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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누 Nov 09. 2022

#05. 어질어질러진 기분으로

유나가 비누, 재하에게 | 그리고 비누와 재하로부터

#5. 어질어질러진 기분으로

안녕 비누 그리고 재하

이번 편지는 가볍게 카톡 보내듯이 써볼까 해.


이번 주는 회사 일도 너무 바빴는데

사실 회사에서 마음이 뒤흔들렸어.


금요일 퇴근할 때쯤 마음을 살펴보니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곳곳이 깨지고 다쳐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감이 안 오는 상황이고- 오는 상황이고-

좀 어질어질하고 까마득하네.


일단 어제는 퇴근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

취기로 엉망이 된 마음을 덮어뒀어.

하지만 어질러진 방에서 널브러진 옷가지와 물건들을 옷장에 쑤셔서 넣어둔다고, 그게 정리가 아니잖아?


오늘 느지막이 눈을 뜨고

잠시 외면한 내 마음 상태를 다시 보고 있다.


이곳저곳 둘러보니, 마음의 꼬락서니가 낯익어.

작년에 병원과 상담을 다니던 때가 떠올라.

내 상태를 알아챘을 때가 골드타임이라는 걸,

몸소 아파가면서 배웠잖아? ㅎㅎ


그래서 지금 팔을 걷어붙이고

마음과 기분을 정리해 보려고 해.


너희를 생각만 해도 난 강해지니까

정리 직전에 너희에게 편지를 써. 일종의 다짐처럼.

응원해줘!

주말 동안 잘 정리하고 좀 산뜻해져서 돌아올게.


비누와 재하에게 받은 사랑을 꽉 쥐고,

유나가


+)

1-2주 만에 이렇게 엉망이 된 걸 보면서

원인에 대해 두 가지 가설로 세웠어.

하나. 멘탈의 코어 부분을 정통으로 맞았다.

둘. 멘탈이 100프로 회복된 건 아니었다.

답도 찾아볼게. 아좌작!


2022. 10. 29. 오후 1:22




Re: 100년 뒤의 여러분, 아직 어지럽습니까?

언니 안녕?


나는 지금 기치조지역 근처에 있는 카페야.

커피 한 잔에 780엔(약 7,500원)이라니 무시무시한 가격이군.

그렇지만 조용하기도 하고

아침부터 많이 걸어서

쉬어 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듯해.

언니는 지금 회사일까?


어제 저녁엔 저녁이 있는 삶으로 돌아와 오코노미야키를 먹은 거겠지?

한동안 언제 연락해도 회사라던 답장에

걱정이 앞섰던 게 괜한 일은 아닌 것 같았어.

그러고 보니 언니를 알고 난 이후로 

사실 최근에 들어서야 연락이 정말 잘됐거든.

그래서 새삼 연락이 어렵던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것 보면 그 전보다는 언니 마음의 건강도

시간적 여유도 생겼던 거구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최근의 야근과 편지에 미처 다 옮기지 못했을 일들 때문에

그 건강과 여유가 사라질까 봐

계속 언니가 보고 싶었나 봐.


그렇지만 편지를 여러 번 읽어 보면서

그것마저 내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언니는 이미 생각보다 강하구나.

내가 약하고

다친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강함'이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어.


100% 멘탈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번 상처받으며 새살을 틔우고

감염으로 면역력을 얻기도 하잖아.

작년의 아픔이

올해의 언니를 진단하고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한 것처럼 말이야.

엉망인 채로 팔을 걷어붙이고

다짐의 메일을 쓰는 최유나는

그래서 눈부시다.

나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각오,

나를 구제하겠다는 선언,

그것들이 그 무엇보다 언니를 지켜 주리라 믿어.


편지를 받은 주말이 지나갔으니

지금쯤은 조금 산뜻해졌으려나.


일본에 왔으니 일본 시인 이야기를 하나 해 볼게.

다니카와 슌타로라는 일본 시인이

「100년 뒤의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어.


100년 뒤의 여러분, 

아직 참치회 김밥 따위를 드십니까?

아직 지방 전통 맥주 따위를 마십니까?

아직 시 쪼가리를 읽습니까?

100년 뒤까지 살지 않아서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 시를 나는 오늘 이렇게 바꿔 써 봐.


100년 뒤의 여러분,

아직 해외여행 따위를 가십니까?

아직 산미 있는 커피 따위를 마십니까?

아직 친구와 편지 쪼가리를 주고받습니까?

100년 뒤까지 살지 않아서

대답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100년 전에도 100년 후에도

사람들은 마음 아파하고 기뻐하고

웃고 울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또 누군가를 잃고

그런 매일매일을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 때가 있어.

