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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Feb 09. 2024

긴긴밤, 우리를 떠올려

<긴긴밤, 2021>

피아노를 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 그리고 나만의 각종 요리별 레시피를 작성하는 것. 버킷 리스트까지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어 머릿속에 늘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다. 참고할 만한 레시피야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보고가 있으니 논외로 하고, 피아노나 초상화 같은 경우엔 집 근처에 마땅한 음악학원이나 미술학원이 있을까 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본 적이 있는데, 당시엔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했던 탓인지 검색에 쏟은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그 결과 또한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기만족의 지분이 크긴 하지만,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 바로 그 순간에 들려주고 싶은 피아노를, 그리고 싶은 초상화를, 해주고 싶은 요리를 절실히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이제는 이런 것들이 더 이상 꾸물거리거나 망설여서는 안 되는 내 나름의 시급한 지상 과제가 아닌가 하는 각성도 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개인적 중대 사안일 뿐임에도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순간엔 여지없이 나 아닌 그 사람에게도 이 같은 물음을 던져 보게 되는데,


"나중에 꼭 해보고 싶은 거 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동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든든한 삽화가도 머릿속에 생각해 놓고 있다고 했다. 거의 즉문즉답으로 이루어진 대화였음을 감안할 때, 동화 작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품어온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거의 무관심했던 동화. 기억을 쥐어짜도 몇 개밖에 떠오르지 않는 제목들. 개수만큼이나 각각의 내용 또한 선명하게 기억나는 게 별로 없었다. 누군가 옆에서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인기리에 세상에 읽혔을 법한 동화의 제목들을 줄줄이 읊어주기라도 한다면야 실제로 읽어본 작품들이 적지는 않았으리라 싶지만, 동화라는 장르 자체를 잊고 지내왔던 그간의 세월을 겸연쩍게 돌아보게 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듯하다. 동화도 그냥 동화가 아니라, 언제부턴가는 어른을 위한 동화까지도 나왔다고 하는 마당에. 이렇듯 동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동화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집어든 책이 하나 있다.


