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정말로 해본 적 있다고요?"
클래식 음악이 흐르던 조용한 카페 분위기에 일순간 파문을 일으키는 목소리.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호기심 가득 상기된 표정으로 남자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당근이죠!"
남자의 표정과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여백을 허용치 않는 확고한 단답으로 대응한 여자는 이내 따분하다는 듯 오른쪽 창밖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은 아직도 안 해봤다는 건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카페 밖, 무심하게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으음.. 그럼.. 물론 당연히 먹어도 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 여자의 태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 채 남자는 행여 주위 사람들이 들을세라 방금 전 물어봤을 때보다 살짝 더 목소리를 낮추고는 속삭이는 투로 질문을 이어갔다.
"당근 아니겠어요?!"
따분함을 넘어 이젠 약간의 짜증마저 가미된 여자의 목소리엔 고리타분한 질문을 대할 땐 이렇게 응대해야 한다는 표본을 제시하는 듯 날카로운 어조가 담겨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 약간 움츠린 어깨에 한눈에 봐도 바른생활 사나이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던 그는 유행이 한참 지난 5:5 속칭 귀두컷 헤어스타일의 촌스러움을 겸비한 채 대화를 하는 내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고, 이에 반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있는 맞은편 여자는 산뜻한 베이지색 세미 캐주얼을 입은 채 세련미 넘치는 화장에 걸맞은 미모를 갖춰 나를 비롯한 카페 안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고 있었다. 무슨 결혼정보회사에서 주선한 맞선 자리에 나온 사람들일까. 초 울트라 스페셜하게 언밸런스해 보이는 그들의 만남. 애초에 성혼비는 포기한 듯한 그 결정사는 요즘 같은 불황의 시대에 잘 굴러가고 있는지.
행여 그들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부담스러워 읽고 있었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절반쯤 마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길고 길었던 무더위가 꺾이고 마침내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던 날, 이병률 시인의 여행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집어든 건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거늘,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던 그 두 사람 때문에 이미 마음의 평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날씨처럼 180도 달라져버린 기분. 고백하자면 그것은, 균형 잡히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서 느낀 안타까움 때문이 아니라, 당근이라 말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맞은편 남자의 귓가에 머물다가 오히려 더 큰 파장으로 내 가슴을 때렸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나이 먹도록 해보지 못했던 그것. "당근이죠!" 예쁘장했던 그녀의 입에서 당당하게 튀어나왔던 핀잔 섞인 그 짧은 한마디 때문에 괜스레 내가 살짝 뻘쭘해졌던 시간. 때맞춰 잠시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교생실습의 마지막 일주일은 어느 초등학교에서 보냈는데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의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이란 역시 녹록지가 않았다. 특히나 수업과 수업 사이에 10분 정도 쉬는 시간이 힘들었는데, 이윤즉슨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여러 아이들이 교실 뒤편에 앉아있는 교생들에게 한꺼번에 몰려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거나 소소한 장난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속했던 반에서는 공교롭게도 주요 타깃이 나였는데 그 이유가 좀 황당했다. 요 녀석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부턴가 내 머리 곳곳에 감춰진 새치를 뽑겠다며 아예 작정을 하고는 불도저처럼 맹렬히 달려들었던 것. 오죽하면 당시 그 반 담임선생님이 조회 시간을 빌려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언급을 하시기까지 했을까.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어쨌거나 그 같은 주의에도 아랑곳없이 실실 웃는 낯으로 고사리손을 뻗어오는 녀석들에게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럴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머리를 내놓는 수밖에 없었다. 머리통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는 현대판 구지가의 재현! 그야말로 머리통 수난시대! 아무튼 그때 그 아이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수업 시간 외에는 거의 항상 나에게 와서 "이랬는데요~, 저랬는데요~" 하면서 조근조근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던 아주 맹랑한 여자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맨 처음으로 새치를 뽑아대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지금은 거울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새치인지 말 그대로 세월에 닳은 흰머리인지, 그래서 정말로 이제는 새치가 많은지 흰머리가 많은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됐으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아니 좀 뻔뻔한 것 같아서 정정한다. 이젠 정말 다 흰머리다.
