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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벤선생 May 24. 2023

책 쓰기에 관하여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꾸준히 쓰기를 멈추지 않기

나는 책을 쓰는 것이 꿈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고, 하는 일도 예술 분야라 책 쓰는 것이 비교적 쉽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책을 쓰기란 보통 재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한 분야에 어마무시한 전문성을 가져야만 쓸 수 있는 것이 책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이 세 권의 책을 만나기 전까진.


와인에 쓸데없는 건 넣고 싶지 않아요(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여성들의 이야기) / 카밀라 예르데

스몰 토크: 뉴욕에서의 대화 / 맹지영, 유J

TAPAS / 나카가와 히데코


첫번째 책은 어느날 우연히 내추럴 와인을 접하고 깊게 감명 받은 저자가 유럽 전역을 돌며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여자들을 인터뷰한 후 쓴 책이다. 본인도 이런 책을 쓰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그저 내추럴 와인에 너무나 강렬하게 빠져들었고, 전세계 생산량의 단 2% 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자 생산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시작된 책이라고 한다. 지극히 본인의 취향을 따라, 좁디 좁은 분야에 대해서 쓴 이 책이 어찌저찌 북유럽에서부터 표류해 서울 근방의 작은 도서관에까지 정착하다니. 


이 책 안에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도멘 드 록타방(옥타방 와인)의 생산자 알리스 부보에 대해서도 나오고, 내가 처음 마셔본 내추럴 와인의 생산자인 아리안나 오키핀티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온다(그녀가 생산하는 대표적인 와인 리스트에서 sp68이 등장하는 걸 보고 기절할 뻔 했다). 와인 생산 과정이나 수많은 와인 종류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아주 소수의 와인 생산자들과 그들 각자의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게 편안했고, 따뜻했다. 나한테 용기를 준 책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분야를 열정적으로 파헤치면 이토록 훌륭하고 온기가 넘치는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스몰 토크는 2015년에 나온 맹지영 큐레이터의 책이다. 그(a)와 미술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친구(b)와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전시장에서 시작해 거리로, 또 많은 다른 곳들로 장소를 이동하며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실 예술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 대해서라도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술도 충분히 깊게 감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든 예술의 편린들을 어떻게 하면 더 순수하게(편견 없이)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책을 읽는 것이 마치 친구와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대화하는 것 같아, 집에서 아페롤 스프리츠를 한잔 만들어 홀짝홀짝 마시면서 단숨에 읽었다. 단숨에 읽은 것이 또 너무 아쉬워 느리게 또 한번씩 더 읽었다. 여기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남긴다. 


"미술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여겼던 b의 질문과 대답은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래서 어떠한 의문을 갖지 않은 현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미술과 전혀 무관한 분야의 사람이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의견을 통해 나는 '새로운' 미술과 만나게 되었다. b와의 대화는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일단 '학습'하고 그것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예술에 다가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b와의 스몰 토크를 통해서 학습보다 중요한 것이 예술을 바라보는 본능적인 느낌과 호기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또한 예술이 대중적으로 관심을 많이 받길 원하면서도 그렇지 않고 나만의 예술로 머무르길 바라는 나의 이중적인 욕심도 같이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업계 종사자로서 이 구절이 어찌나 공감되던지!) 나는 지금도 누군가와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가벼운' 잡담이나 대화들을 나누며 그것이 이끄는 대로 놔두곤 한다. 그것들은 때로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만드는 큰 주제로 발전되기도 하고, 일부는 그저 그런 잡담으로 소멸되어 버린다. 그런데 언젠가 그 비생산적이고 하찮아 보이는 작은 대화가 먼 훗날 그 시대 예술을 바라보는 소중한 시선이자 목소리였음을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자, 이제 세번째 책은 샛노란 면 재질의 커버가 귀여워서 내 손에 집힌 케이스다. 표지에는 경쾌하게 TAPAS TAPAS TAPAS라고 써있고, 페이지를 주루룩 넘겨보니 타파스에 대한 레시피북인것 같았는데, 여름도 다가오겠다 이런건 좀 가볍게 읽기 좋아보여 빌렸다(나는 모든 책을 집 앞 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저자는 일본인이었고, 그녀가 20대 시절 무작정 바르셀로나로 떠나 그곳에 살면서 먹었던 음식들에 대해 쓴 책이었다. 그런데 책 중간중간 '연희동에서'라는 말이 나온다. 아니 일본인이라며, 설마 한국에 계신 분인가? 찾아보니 서울에 거주하며 요리 교실을 운영하고 계신다! 이런 우연이.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듯한 반가움이다.


히데코 여사님처럼 나도 (꽤) 무작정 외국으로 떠나 지낸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빌린 책들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예술, 음식, 식재료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내가 쓰고 싶은 책은 예술과 음식의 조합, 별로 크지 않은 이 교집합에 관한 것이다. 나는 미대를 나오지도 않았고, 미술사를 전공한 학예사도 아니다. 그러니 나와 같은 사람이 책을 쓰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꾸준히 쓰는 것, 그것만이 재능이자 노력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가 소설 쓰기와 마라톤 달리기에 대해 말했듯이 말이다. 짧게라도 조금씩 내가 쓰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글을 남겨야겠다. 아, 물론 틈틈이 펫시팅도 소홀히 하진 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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