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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Dec 13. 2023

연극이 끝난 후

근무하는 곳, 건물 정면으로 지역 주민을 위해 조성된 널찍한 공원이 하나 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축제의 일환으로 그곳에서 한 달 정도 국화전시회가 개최되는데,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의 동편에는 해당 기간 동안 소규모 미술 전시라든지 음악 공연을 비롯한 각종 행사들이 열린다. 날씨 탓인지 올해는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 국화 전시 기간을 일주일 정도 연장했었다. 축제가 막바지로 치달아 가던 어느 날,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공연을 하는 모양이었는데, 공연 장소에서 근무처까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편이라 앰프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그렇게 시끄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시각에 공연을 하면 관객은 좀 있으려는지. 걱정보다는 안쓰러움에 가까운 심정으로 잠시 귀를 기울였다. <연극이 끝난 후>. 1980년 제4회 MBC 대학가요제 은상 곡이었다. 2001년에는 영화 <친구>에 삽입되면서 적지 않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떨어진 거리 때문이었는지 목소리와 반주 소리 모두가 뭉개져서 들려오는 터에 제대로 된 감상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오랜만에, 그것도 실시간 라이브로 듣는 기분은 썩 괜찮았다.


어렸을 때 몇몇 TV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대학교에 가면 한두 가지 정도는 직접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교라는 곳은 배움의 장소보다는 자유가 범람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꼭 해봐야지가 아니라 해보면 어떨까 수준의 바람이었다. 그렇게 치열하지 않은 열정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 중 하나는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 또 하나는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일요일마다 MBC <퀴즈 아카데미>를 즐겨 보았다. 사회자의 진행도 맛깔스러웠고, 연전연승을 기록하는 팀들을 보며 응원하는 맛이 꽤 쏠쏠해서 되도록이면 방송 시간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유독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팀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제법 독특했다. <오촌당숙>. 당숙과 당질이라는 친척 관계의 항렬을 고려하면 보통 부모와 자식 사이의 나이 차 정도는 있어야 하건만, 팀을 이룬 그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의 대학생으로, 으레 그럴 거라며 판에 박힌 일상으로 치부한 것들에도 예외는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찰떡 호흡을 이루며 문제도 잘 맞혔다.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가요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유열의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와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다. 언젠가의 강변가요제 수상곡이었던 이상은의 <담다디>와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만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상과 금상이 바뀌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들이 나오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논란과는 별도로 모두 다 좋은 곡들임엔 분명했다. <연극이 끝난 후>는 약간 특이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일반적인 대학생들이라면 흔히 마음에 두었을 법한 소재들, 이를테면 사랑 따위를 얘기하지 않았다.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 위에 남겨진 배우를, 그리고 그 배우를 응시했던 어둠 속 비어버린 객석에 남은 관객을 노래했다. 한때 열렬했으나 그런 분위기에 쏟아부었던 우리 모두의 열정과 환호가 사라져 버린 후를 멜로디에 담았다. 새삼스레 연극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또한 그 끝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잔상을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혼성 그룹 여성 리드 보컬의 목소리는 전반적으로 무심한 듯하면서도 차분했는데,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노래의 극적 효과를 더하는 느낌이었다.


연극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면 자연스레 가면이나 거짓말 같은 말들이 연상된다.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클리셰의 전형으로 거론될 만한 대사도 떠오른다. "이제 연극은 그만해! 네가 누군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이제 모두 다 알게 됐다고!" 당사자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당혹감이나 후련함으로, 반면에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상처 난 믿음에서 쏟아지는 배신감으로 각자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어루만져야 하나, 피가 나도록 긁어야 하나,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아예 도려내야 하나. 그렇게 탄로 난 잘못된 믿음과 확신의 부산물을 처리하는 방법이야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할 것이지만, 관객으로서 그 둘 모두의 심리를 헤아리다 보면 뭐라 표현하기 힘든 희열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는 두 주체 모두에 대해 객관적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지,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쪽에 감정이입을 했을 때 맛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카타르시스는 아닐 것이다.


"관객은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노랫말을 따라가다 보면 때때로, 착각에 휩싸일 뿐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관객이라든지 주연 배우 곁을 배회하다 어느 순간 사라지는 조연 배우가 인상적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들을 주인공 삼아 생각의 고리를 연결 지어 보기도 한다. 연극이 끝난 후 정적과 침묵과 고독만이 무대 위를 떠돌 때, 그때야 비로소, 끝내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을 생각해보곤 한다. '사랑 따위'란 말로 낮잡았던 나의 무심함을 애써 잊고서, 바로 그 사랑에 관해 주인공이 되지 못한 그들을 잠시 떠올려 보기도 한다. 김광진의 노래 <편지>는 어떨까.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사랑의 주연이 되지 못한 한 사내가 김광진의 아내에게 써서 보냈다는 편지의 글귀가 노래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의 조연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자의 독백과도 같은 사연이 멜로디를 타고 주인공들을 비롯하여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시큰하게 한다. 정적과 침묵과 고독 속에 떠도는 슬픔이란 게 있다면, 또한 그것이 사랑에 연유한 것이었다면, 끝내 주연이 되지 못하고 변방으로 사라져 홀로 남겨진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은 대체 얼마만큼이나 될 것인가.


<연극이 끝난 후>. 그럼에도 노래가 끝나고 나면, 연극이라는 무대 위,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 모두는 결국 주연 배우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때로는 타인의 삶이 부러워 어둠 속에서 숨죽인 채 그를 지켜보는 관객이 되기도 하고, 내 주변 한때의 조연과 나를 응원하던 관객이 어느 순간 사라졌음을 확인할 때 적지 않은 상실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연이어 찾아오는 정적의 기운 속에서 침묵의 세월을 보내거나 고독 속으로 침잠해 너와 나 우리 사이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공고히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 삶인 것 같다. 삶의 모습인 것 같다. 주연이지만 때론 조연이나 관객이 되기도 하면서, 이렇듯 추측이나 짐작으로밖에 정의 내리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연극이 끝난 후 다시 홀로 무대 위에 올라 어두운 객석을 바라보는 배우로, 또한 불 꺼진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의 관객으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내년에도 가을 어디쯤에서 국화전시회가 열릴 것이다. 다시금 축제의 기운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끝나도 끝나지 않은 연극의 노래가 그곳에서 다시 들려와도 좋을 일이다.


https://youtu.be/s3uPXokhpnA?si=5HHtHfUJp7XGYg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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