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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Dec 08. 2023

첫눈에 빠져버린 사랑

계절의 허들을 넘는 기분으로 올해의 첫눈을 맞이했었다. 폴짝! 지금 이 순간부터는 겨울이야. 시간의 흐름에 무심했던 나를 다그쳐 2023년 한 해를 가다듬었다. 찬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처럼, 뭔가에 끌려다니는 기분으로 지난날들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마지못한 정리를 하는 와중에 생을 다한 첫눈. 처음이란 단어에 담았던 두근거림 또한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눈, 인상, 사랑 따위에 빈틈없이 눌어붙은 "첫-"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악착같은 맹렬함에 감탄을 하면서도 숨을 다해 종적을 감춘 후의 허무함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첫눈, 첫인상, 첫사랑. 오롯이 처음이어야만 존재 증명이 가능한 것들.


얼마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한 편을 만났다. <번지점프를 하다>. 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십수 년 전 24세 젊은이의 모습을 끝으로 자료 화면으로만 남아 세상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한 생을 통해 마주한 인연이 분명 다음 생에도 이어질 거라는 믿음을 줄 만큼 간절한 사랑을 그렸던 그들인데, 비록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고 해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그 둘의 운명을 두고 이처럼 아이러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https://youtu.be/qKNRjWCZdcg?si=HpnKaBTqn2kq-UYI&t=90


영화 속엔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했던 연주곡이 들어있다. 작곡가를 몰라도, 그가 쓴 곡 제목을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Jazz Suite No.2> 中 <Waltz II>. 저 멀리 수평선 노을을 배경으로 해변에서 인우와 태희가 손을 맞잡고 약간은 어설프게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태희의 허밍에 이어 깔려 나오는 음악이 바로 그 곡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 많은데 첫눈에 빠져버리게 되는 사랑도 그중의 하나다. 이에 관련하여 잠시 영화 속 인우와 태희의 대사를 아래에 옮겨보면,     



인우 : 정말 그랬어. 그날, 널 처음 봤을 때 온 우주가 한 사람으로 집중되는 느낌. 사실 난, 첫눈에 반해서 영원을 생각하고, 장담하고 그런 거 다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어이없다는 듯) 나, 서인우 맞아?     

태희 : (미소) 나도 그랬어. 나도 너 처음 봤을 때 아, 우리 사랑하게 되겠구나. 우리의 끝은 사랑이겠구나.



인연이라는 단어를 부각하고 싶은 시절의 연애편지는 온갖 운명론적인 설렘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인우의 대사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온 우주가 한 사람으로 집중된다든가, 영원한 사랑을 떠올린다든가, 이 넓은 지구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됐을까, 라며 둘의 만남 자체에 막무가내의 필연적 당위까지 부여하기도 하는 바로 그 같은 가슴 떨림. 또한 언제부턴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오로지 둘만의 사랑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은유의 물결로 화하기 시작하는데, 연애라는 것이 심지어 첫눈에 반해서 시작된 거라면 그 물결의 출렁임 또한 심히 격할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한 가지 불안한 점이 있다면 과연 언제까지 출렁일까 하는 것.

     

하지만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 같은 불안감을 철저히 배제시킨다. 태희의 입을 통해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것처럼, 죽음이란 그저 한 생의 끝일뿐이지 어느 순간 그 삶 속에 들어앉은 사랑의 종말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피력하고 있다. 인우의 대학시절을 사랑의 시작(beginning)에 관한 이야기로 본다면, 그의 교사시절은 바로 그 끝나지 않은 사랑의 속편(sequel)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영화의 막바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번지점프는, 이번 생에서도 끝나지 않은 사랑의 속편이 다음 생에서 또다시 만들어질 거라는 결정적인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우려되는 것은 '첫눈에 빠져버린'이란 말에서 느껴지는 다소 경박하고 피상적인 사랑의 뉘앙스다.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는 건 어떻게 보면 상대의 외모가 중점적으로 감안된 지극히 즉흥적인 충동의 결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과 반대로 첫눈에 반하지는 않았지만 지내다 보니 사이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상대방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 과연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중하고 실질적인 사랑에 다름 아닐까.      


<Love at First Sight>는 1996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작품이다. 첫눈에 빠져버린 사랑이라는 것도 실은 당사자들이 알아채지 못했다 뿐이지, 그들이 서로를 의식하기 훨씬 이전부터 주위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의 우연들이 보이지 않게 그들을 하나로 묶어 온 것에 기인한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만약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읽고 공감을 한다면, 첫눈에 빠져버린 사랑도 그 부정적인 뉘앙스를 마저 벗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전하게 설 수 있게 될 것인지.


첫눈이 찾아왔으나 그새 사라졌다. 맹렬하게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가 흔적 없이 자취를 감췄다. 해마다의 첫눈, 누군가의 첫인상. 계절 따라 사람 따라 되풀이되는 이것들과는 달리 첫사랑은 그 자체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운명을 타고나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 단 한 번으로 스쳐간다. 첫사랑. 첫눈에 빠져버린 사랑.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을 것이지만, 첫눈에 빠져버린 사랑이라면 과연 어떨까. 빈틈없이 눌어붙은 "첫-"의 맹렬함으로, 그 한 번의 마주침으로, 대책 없이, 그렇게 속절없이 몸과 마음이 저당 잡히는 사랑을 품어본 이는 얼마나 될까. 첫눈에 빠져버린 사랑. 번지점프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떨어져 들어가는 사랑. 몇 글자 되지도 않는 사랑이건만, 빠져든 사람 웬만해서는 놓아주지 않는 힘만큼은 참 대단하리라 어림해본다. 시를 읽다 보니, 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니.


https://wordsfortheyear.com/2016/10/16/love-at-first-sight-by-wislawa-szymborska-repost/


그들은 둘 다 믿고 있다.

갑작스러운 열정이 자신들을 묶어 주었다고.

그런 확신은 아름답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은 더 아름답다.


그들은 확신한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그러나 거리에서, 계단에서, 복도에서 들었던 말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수만 번 서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어느 회전문에서

얼굴을 마주쳤던 순간을.

군중 속에서 '미안합니다'하고 중얼거렸던 소리를.

수화기 속에서 들리던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하는 무뚝뚝한 음성을.

나는 대답을 알고 있으니,

그들은 정녕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게 되리라.

우연이 그토록 여러 해 동안이나

그들을 데리고 장난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 되기에는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해

우연은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훨씬 더 멀어지게도 만들었다.


비록 두 사람이 읽지는 못했으나

수많은 암시와 신호가 있었다.

아마도 3년 전,

또는 바로 지난 화요일,

나뭇잎 하나 펄럭이며

한 사람의 어깨에서 또 한 사람의 어깨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이 주웠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이

유년 시절의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공일지도.


문 손잡이와 초인종 위

한 사람이 방금 스쳐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스쳐가기도 했다.

맡겨 놓은 여행 가방이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어쩌면, 같은 꿈을 꾸다가

망각 속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시작은

결국에는 다만 계속일 뿐.

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지는 것을.


[첫눈에 반한 사랑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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