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에게
2015년 11월, 내돈내산으로 생전 처음 맞이했던 자전거.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굳이 자전거를 사야 하나 싶어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구입을 했다. 당시엔 비교적 따뜻한 남쪽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었으니 겨울 찬바람이 그다지 매섭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단 욕구가 발동되면 그것을 뿌리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천성 때문에 저질렀던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 얼마 동안은 정말로 열심히 탔다. 그러나, 심히 의미심장한 그러나! 한두 달 지났을까. 집안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써가며 고독을 씹기 시작했던 자전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못내 안쓰러웠던 어느 날, 생색도 낼 겸 기쁜 마음으로 타 도시에 살고 있는 조카에게 건네주기로 마음을 먹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실행에 옮겼다. 형 차에 실려 고향을 떠나려 하는 녀석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찔끔 눈물을... 이 아니고 꽤나 후련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막상 자전거를 사려고 하니 어떤 걸 골라야 할지 참 막막했다. 로드, 하이브리드, MTB, 유사 MTB, 픽시 등등 생전 처음 접하는 단어들이 즐비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자전거 관련 액세서리 용품들 또한 어쩌면 그리도 다양하던지. 나는 그냥 자전거를 구입하고 싶었을 뿐인데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단순하게 굴러가고 있지 않았다. 아무튼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한 게 바로 삼천리 STINGER SF.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타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거라 처음엔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으며 균형을 잡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기억하는 것과 몸이 기억하는 것 사이엔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 굳이 더듬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약간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이 되는 육체의 묘한 마력. 집 근처 한산했던 주택단지를 몇 바퀴쯤 돌았을까. 어느새 능숙한 핸들링으로 허벅지에 피로가 몰려올 만큼 힘차게 페달을 밟아대며 바람을 가르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을 날 수는 없는데.
하지만 과거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았던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비록 영화 <E.T.>에 나왔던 것처럼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하늘을 가로지르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중력을 극복했던 적이 있다. 내가 선보였던 운전기술은 참으로 신기했는데 페달을 밟아 날아오른 게 아니고 순전히 핸들링만으로 오래도록 공중에 머무를 수가 있었다. 마치 거세게 출렁거리는 파도에 오르락내리락 앞뒤로 흔들리는 배처럼 자전거 앞부분이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내려가려고 할 때 양손으로 운전대를 위쪽으로 잡아당겨주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원리였다. 시간마저 극복한 듯 슬로비디오처럼 부드럽게 날아다녔던 기억. 땅으로부터는 줄곧 2~3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는데 그렇게 땅에서 더 멀어지지도 않고 더 가까워지지도 않은 채로 둥둥 허공을 떠다녔다. 땅을 딛고 사는 모든 인간들. 낮게나마 나는 정말로 그들 머리 위로 기분 좋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건 이렇듯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속의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고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 현실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던 그 신기했던 경험. 하지만 그와 별도로 가끔씩 의아했던 건 하늘을 나는 도구가 왜 하필 자전거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것이 비행기였다면 나는 과연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자전거를 타고 공중을 떠다니면서 느꼈던 바로 그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을까. 하늘을 날았지만 날지 않은 것 같은 기분, 하늘을 날지 않았지만 날았던 것 같은 기분. 중력을 거스를 수 없는 한 인간이 역시나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는 자전거를 타고서 땅에 고착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그 욕망의 발현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지 못하고 줄곧 2~3미터의 거리로 땅과의 연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못내 아쉬운 일일 수밖에. 역시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일까. 삶, 그 속의 욕망.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 진정 감당할 수는 있는 것인지 가끔씩 궁금해질 때가 있다.
작년 여름, 두 번째로 들인 "700C 토러스 21 하이브리드" 삼천리 자전거. 수년 전, 잽싸게 끊어버렸던 첫 번째 자전거와의 연을 뒤늦게 아쉬워하며 이번에는 기필코 오래도록 함께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구입했던 자전거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러나는 그러나! 처음 몇 번 가열하게 타보고는 며칠 전까지 베란다 한쪽 구석에 푹 묵혀두었던 자전거. 미안하다, 사랑한... 그래도 이번엔 어디에 입양 보내거나 매몰차게 팔아버리거나 하지 않고 지금껏 내 곁에 두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날이 줄어드는 근육량과 그에 발맞춰 눈에 띄게 쇠락해 가는 체력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결국 일 년 남짓 소원했던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나는, 화합의 차원에서 녀석에게 주는 선물로 빼빼 마르고 딱딱했던 기존의 안장을 떼어내고 몸집도 좀 있고 푹신푹신한 놈으로 산뜻하게 장착을 해주었다. 어쨌거나 결국 나 좋자고 한 일인데 이번에도 은근히 생색을 내면서.
오래도록 타지 않고 방치해 둔 것치고 자전거 상태는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그동안 쌓였던 무관심에 비례해 손 볼 곳이 좀 있었는데, 일단 타이어 바람이 많이 빠져 있어 공기를 주입해줘야 했고 안장을 새로 교체하면서 높이도 약간 조절했으며, 기어 변속에 따라 발생하는 소음 또한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렇듯 자전거는 자전거대로 여기저기 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나는 또 나대로 습관화되지 않은 자전거 운행으로 낯설고 어색했던 승차감을 빨리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아파트 밖 하천변 자전거 도로를 따라 주행하기에 앞서, 단지 내에서 페달을 밟으며 브레이크 제동 감각이나 핸들 각도 변경에 따른 조향감, 그리고 기어 변속에 따른 속도감을 익히는 것 등등에 친숙해져야만 했다. 과거 그 언젠가처럼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 좋은 꿈을 다시금 꿀 수 있을 정도로, 날렵하고 맵시 있는 700C 토러스 21 하이브리드에 오래도록 변치 않는 은은한 애정을 주고도 싶었다.
