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
지난주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의 마지막 날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다. 해당 전시는 7월 16일 일요일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오는 9월 뉴욕 구겐하임으로 옮겨져 전시될 계획이다. 미술 관련 기관에게 있어 9월은 많은 예술 행사가 있고 날씨도 선선해 일 년 중 전시를 선보이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런 때에 맞춰 한국의 실험미술이 뉴욕에서 소개된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한국 미술이라고 하면 단연 단색화를 꼽겠지만, 단색조 회화가 그 형태를 다듬고 꽃봉오리를 터트릴 60-70년대 무렵 아방가르드 정신을 불태우는 작가들도 많았다. 김구림, 정강자, 박현기, 이승택, 성능경, 이건용 등 몸을 이용해 다양한 실험을 했던 당시 젊은 작가들은 지금 봐도 트렌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혁신가들이었다. 전시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작업 몇 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정강자 작가는 여성이 가지는 신체적 특징과 욕망 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작가이다. 그녀의 많은 대표작들이 전시에 등장했다. 설치작 '키스미'를 비롯해, '비닐우산과 촛불', '투명풍선과 누드', '한강변의 타살' 등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퍼포먼스들은 성실하게 기록되어 지금의 우리와 만났다. 그녀는 한국의 최초 누드 퍼포먼스를 선보인 작가인 만큼 늘 선정성 논란이 따라다녔으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2000년대가 들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여성의 인권이 지금처럼 존중받지 못했던 시절, 여성주의 작가로서 주체적인 삶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지금 보아도 큰 용기와 울림을 전한다.
최근 여러 곳에서 신박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계신 성능경 선생님 또한 옛날부터 알아주는 장난꾸러기였다. 요즘은 나 자신의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남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시대이지만, 과거에는 사진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필름을 소진하는 일이었기에 셔터를 누르기 전까지 신중해야 했고, 그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그런 시기에 성능경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여러 장 찍어 나열함으로써 일종의 사진집을 만들었다. 가령 사과를 베어먹는 과정이나, 신문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들고 있는 형태를 사진에 담았다. 그의 작업은 정신없기도 하고, 평온해 보이기도 한다. 본인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담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하고, 예술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과정을 평생 동안 계속해왔다.
'소멸(선술집)'이라는 해프닝 작업(퍼포먼스)을 선보인 이강소는 오늘날 우리에게 오리 회화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작가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붓질로 대작을 그리는 그가 과거에는 이렇게 재밌는 참여형 작업을 고안했다고 한다.
'선술집'으로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은 그가 한때 즐겨가던 선술집의 탁자와 의자를 구입해 1973년 명동화랑에 재설치한 작업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따르고 담배 연기를 나눠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바로 그 탁자와 의자들이다. 선술집에 있었던 가구들은 그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담배불을 비벼 끈 검정색 자국들과, 손때가 타서 반짝반짝 맨들맨들해진 모서리들, 오랜 시간에 걸쳐 막걸리나 소주가 여러번 스며들었을 나무 표면.
이강소는 관객들에게 이 가구에 앉아 시간을 보내도록 제안함으로써,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술집의 가구들)과 공간(화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감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지 실험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선술집이 유행하던 70-80년대, 왁자지껄한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청년 작가들은 그곳의 공기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고민들과 설렘과 혼란을 여과 없이 꺼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주 앉던 자리의 테이블만 봐도 반갑고 익숙한 단골 선술집에서 우리는 속에 담아둔 이야기들을 술술 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의 때와 정이 잔뜩 묻은 테이블과 의자가 갤러리 공간에 들어오니 뭔가 예전 같지 않다. 관객들이 마주 보고 앉아도 지난날의 시끌벅적하고 맛깔나는 그 분위기가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예전의 그 공기와 온기는 술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함께했던 사람들 덕일까? 혹은 공간 때문일까? 어떠한 기억들은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시간, 사람들 덕에 더욱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거기에 술이라는 매개체가 끼어들게 되면 기억은 더욱 왜곡되기 마련이다. 조용히 앉아있으면 가구들이 과거의 호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낼 것만 같다.
전시를 보는 내내 젊음이 얼마나 뜨거울 수 있는지 생각했다. 마지막 날이기에 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젊은 관객들이 전시장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이미 노년이 되었거나 세상을 떠난 작가들도 한때는 30대를 보냈고, 지금 관객들과 같은 나이일 때 만든 작품들 속에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예술은 시간성을 고스란히 보관해주는 매개체이다. 작품을 통해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와 환경을 엿볼 수 있어 더더욱 그렇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그렇지만 이 작가들에게는 누구보다 뜨거웠던 60-70년대를 전시 덕분에 걸어볼 수 있어서 특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머무는 내내 할머니집 다락방에서 맡아본 듯한 아련한 향수의 냄새를 느꼈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서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