<긴긴밤>. 어떤 단어의 사용 빈도가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으로 용인이 될 만큼 잦아지게 되면, 서로 떨어져 각각의 독립적인 의미를 유지하던 단어들이 끝내는 하나로 결합해 의미의 깊이를 더하는 경우가 생긴다. 길고 긴 밤, 그리하여 긴긴밤. 긴 밤이 어느 정도 모여야, 혹은 그 밤이 얼마만큼 길어야 긴긴밤이 되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우리들 모두는 언젠가 각자의 인생에서 몇 번쯤 그 같은 긴긴밤을 맞이했고, 맞이하고 있으며, 또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그 기운 속에서 우리는 무슨 일을 겪었으며 어떤 걸 깨닫고 또 무엇을 꿈꾸며 다짐하게 될까. 이미 지나쳐 왔고, 현재 통과하고 있는 중이며, 앞으로 마주하게 될 긴긴밤 속에서 지금의 우리가 스스로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긴긴밤을 겪어 간 이들을 만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 각각의 삶 속에 녹아들어 우리 또한 긴긴밤을 지새우다 보면, 왠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이 같은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코뿔소 노든이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자신이 코끼리 고아원에서 삶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어떻게 태어났고 또 어떤 연유로 그곳에 있게 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고아원이라는 환경도 그렇지만 코끼리 무리에 섞여 자란 코뿔소라니. 순간 나는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올랐다. 알에서 깨어나 보니 주변 새끼 오리들과는 확연히 다른 자신의 모습. 그 때문에 자주 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무리를 벗어나 홀로 길을 떠나는데, 지난한 여정에서 만나는 이들에게서도 대체로 구박과 위협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어느 날 우연히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여태껏 줄곧 오리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자신이 실은 오리가 아닌 백조였음을 알게 된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받았던 주변의 차별과는 달리, 코뿔소 노든은 곁에 있었던 코끼리들로부터 상냥하고 친절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미운 오리 새끼가 홀로 자아를 찾는 여정을 떠났던 거라면, 코뿔소 노든을 비롯한 이 책 속의 존재들은 모두 혼자가 아닌 우리라는 연대 의식을 부각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갔다.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그들의 이야기가 내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질 때 가끔씩 나는 이 같은 읊조림을 되뇌기도 했으리라.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p.12)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자신이 코끼리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즈음, 코뿔소 노든은 코끼리 무리가 따르던 어느 할머니 코끼리에게서 위와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이는 140여 페이지 분량으로 이루어진 <긴긴밤>을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고아원. 태생적으로 아니면 후천적으로 상처를 지니게 된 이들이 모이는 곳. 하지만 외양이 달라도 각자의 슬픔이 달라도 하나가 또 다른 하나에게 기대는 우리의 모습으로 함께 삶을 영위해 가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순리임을 깨닫는 것. 생각해 보면 이는 비단 고아원이라는 특정 장소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언젠가 <긴긴밤>을 읽고, 그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에 공감하는 자신을 되돌아볼 때, 동화 속 "이곳"은 결국 지금의 나와 네가 함께하는 바로 그 공간일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기도 하다는 걸 느끼게 될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 충분히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코뿔소 노든은 결국 코끼리 고아원을 떠나는 결정을 한다. 자아를 찾고자 선택한 여정. 긴긴밤의 시작이다. 생전 처음 보는 드넓은 초원 위에서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즐거움을 얻기도 하고,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뿔을 가진 코뿔소를 만나 가정을 이루는 행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어느 날 그보다 훨씬 큰 상실의 고통과 분노를 겪게 되면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로 그는 파라다이스 동물원으로 보내지게 된다. 파라다이스. 걱정과 근심이 없는 지상 낙원이라니. 삶은 때때로 격렬하게 역설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곤 한다. 가족을 잃고 심신이 망가진 코뿔소 노든, 출생부터 한평생 동물원 안에 갇혀 생활하다 뿔이 잘리고 목숨까지 잃는 코뿔소 앙가부, 전쟁 통에 폭격으로 어려서부터 절친이었던 윔보와 죽음으로 이별하게 된 펭귄 치쿠, 그리고 다른 알들과는 달리 검은 반점이 있다는 이유로 태생부터 버림을 받은 펭귄 알 하나. 이처럼 슬픔이 겹겹이 쌓인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을 파라다이스라고 명명하면 이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러나 슬픔이 그저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슬픔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기어코 살아남은 자들에게 또 다른 삶을 영위하게끔 만드는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어주었으니, 이런 측면에서라면야 그 이름에 담겨 있는 가혹함을 조금은 덜어내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동물원을 떠난 이후로 바다를 향한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 그리고 버려진 펭귄 알의 동행이 시작된다. 힘겨운 여정을 함께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일들과 서로 간에 주고받은 숱한 이야기들. 그 속에서 코뿔소와 펭귄이라는 각기 다른 존재가 눈앞에 닥친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함께 헤쳐나가는지, 어떤 방식으로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지 따라가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이 함께한 긴긴밤에 빠져들어 실로 가슴 뭉클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긴긴밤>은 나를 살게 한 이들이 있어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이야기이며, 그렇게 살아가면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거기엔 코뿔소 노든과 앙가부, 펭귄 치쿠와 윔보, 그리고 알에서 깨어난 어린 펭귄에게 닥쳤던 상실의 밤, 분노의 밤, 고난의 밤, 약속의 밤, 이별의 밤, 불면의 밤, 그리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의 밤이 있다. 그런 긴긴밤들을 함께 보내다가 마침내 누구는 초록색 지평선 초원을 선택하게 되고, 또 누구는 파란색 지평선 바다를 선택하게 되는 각자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코끼리 고아원을 떠났던 애초의 결정을, 그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눈물로 맞이한 긴긴밤들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언젠가,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어린 펭귄의 질문에 코뿔소 노든이 내놓았던 이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2월로 접어들면서부터 해가 많이 길어졌음을 느낀다. 상대적으로 밤은 짧아졌으나, 또한 앞으로 점점 더 짧아질 것이나 우리가 맞이하는 긴긴밤은 이 같은 물리적 어둠으로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긴긴밤>을 읽으면서 나는 잠시 지난날의 상실과 분노를, 현재의 이별을,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희망을 생각했다. 1995년의 봄, 그해의 목련에 얽힌 상실을. 달리기를 하지 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 그 고통을 낳게 한 초등학교 4학년 그 어느 날에 대한 분노를. 정말 헤어지는 건 아닌데도 마치 헤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마음이 출렁였던 올해의 이별을. 내 몫이 아닌 듯해 손 놓아야 함에도 끝내 미련처럼 붙들고 있게 되는 희망을. 이런 것들로 빚어진 내 긴긴밤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종착역이 다른 열차에 올라 한 세월을 살아가는 우리를 생각했다. 비록 코뿔소 노든과 어린 펭귄의 선택처럼 우리의 마지막이 서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그렇듯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할 운명이라도 잠시 어느 간이역에 머물러 서로의 얘기를 주고받는 우리를 생각했다. 일상의 불안으로 흔들리는 내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너를, 성치 않은 건강에 과도한 업무로 시달리는 네게 가벼운 토닥임을 건네는 나를 떠올렸다. 그렇게 각자의 긴긴밤을 달래며 가끔은 우리의 긴긴밤을 함께 헤쳐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 필연으로 읽었던 한 권의 책. 그러고 보니 <긴긴밤>은, 마치 정언 명령처럼 마땅히 맞이하고 견뎌내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긴긴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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