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파꽈리 Apr 07. 2024

사랑이 있었네

최근에 알게 된 인디밴드가 있다. 노리플라이(no reply). 검색을 해보니 2008년에 싱글 앨범을 발표하면서 데뷔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만났다. 언제 누가 나타났다가 또 언제 사라지는지도 모를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는 연예계. 가수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으로 꾸준히 대중을 만나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이 얼마만큼일지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어쨌거나 데뷔 후 16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대중의 한 사람인 내가 우연으로나마 그들의 음악을 접하게 된 건 행운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오랜만에 발표한 노리플라이의 앨범 <사랑이 있었네>를 들으며 20대 초반 풋풋했던 자신의 대학생 시절을 회고하는 글 한 편을 읽었다. 자신처럼, 몇 년 만의 앨범 발매 소식에 초창기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기쁨이나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의 영역에서 나름의 위안을 받았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서, 유튜브나 뮤직 앱의 댓글을 통해 젊음의 터널을 통과하며 겪고 느꼈던 속 깊은 얘기를 몇 줄의 행간에 담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앨범에 수록된 첫 번째 곡 <반짝이고 있어>에 담아 쓴 글쓴이의 에피소드는 참 따뜻했다. 입사 10주년을 맞이해 계획한 뜻깊은 일. 과거 어려웠던 대학시절 자신이 받았던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고 담아둔 그 고마움을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기꺼이 되돌려 주는 그녀가 참 멋있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 마음에 잠시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You make me smile."

<반짝이고 있어> 속 가사를 멜로디에 맞춰 따라 읊고도 싶었다.


https://youtu.be/P2WjKkl7YOs?si=v7eX7SWqTlAbS2XJ


공식 뮤직비디오는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과의 협업으로 제작됐다고 하는데, 배우 이설을 화면으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몇 년 전에 <옥란면옥>이라는 2부작 드라마를 참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방송에서 그녀를 보고는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했었다. 드라마가 끝날 무렵엔, TV에서건 영화에서건 앞으로 여기저기에서 자주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도 하였다. 100% 똑같이 들어맞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잠시 누군가가 연상되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간병을 받고 있는 할머니, 그리고 관광 안내원으로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 어느 날 요양원을 찾았을 때 가족의 방문을 의연하게 맞이해 주셨다던 외할머니, 그리고 언젠가 마음에 드는 이국으로 훌쩍 떠나 그곳을 방문하는 전 세계 여행객들을 상대로 이곳저곳 멋진 장소들을 안내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했던 사람. 왠지 노래만큼이나 뮤직비디오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앨범 표지를 보고는 문득 영화 <노트북>이 생각났다. 벤치에 앉아있는 노년의 남녀. 영화는 줄곧 노트북을 펼쳐 든 남자가 여자에게 책 속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노리플라이 앨범 표지의 풍경처럼 그들도 저 먼 과거의 어느 날, 남자의 집 근처 호수에 배를 띄운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 무렵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그들은, 철없던 10대의 한 시절에 만나 사랑을 속삭였던 과거를 회상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잔잔한 호수의 평화로운 풍경과는 달리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로 마음이 복잡했던 두 사람. 빈부의 격차, 신분의 차이, 거기에 딸의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까지 더해져 둘 사이에 자리하게 되었던 오해의 벽은, 급작스럽게 흐려지는 날씨와 이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자, 한번 따져보자, 너 그때 왜 그랬어?"

"그러는 넌?"


미친 듯이 퍼붓는 비는, 두 사람 모두 말 꺼내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고 있던 과거의 진실을 격정적으로 토로하게 만든다. 하루에 한 통씩 일 년 365일을 꼬박 채워 보냈던 남자의 편지. 각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낸 편지에 회신을 주지 않았던 여자와, 그렇게 사랑한다 해놓고 아무 연락이 없었던 남자로 인식되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오해의 외피를 벗고 진실 앞에서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 상대방을 향했던 불신과 서운함을 일시에 씻어내려는 듯 맹렬히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두 사람은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 젠장, 여기까지만 쓰는 걸로.



노리플라이(no reply) 앨범 표지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이었다. 이걸 윤슬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 정도면 적지 않은 세월을 건너온 인생일 텐데, 어떻게 지금껏 이 단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살아왔는지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물비늘 정도로만 알아왔던, 게다가 그 어감이 별로라 지금껏 개인적으로 거의 사용한 적이 없는,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지칭하는 말. 그에 비하면 윤슬은 뭔가 세련된 산뜻함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생경함이 앞서는 낯선 단어로 다가오는 터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게 그리 자연스럽지는 않다.


