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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Nov 07. 2024

김광석을 듣는 밤

사랑했지만

1991년 어느 늦은 밤, 라디오를 통해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물론 그 이전에도 어디에선가 스치듯 그의 노래를 만났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여기는 내 기억의 종착지는 바로 그때라는 것. 이어폰을 통해 전해져 오던 그의 목소리,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1절이 끝나고 후렴이 끝나고, 그리고 간주 후 다시 이어진 두 번째 후렴을 끝으로 마침내 노래마저 끝이 났지만, 어제 종일 내렸다는 노래 속의 비는 결코 그치지 않고 오늘까지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던 느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라디오를 끄고 집 근처의 레코드점으로 가서 그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첫 번째 앨범 또한.


<사랑했지만>을 작사·작곡한 한동준은 언젠가 라디오에서 고백하기를, 사실 김광석이라는 가수에게 선뜻 이 노래를 줄 수는 없었노라고 했다. 왜냐하면, 저음에서 고음으로 올라가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가슴에 응어리진 무언가를 토해내는 것처럼 너무나 격정적이므로 - 김광석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이것이 무슨 얘기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 - 그가 과연 이 노래에 어울릴지 반신반의했다는 것.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풀어내던 한동준의 얘기에 간간이 웃음이 났던 것은, 실제로 그가 자신이 우려했다는 바로 그 김광석의 고음 부분을 다소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게 흉내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친분이 돈독했기에 할 수 있었을 얘기와 행동이었으므로 김광석을 좋아하던 나조차도 충분히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던 에피소드. 김광석도 나름대로 한동준의 그 같은 우려를 고려했음인지, 실제로 노래의 클라이맥스인 후렴 부분의 "사랑했지만~"을 들어보면 그가 콘서트에서 고음을 낼 때 보여주던 일반적인 창법과는 약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에 얽혀 내가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어느 콘서트 도중 직접 김광석의 입을 통해서였다. <사랑했지만>이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건 사실이지만, 막상 자신은 당시에 이 노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다가서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 돌아서고 마는, 말하자면 가사 속에 다분히 수동적으로 그려진 사랑에 대한 태도가 자신이 보기에는 그저 못마땅했기 때문이라고. 그랬던 그가 어떤 계기를 통해 이 노래에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됐고 그 이후로는 더욱더 신경 써서 부르겠노라 다짐하게 되었다 했는데, 대강의 사정은 이러하다.


비 내리던 어느 날, 거리의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어요. 마침 우산도 없었던 터라 비를 흠뻑 맞을 수밖에 없었지만, 흘러간 세월 따라 사라져 버렸다고 믿었던 내 소녀시절의 감성을 되찾아준 이 노래 때문에 기분만큼은 너무 좋았답니다. 1924년생 늙은이가 주책이지요? 그때 당시에는 무슨 노래인지 모르고 지나쳤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다시 나오기에 방송국에 직접 전화를 걸어서 제목을 알아냈지요. 그 노래가 바로 <사랑했지만>이랍니다.


언젠가 연령대가 다양한 아주머니들이 참석한 어느 모임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 오셨던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 이 에피소드가 김광석의 구수한 목소리를 통해 나에게 전해져 오는 동안 가슴이 먹먹해졌었다. 


그렇다. 김광석은 나에게 이 같은 아련함으로 다가온다. 너에게, 그대 웃음소리, 기다려줘, 꽃, 거리에서, 그날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말하지 못한 내 사랑,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외사랑, 나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부치지 않은 편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등 하나 둘 셀 수 있는 그의 노래들이 나에게는 하나 둘 헤아릴 수 없는 감동을 가져다준다. 오래전 나름대로 거금을 주고 구입했던 기타로 과 MT에서, 기숙사에서, 하숙방에서, 자취방에서 연주하며 부르곤 했던 김광석의 노래들. 코드를 잡은 나의 왼손가락에 수시로 잡히던 물집이 마침내 통증을 수반하지 않은 단단한 살집으로 굳어졌을 때, 그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그게 벌써 28년 전의 일. 지금 이 순간, 언제부턴가 다시 말랑말랑해져 버린 왼손가락 끝을 괜스레 한두 번씩 꾹꾹 눌러보는 심사라니. 


며칠 전 비가 흩뿌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오는 것 같지도 않게 금세 사라져 버리는 계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 세상의 가을은 온통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다. 어렸을 적엔 수확의 계절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었다면 이제 내 인생의 가을은 길가에 널브러진 낙엽처럼 상실의 의미로 더 크게 와닿는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만감으로 교차하는 한 계절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비워내는 일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랑했기에로 이어지는 뿌듯하고 즐거운 이야기보다, 사랑했지만으로 단절되는 헛헛하고 쓸쓸한 이야기에 더 마음이 쏠리는 피할 수 없는 질곡의 한 생을 겪는 일일지 모른다.


<사랑했지만>. 노래 속에서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1991년 어느 날 밤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나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내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현실의 어제는 하루 종일 맑았고 오늘도 그 날씨는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그 옛날 처음으로 김광석을 만났던 그날처럼 왠지 모르게 비가 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비 그친 후 무서우리만큼 교요해질 주위 풍경이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켜버릴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들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초승달. 2024년 11월의 어느 모퉁이에서 아직 내려놓지 못한 하루치의 쓸쓸함을 다독이며 김광석을 듣는다, 얄궂은 세월이 내 삶에 또 하나의 방점을 찍고 달아난 어제처럼.


https://youtu.be/xhmKg2eFSlw?si=P4KKaamKEdn04cQ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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