https://youtu.be/DIma1LDqu_0?si=0gxUdBBrvLdBfkHL
1989년에 발매된 변진섭 2집은 시중에 나온 지 두 달 만에 80만 장,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240만 장이라는 전례 없는 판매고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때 당시 TV 음악 프로그램으로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가요톱텐>에서, 앨범 타이틀곡 <너에게로 또다시>와 맨 마지막 수록곡 <희망사항>이 동시에 1위를 다투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을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노래 자체가 좋았음은 물론 그걸 받아 부르는 가수의 실력도 뛰어났기에 "발라드의 황제"라고 그를 추켜세우는 일 또한 전혀 무리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2집에 실렸던 11가지 곡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두 곡을 가장 많이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경우엔 다른 곡에 더 애정이 갔었다. <숙녀에게>. 조용하고 단정하고 말쑥한 어감을 주는 단어, 숙녀. 가사는 대체적으로 단순 담백했지만 멜로디가 입혀지고 보니 마음을 휘감아 도는 서정성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왔던 노래였었다.
어쩌면 처음 그땐 시간이 멈춘 듯이 / 미지의 나라 그곳에서 걸어온 것처럼
가을에 서둘러 온 초겨울 새벽녘에 / 반가운 눈처럼 그대는 내게로 다가왔죠
그대의 맑은 미소는 내 맘에 꼭 들지만 / 가끔씩 보이는 우울한 눈빛이 마음에 걸려요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 어쩐지 그댄 내게 말을 안 해요
허면 그대 잠든 밤 꿈속으로 찾아가 / 살며시 얘기 듣고 올래요
직업 특성상 정기적으로 전보나 전입·전출을 겪어야 했는데, 언젠가는 사무실에 새로운 직원으로 전입해 올 예정이었던 사람의 이름 때문에 대체 그가 누굴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남자일 수도 있고 또 저렇게 보면 여자일 수도 있었던 중성적인 이름의 소유자. 인사이동이 있던 날 마침내 그 궁금증은 사라졌지만, 그로부터 한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맡은 바 일을 처리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궁금증이 일었더랬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까. 나와는 서로 멀리 떨어져 배치된 자리, 게다가 코로나19 때문에 직원들 모두 사무실 내에서 마스크를 써야 했기에 업무 관련 문제가 아니라면 그 사람과 대화 한 번 나누는 게 정말로 어려웠던 시간들. 하여 내가 확인하고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사람의 대부분은 그저 눈빛을 통해서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쓸쓸이 묻어나는 그 눈빛에 왠지 마음이 쓰였던 게 그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이었다면, 미지의 나라에서 온 듯했다면, 초겨울 어느 새벽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반가운 눈처럼 자신에게 다가왔다면 이건 마치 첫눈에 반한 케이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전율이 오는 것 같은 느낌. 얼굴에 드리우는 미소야 당연히 해맑게 보이겠지만, 가끔씩 우울이 일렁이는 눈빛엔 보는 이의 마음이 덜컹이겠지. 서로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처음엔 무슨 얘기든 다 나눌 수 있을 것 같아도, 상대에게 끼칠 걱정이 염려스러워 끝내 자신의 마음속에 꾹꾹 담아두는 사연이 생기기 마련. 그럴수록 그 사연이 알고 싶은 이는 입을 꾹 닫고 있는 상대가 섭섭해, 잠든 밤 꿈속에라도 몰래 찾아가 그 마음 살며시 들춰보겠지. 토닥토닥 다독여주고는 말없이 다시 돌아오겠지.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흐르고, 굳이 업무 얘기가 아니더라도 서로 간 이런저런 화젯거리로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기존의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과도 어느 정도 친해지게 되었다. 직원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때로 박장대소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도 하고 각종 행사들에도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등 활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내 눈에 비친 그 사람은 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모습이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진득한 태도, 비슷한 또래의 다른 직원들보다 좀 더 성숙해 보였던 사고방식, 맡은 바 업무를 하자 없이 깔끔히 마무리해 내는 능력. 이 모든 것들이,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매끄럽게 형성되고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나이에 비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준에 숙녀라는 단어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다.
무더위가 꽤나 길었던 2024년 여름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지금은 가을의 초입. 겨울에 보다 더 가까워질 어느 날 새벽녘 아무도 몰래 소리 없이 내릴지 모를 첫눈을 상상하며 잠시 그 사람을 그려본다. 함께 생활한 모든 직원들 누구나 다 볼 수 있었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닌, 남몰래 혼자 비밀스레 간직하고 있을 생각과 언젠가 첫인상에서의 쓸쓸한 눈빛을 헤아리고픈 그 사람의 모습을 그려본다. 몸 건강 마음 건강을 위해 얼마 전부터 다시 찾게 된 자전거. 지금이야 틈틈이 아파트 단지 안을 도는 가벼운 시승에 그치고 있지만, 슬슬 페달에 실리는 다리의 힘이 강해지고 맞바람을 이겨내는 투지 또한 맹렬해진다면, 그 언젠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믿었던, 그러나 현실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던,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신기했던 경험을 다시금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때로는 아주 작은 일까지도 알고 싶었으나 차마 그 궁금증을 풀어내지 못했던 지난날. 이젠 자전거를 타고 달려, 아니, 자전거를 타고 날아 그 사람 잠든 밤 꿈속으로 찾아가 살며시 얘기를 듣고 싶은 마음. 숙녀는 말이 없어도 자전거는 연신 그렇게 하늘을 날아다닐지도 모르겠다. 이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