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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May 15. 2024

영양제 먹었니?

<아무튼, 영양제>

언젠가 유튜브에서 약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각종 영양제를 소개해놓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알고리즘을 통해 그 영상이 내 눈앞에 뜬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본진을 클릭해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려진 대부분의 영상들은 각종 영양제에 관련한 것들이었고, 각각의 조회수가 엄청났으며, 처음 클릭한 영상에 올려진 댓글들 또한 무시 못할 정도로 많았던 터라 호기심 차원에서 서너 편 정도 더 살펴봤던 기억이 난다.


기존에 먹던 게 있는데 이걸로 바꿀까요?

정말 효과 좋았어요, 강추!

좋다 나쁘다 잘 모르겠는데 당분간은 계속 복용해 볼 생각입니다.

제겐 안 맞아서 끊은 지 좀 됐어요.

비싸긴 하지만 효과는 괜찮았어요 등등.


댓글들을 보고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영양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상외로 정말 많았다는 것. 솔직한 심정으로 보는 도중 살짝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다. 대체 영양제가 뭐길래. 요리 보고 조리 보며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영양제를 선택하기 위해 아우성치던 사람들. 티키타카 질문과 대답 속에서 내 인생의 영양제를 찾아 고군분투하던 그 치열한 현장의 모습이 흡사 무슨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돌이켜보건대 내 경우의 영양제라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챙겨주셔서 먹었던 몇 차례의 한약 정도. 만인의 연인 비타민C는 오며 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건네는 레모나 정도로 간헐적으로 섭취하곤 했던 수준. 나는 전쟁터에 뛰어들고 싶지 않은 은둔자 모드를 고수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거실 탁자 위 모퉁이엔 아직 개봉하지 않은, 60정이 담긴 영양제 한 병이 있다. 작년 5월, 급작스럽게 난 인사발령으로 근무처를 옮겨야 했을 때 맞은편 자리의 동료 직원이 건네준 선물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 그리고 드물게 있었던 직원 회식에서 소주 두어 잔에 기진맥진하던 내가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사용기한을 보니 2025. 10. 23. 굳이 날짜를 확인해 보는 이유는, 아직은 복용하지 않고 그대로 두겠다는 심산. 선물에 담긴 그녀의 마음을 오래오래 곁에 두고 기억하고 싶기 때문. 세월이 흐른 먼 훗날, 이런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갈까 봐, 아쉬워할 수조차 없는 망각 속으로 이 기억이 사라질까 봐, 그렇게 나 모르는 어느 별자리에서 슬프게 반짝거릴까 봐, 오늘 아침 유난한 비가 내린다. 소리도 없이.  (2024. 4. 20.) 


소중한 기억 잊지 말아요. 사라져 버린 기억을 놓고 언젠가 불현듯 아쉬워하지 않도록 내가 나에게 써 보냈던 위 당부의 글에 대하여, 어느 날 문득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예상치 못한 카톡이었다. 


"영양제 먹었니?" 


책표지 상단에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문구. 초음속으로 안면을 강타하는 스트레이트성 잽! 그 묵직하고 매서운 한 방으로 일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된 나는, 일단 먼저 무릎을 꿇고 공손한 자세로 두 손 모아 빌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은 기분, 잘못한 건 없지만 잘못한 게 맞은 기분. 


"먹었니? 안 먹었니?" 


자백을 다그치는 듯 동공을 뒤흔드는 그 문구의 잔향에, 세상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반성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저.. 그게 아니고... 죄송해요. 밀린 거 몰아서 오늘부터 한 움큼씩 집어 먹을게요!' 그리고는 이내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한껏 웃었다.


