방된 상태라는 것, 그리고 각 인물들과 츠키스에의 첫 만남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특징적인 성격 정도이다. 그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마을에 정착했을 때 즈음, 마을에서 시체가 발견되며 관객과 주인공에게 그들이 모두 살인자라는 것이 밝혀진다. ‘모범수’였던 ‘마을 사람’이, ‘살인자’로 재인식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경계가 뚜렷하게 존재하는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관객에게 묻고 있다. 제목인 ‘양의 나무’는 ‘타르타리의 식물 양’이라는 전설에 나오는 양이 열리는 나무를 의미한다. 이 생명체는 동물처럼 피와 뼈를 가졌지만 열매처럼 식물에서 자라난다. 영화는 각 캐릭터들을 통해, 동물인지 식물인지 애매한 양의 나무처럼 선과 악 또한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뒤섞여있음을 시사한다. 마을에 정착한 전과자들은 각각의 직업을 구했는데, 왜 하필 그 직업일까? 영화가 끝난 뒤, 이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캐릭터에 집중하는 감독님이시니 이번 전과자들의 직업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궁금했고, 나는 그들의 직업이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6인의 전과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뉜다. 마을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인물들과 과거의 악행을 반복하려는 인물들. 교도소에 있으면서 면허를 취득한 후쿠모토는 이발사 보조가 되었고, 전직 야쿠자였던 오노는 세탁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후쿠모토가 이발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단지 그가 면허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 오노는 왜 세탁소에서 일할까? 이발소는 머리를 단정하게 해 주고 세탁소는 옷을 깔끔히 다려준다. 이는 그들의 과거 청산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 또한 걱정이 많은 후쿠모토는 자신과 같은 전과자인 이발소 사장을 만나 마을에 적응해가며, 오노는 가정과 밀접한 세탁소라는 공간에서 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사장을 만나게 된다. 청소원인 쿠리모토 역시 앞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건물이나 자연을 깨끗이 하는 일을 한다. 간병인 오타는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다 츠키스에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에게는 사랑이 삶의 모든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싶고, 또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녀의 살인 역시 사랑을 나누던 중 일어난 사고 – 물론 그렇다고 그녀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 였다. 간병인이라는 직업은 그녀의 사랑을 상징하며, 새로운 사랑(츠키스에의 아버지)은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주었다.


스기야마(좌)와 오노(우)


이들과 다르게, 항구에서 일하는 스기야마는 시골이 지루하다며 도시로 나가고 싶어 하는데 마을과 밖을 이어주는 바다를 통해 그의 탈출 욕망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또한, 바다를 통해 약을 들여오려 하거나 다른 전과자들에게 다시 범죄를 권유하는 등 마을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모습은 그가 여전히 악으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6인 중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인 미야코시는 택배원으로 취직하여 영화 내내 택배 배달을 다닌다. 본디 택배원이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기쁨을 배달하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미야코시는 감정표현이 적으며 상당히 충동적인 인물이다. 수차례 과잉방위로 사람을 죽였으며, 연주를 본 다음날 바로 기타를 구입하거나 막 만난 여성(아야)과 연애를 하는 등 여러 곳에서 그의 충동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택배원의 이미지와 그 사이의 괴리가, 현재의 평온한 일상이 그에 의해 무너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선과 악의 이중성은 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마을의 수호신인 ‘노로로’에게서도 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노로로는 원래 사악한 존재였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패해 수호신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비치는 노로로의 모습은 수호신과는 거리가 있다. 과거에 행해졌던 인신공양, 노로로를 ‘괴물’이라 부르는 아이들과 바라보면 저주에 걸린다는 마을 사람들의 언급 등 노로로를 마냥 선한 수호신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기괴한 형태의 동상과 음침한 분위기의 노로로 축제가 관객들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쌓아간다. 이 기괴한 수호신은 선과 악이 불변하지도 이분법적이지도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노로로 동상과 노로로 축제


끝으로 청소원인 쿠리모토의 '땅에 죽은 동물을 묻는 행위'는 무슨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끝에 결국 남편을 살해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그녀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이다. 그녀의 대사처럼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자신의 이중성에 스스로 공포를 느꼈고, 그러던 중 발견한 마찬가지로 이중성을 띤 '양의 나무'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주제곡의 제목처럼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미 죽은 생명에게서 - 정확히는 그 무덤에서 - 새로운 싹이 피어나듯, 죗값을 치르고 개심한 사람들 역시 새로운 삶을 피워낼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마지막에 무덤에서 피어난 작은 새싹은, 새롭게 살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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