대학생 시절, 후배 S와 어느 날 저녁 학교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실존주의를 중심으로 한 철학,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의 작품들, 그 외 여러 가지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던 중에 갑자기 그녀가 이따가 춘천에 있는 소양강댐을 보러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총총한 눈빛을 하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 사뭇 도전적이어서 묘한 승부욕이 발동하기도 했다. 얘기도 잘 통하고 분위기도 한창 무르익은 터라 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가 아마 자정이 좀 넘은 시각이었을 텐데, 그 이후 청량리에서 아침 첫 기차를 타기까지 밤을 꼴딱 새우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차피 세상은"이라는 타이틀을 걸어 놓고 다소 염세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던 것 같고.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를 나지막이 흥얼거리는 기분이 좋았다. 비몽사몽 눈이 감기는 도중에 가끔씩 눈으로 들어와 잠을 깨우는 햇빛은 참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어깨에 서로를 기댄 채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두 사람. 우리 외 세상의 모든 건 그저 조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당도해 맞이한 소양강댐의 첫인상은 참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소양호 잔물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그런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질 즈음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생각 해요?"

"저기 저 반짝이는 물결 위에 편지를 쓰고 있었어."

"무슨 내용인데요?"


그때 나는 어느새 연인의 심정이 되어 "안 가르쳐 주지~"를 시전했던 것 같은데, 다만 제삼자가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짜증나는 어투와 몸짓까지는 가미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내 옆의 S에게 편지를 썼었고, 그 내용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달달한 밤양갱 맛으로 가득했을 텐데, 살아온 세월에 짓눌린 탓인지 이제는 찰랑이는 물결 따라 반짝이던 편지를 썼던 나조차도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막 사라지는 것들이야 아쉬움에 붙들 여지는 있다손 치더라도, 이미 사라진 것들은 손에 쥘 만한 게 미련뿐이라 아예 망각 속에 묻히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있었네>를 들으며 나는, 20대 초반 풋풋했던 대학생 시절을 회고하던 누군가를, 영화 <노트북> 속 20대 청춘들의 사랑을, 그리고 이들처럼 20대 어느 시절에 만났던 S와 그녀에게 보냈던 빛나는 편지를 떠올린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 수많은 계절을 지나치면서 내뱉은 한숨은 얼마일 것이며, 허전한 손을 부여잡은 채 말을 잃은 건 또 얼마일 것인가. 놓쳐버렸던 지난 꿈들을 떠올리는 밤이 줄곧 이어진대도, 어느 날 혼자인 방 안으로 가득 들어차는 햇살을 핑계 삼아 가보지 못한 여행지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아보는 것이, 그렇게 걸어가는 것이 한때 사랑이 있었던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가 보내는 다짐과 응원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마음 한 편 묵직한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건, 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내 20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지금은 거의 없다는 사실. 분명 그 시절을 살아왔으나 사라져 버린 젊음을 따라 송두리째 자취를 감춘 것 같은 내 20대. 그런 면에서, 다른 건 다 지우고 없애버렸어도 끝끝내 지금까지 간직해 온 글 하나를 올려본다. 30대 어느 가을날, 유치하다는 자평을 곁들이며 20대 중반에 썼던 글을 회고하던 나. 그러다 언젠가부터 유독 눈에 띄기 시작한 글귀 때문에 한동안 짠하게 여겼던 그 시절의 나.


"낭만이라는 걸 누릴 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는 씁쓸함에 문득 그와 같은 상상을 하는 나를 볼 때면 한편으로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낭만을 잃어버렸다는 자가 사랑을 꿈꾸는 이율배반적인 삶은 어디에서 기인했던 걸까. 이런 사랑이 있었다는 것도 삶에 위안을 가져다주긴 하는 걸까. 어디서 뭘 놓쳐버렸길래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저 짠하게만 느껴지는 내 모습일지언정 이제 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20대는 이것뿐이라 차마 내쳐 버릴 수가 없다.