"염색을 좀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같이 일하던 동료들로부터 심심찮게 들었던 말. 동기부여를 확실히 해주려던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 흰머리를 지우면 10년은 더 젊어 보일 거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내 귀는 살랑살랑 봄바람에도 격하게 몸부림치는 슈퍼 팔랑귀! 그래서 가끔씩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기도 했었는데, 머리카락 자라는 속도가 좀 빠른 편이다 보니 보통 사람들보다 염색 주기도 짧을뿐더러, 나이가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염색을 하니까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후로는 아예 염색으로 미용실 찾는 일은 그만두고 말았다. 회춘보다는 머리카락 사수가 훨씬 더 중요한 나이라니, 슬퍼. 아무튼 나름 정기적으로 염색을 하던 시기에 언젠가는 미용실 비용도 아낄 겸 스스로 염색을 해보자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마음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염색에 대한 관심이 아예 꺾여 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방 한쪽 구석에서 서서히 명을 다해가는 염색약이 있었으니. 이런, 무려 4통씩이나 샀을 줄이야.
일주일 전쯤 집안 대청소를 하던 날 발견했던 염색약. 유통기한을 보니 내년 3월. 어차피 사용하지도 않을 건데 이걸 그냥 버릴까 하다가 문득 떠오르던 단어. 당근! 그래 당근!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당근을 해보자 싶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휴대폰에 깔아놓은 곰팡내 나는 당근 앱을 켜고 공을 들여 성실히 관련 내용을 작성했다. "시중에 인기 있는 염색약 4통 합해서 단돈 10,000원에 모시겠습니다." 과연 연락이 올 것인가, 그리고 팔릴 것인가. 기필코 팔고자 하는 자, 에누리라는 비장의 카드를 가슴에 품고 일단 신호가 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얼마 후 "당근!" 아, 이 앱은 이렇게 소리를 내는구나. 집 근처 행정복지센터 앞에서 나보다 연배가 더 있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와의 만남은 쿨거래로 금방 끝이 났다. 당근을 하는 게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
이리 단순한 걸 두고 그 남자는 뭐 그리 대단한 것인 양 호기심 가득 홍조를 띤 얼굴로 맞은편 여자에게 진짜로 해본 적 있느냐 물어봤던 것일까, 라는 핀잔을 주기엔 나 또한 며칠 전만 해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 막상 해보니 별것 아니었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는 것. 그래서 마치 호접지몽이라도 꾼 것처럼 "당근이죠!"라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와 나의 경계를 잊고 나 또한 잠시 흔들렸던 것. 당근은 먹는 건 물론이거니와 하기도 한다는 것. 당근을 먹어본 적도 있느냐고 물어본 그 남자는, 어떻게 보면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당근을 진즉에 해봤다는 투로 대답을 해온 여자 때문에 당황한 탓에 자신이 먹어본 적 있는 당근을 여자도 먹어본 적 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내놓게 된 건 아니었을까 하는 것. 그에 대한 나의 동병상련 측은지심이 이런 식으로도 발현되는구나 싶은 것.
당근이다, 라는 말이 언제부터 당연하다, 라는 말과 함께 쓰이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당근은 먹을 뿐 아니라 하기도 하는 것이라는 건 이제 몸소 실천한 탓으로 충분히 느끼겠다. "당근이죠!"란 말에 동요했던 그 남자도 지금쯤 어디에선가 당근 앱을 켜고 집안에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뭔가를 내놓으리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염색약 팔기에 성공했던 나는 연이어 몇 년 전에 구입해 놓고 한동안 쓰지 않았던 난방텐트 또한 적정한 가격에 팔아넘겼다. 뒤늦게 맛들이기 시작한 당근. 그나저나 5,000원에 올려놓은 자동차 휴대폰 거치대는 왜 이렇게 안 팔리는 것인가. 일단 먼저 뒤로 밀린 내 게시물을 "끌올"해봐야 하나. 이왕 한 김에 1, 2천 원 에누리를 한번 해볼까.
"당근이죠!"
며칠 전 어느 카페에서 보았던 아리따운 그 여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