<아무튼, 영양제>.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아무튼 시리즈"라는 게 있다는 것,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라는 것, 세 출판사(위고, 제철소, 코난북스)가 돌아가면서 함께 펴낸다는 것, 2017년 9월 <아무튼, 피트니스>를 시작으로 올해 5월 <아무튼, 실험실>까지 지금껏 총 66권이 출간되었다는 것, 각 잡고 앉아서 보는 진지함은 접어두고 그때그때 시간이 날 때마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 된다는 것, 내 관심도를 배가할 만한 <아무튼, 수영>이나 <아무튼, 피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


과거에 신시사이저를 발명했고 현재는 구글 엔지니어링 담당 이사로 인공지능 분야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는 레이 커즈와일. 책의 서두에 그를 소개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가 하루에 복용하는 영양제가 50알이나 되고 매년 영양제를 구입하는 데 쓰는 비용이 11억이나 된다는 사실이 작가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일 것이며, 아울러 독자들의 시선을 붙드는 데 이것만큼 효과 좋은 소재를 찾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 홍대의 영양제 괴짜라고 실토하긴 했으나, 하루에 영양제 13알을 복용하는 자신보다는 50알과 11억의 임팩트가 가져올 파장에 훨씬 더 지극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레이든 작가든 영양제 문외한인 나에겐 둘 다 똑같이 넘사벽의 아득한 존재였으나, 그것이 21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을 읽는 데에 그 어떤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통통 튀는 재치 어린 문장력, 그 속에 버무려진 유구하고 유익한 의학 정보, 생소했던 영양제를 친숙하게 만드는 여러 에피소드, 영양제 구매 욕구를 한껏 올려놓고는 먹든지 말든지 내 알바 아니라며 막판에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한 극강의 시크함 등등이 독자인 나에게 적지 않은 재미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으면서 훗날 언젠가 나도 한번 써먹어 보고 싶었던 오쏘몰 에피소드. 


오쏘몰에는 '비타민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이 있다. 한마디로 뭘 정리할 땐 항상 주접과 낯간지러움이 동원된다. 하지만 파괴력이 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상자를 꺼내며 "원장님, 이거 오쏘몰, 이거 비타민계의 에르메스"라고 설명했고 선생님도 "오오오!"하고 받았다. 
(p67)


"○○님, 이거 오쏘몰, 이거 비타민계의 에르메스!" 

"오오오!"


상상하고 킥킥거리고, 킥킥거리며 다시 또 상상해 보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다.


책 내용과는 다소 동떨어진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주창했다는 "슬픔의 5단계" 이론이 개인적으로 꽤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질 유산균이라면>  편에서 재치 있는 말솜씨로 작가가 소개한 이것은, 검색을 해보니 원래는 예견된 죽음을 직면한 이들이 겪게 된다는 "죽음을 대하는 5단계" 이론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대상 폭이 확장되어 언젠가부터는 상실이나 슬픔의 영역에도 적용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어느 누구나 100% 완벽하게 이 순서를 따르는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수순을 거쳐 죽음을, 상실을, 그리고 슬픔을 받아들인다는 이론. 그렇다면 나의 슬픔은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고 확인하고, 그것이 맞다 인정하면서 내 오래된 슬픔의 이력을 들춰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다. 어떤 슬픔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격하게 혹은 잔잔하게 머물러 있고, 그렇게 타인에게 들키지 않는 마음속에서 제 몫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99만 건의 메타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영양제는 사망 위험을 줄이거나 심장질환을 예방하는 데 별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칼슘과 비타민D를 함께 섭취할 경우 뇌졸중 발병 확률이 높아질 수도 있다.
- 존스홉킨스 의대 연구진, 2019년 미국 내과학회 발표 중에서


<아무튼, 영양제>.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고 나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펼쳐 본 페이지는 책의 맨 앞장이었다. 각각의 성분을 함유한 수많은 영양제들은 제 나름의 효능으로 우리 몸 곳곳에서 국지적 존재감을 과시할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영양제는 사망 위험을 줄이거나 심장질환을 예방하는 데 별 효과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고도 밀크시슬을, 프로폴리스를, 그리고 비타민계의 에르메스 오쏘몰 등등을 오롯이 나를 위해 구입하고픈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한 가지 기억하고 싶은 건, 내 몸을 위해 이것저것 살펴보는 영양제만큼이나 때때로 내 슬픔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영양제도 찾아봐야 한다는 것. 그러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마음속 숨어 있는 슬픔에 한 움큼의 위로로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영양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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