바람 (2001) / 전봉열


이 밤, 귀뚜라미 소리를 담은 바람이 분다. 가을바람이다. 전봉열의 <바람>을 보고 누군가는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를 떠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바람이 일어난다 살고자 애써야 한다)"했던 폴 발레리의 시구를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오래전 이맘때 끼적거렸던 글 하나가 생각난다.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연애 감정에 관한 것인데, 그림 속 몇 가닥의 나뭇가지들이 내 눈에는 왠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의 전체적인 틀 자체가 바로 누군가의 시야인 셈인데, 그렇게 이해하면 저기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대체 이게 연애 감정과 무슨 관계? 내게 있어 사랑 고백은 바람에 흩날리는 누군가의 머리칼을 쑥스러움 없이 자연스레 넘겨줄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했던, 제목이 다소 유치한, 내용은 더욱 유치한 그 글을 오랜만에 다시 들춰본다. 아무래도 이건 바람 탓이다. 저기 저 어둠 속 가을바람 탓이다.




가끔씩 나는 이런 상상을 한다. 옆에는 세상 누구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여인이 내게 기댄 채 누워있고, 먼발치에 있는 오디오의 스피커에서는 감미롭고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창문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는 풍경을. 낭만이라는 걸 누릴 수 있는 나이는 지났다는 씁쓸함에 문득 그와 같은 상상을 하는 나를 볼 때면 한편으로는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사랑이라는 걸 알 수 없는 나로서 구태여 나이를 들먹이며 스스로에게 핀잔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영어 선생님께서 자신의 경험담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힘든 시기가 닥쳤을 때 나는 미래에 만나게 될 나의 동반자를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마음을 다잡고 노력하여 그때의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었었다."라고. 그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던 이유는 나도 중학생이었을 때 그와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한 아이의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그 편지지 안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서로 열심히 격려해주고 학교생활에도 뒤처지지 않는 학생이 되기로 약속하자."라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난 그때까지 스스로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알찬 삶을 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그 힘이란 건 실로 대단했다.


우리는 보다 감미롭고 멋있는,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이 다가와주길 바란다. 흔히 나이가 어릴 때는 잘 생긴 남자가 우선이 되고 예쁘게 생긴 여자가 우선이 되지만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경험들을 충고 삼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방의 모습만으로 사랑을 구하려는 위험은 피하게 된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웃음을 짓게 하는데, 그러면 '눈이 높다'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함일까. 물론 상대방의 경제적인 여건을 비롯한 총체적인 것들을 고려하는데 있어서 주위의 일반 사람들보다 수준이 높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에 붙게 되는 꼬리표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례들에 있어서 '눈이 높다'라는 것은 어린 시절의 사랑에 가장 큰 기준이 되는 외모를 아직도 가장 큰 잣대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붙어 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잠시 웃음이 나는 것이다. 물론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주위의 객관적인 시선을 빌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그 사람을 바라보는 당사자의 눈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아름답고 예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거론할 여지가 없겠지만 말이다. 눈이 높은 사람들을 핀잔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사랑의 방식이 있을 터,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이 잘 생기고 예쁘면 금상첨화겠지만 왠지 그래도 나는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에 더 친근함이 느껴진다.


그러면 이제 내가 미래에 만나게 될 그 알 수 없는 나의 동반자를 위해서 열심히 생활하다가 실로 우연히 '제 눈에 안경'을 쓰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먼저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깨쳐야 할 것 같다. 흔히 우리는 연애를 잘하는 사람들을 '연애박사'라고 칭한다. 물론 그 표현에는 걸러지지 않은 약간의 비판 섞인 뉘앙스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의 일부라도 배울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술이나, 그냥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는 기술이나,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넘겨주는 기술과 같은 것들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끔씩 난 내가 혹시 어린 시절 버려져 늑대와 함께 생활했다는 정글북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뒤늦게 인간세상을 접하고 한 여인을 만나 서툰 사랑을 했던. 남들은 사랑을 고백할 때도 멋들어진 표현을 써가며 한다고 하는데 사랑에 있어서 걸음마 단계도 채 건너지 못한 내가 사랑을 고백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말문이 막힌다. 수없이 많은 달콤한 말로도 사랑의 크기를 나타낼 수 없을 것 같으니, 내가 직접 고백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나의 고백을 들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만약 어떤 식으로든 걸음마를 터득하게 된다면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어쩌면 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문득 생각이 드는 건 나의 사랑고백은 어쩌면 이겨낼 수 없는 긴장감으로 인해 땀에 절은 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는 그 순간이 아닐까 한다. 그녀의 눈을 한없이 바라보아도 내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그 순간이 아닐까 한다. 바람에 날린 그녀의 머리칼을 쑥스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쓰다듬으며 가지런히 해줄 수 있는 그 순간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내 행동에 그녀의 얼굴에서 나와 같이 '제 눈에 안경'을 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단 말이지.


[사랑을 고백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