약할 때는 약한 채로

마음을 돌볼 때는 전심과 전력을 다해

언니인 채로 살아 줘.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도쿄에서 사랑을 담아,

비누

2022. 11. 2. 오후 3:58




Re: 우리의 동네가 조금 더 넓어진 것뿐

유나야


오늘 낮에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는데 책장 가장 아래 칸에 꽂혀 있는 예전에 쓰던 일기장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손에 잡히는 걸 한 권 꺼내 들어 살펴보니 2017년에 쓰던 일기 같았어. 

뭐든 나만의 것으로 직접 꾸미고 만들어 쓰는 걸 좋아하던 시절이라 

일기장도 검정 줄 노트를 사서 당시 좋아하던 사진을 표지에 붙이고 2017이라고 적어두었더라구.

2017년 1월 11일 수요일에 쓰기 시작한 일기장엔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한 생각부터 

회사 워크샵을 다녀온 이야기, 카피라이터란 직업에 대한 절절한 열망과 회사를 향한 고통스러운 마음까지 

지금의 내겐 조금 낯설고 그래서 그리운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었어. 

몇 장 더 넘겨 이천십칠 년 이월 이십일 일이라 적힌 일기를 읽는데 

첫 줄부터 언제 들어도, 어디에서 읽어도 반가운 이름

'유나'가 쓰여있길래 너한테 읽어주고 싶어서 옮겨 적어봐.


부랴부랴 유나를 만났다. 여덟 시 반쯤 퇴근을 할 수 있을 것 같길래 곧장 유나에게 연락을 했다.

(체력 좋았다 참. 저 시간에 퇴근하면 실컷 놀 수 있을 우리였나 봐)

'퇴근했어?'

(대체 우린 왜 여덟 시 반에 퇴근을 했냐고 물어봤어야만 했던 걸까? 당연히 퇴근했어야 할 시간인데!!)

유나도 조금 전에 퇴근을 하고 집에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만나자고 이야기했고, 어디서 만날지 부랴부랴 정했다.

우리의 만남은 늘 이런 식이다.

이게 불편하지 않다.

미리 만날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날따라 혼자 집에 있기 싫으면, 딱히 무언갈 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홀로 있기도 싫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동네 친구처럼.

정말 우리는 동네 친구 같다.

아마 우리가 동네 친구가 되려면 우리가 사는 동네는 아주 아주 넓은 동네가 되어야 하겠지만. 

(너는 낙성대입구역에 살고 나는 이대역 근방에 살던 때인가?)


이후 일기에 적힌 내용을 보면 우린 이태원에 있는 서울 바이닐에 가서 글렌피딕 토닉을 마신 것 같아. 

저 날의 일기뿐 아니라 그 시절 여러 날 속 나는 너와 만났고, 어딘가를 갔고, 술을 마셨고, 서로를 나눴어. 

정말 매일을 만났고,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날들이었다. 

그때 나에게 유나는 내가 사는 나의 동네이자 동네 친구였어.

하루 종일 어디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든 매일 내가 결국 돌아가야만 할, 그리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나의 동네잖아.

그 동네가 너무나 따듯했고 안락했어서 나는 아무리 고단한 날을 보냈더라도 하루를 잘 덮을 수 있었고

희망으로 다음 날을 펼칠 수 있었던 것 같아. 

예전에 신형철이 희망에 대해 쓴 글이 문득 떠오르네. 

희망은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란 뜻이라는 내용이었는데.

우리의 동네에서 내가 얻어 간 희망이 그랬어. 치열했던 하루가 그래도 헛된 것은 아니란 위안.


지금 우리는 저 시절과는 달리 물리적으로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지도 자주 만나지도 못하게 되었지만.

그치만 망원 시장 가 듯 춘천에 올 수 있는 너니까. 

그리고 간만에 가는 서울도 너를 만나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지.

어딜 가든 무얼 먹든 상관없는 나니까. 

우린 여전히 동네 친구이고, 우리의 동네가 엄청 더 넓어진 것뿐이란 생각이 들어. 


유나야 

나는 항상 너의 근처에 살고 있어. 

그러니 언제든 두서없는 마음을 휘갈겨 쓰고픈 순간이 오면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거기'서 만나자.


p.s. 유나야 11월 1일에 말야. 유재하도 떠나고 김현식도 떠난 그날에. 그날이 또 왔구나 생각을 하다 문득 너랑 추위를 뚫고 한잔집에 들어서

북어 꼬리가 담긴 따뜻한 정종을 마시던 그 어느 해의 11월 1일이 생각이 났어. 그날 그 술집에서 김현식 노래가 흘러나와서 우리 둘 다 눈물을 그렁거렸는데. 

그때의 유나가 보고 싶고, 지금의 유나가 보고 싶다.


2022. 11. 6. 오후 9:53



비누, 재하, 유나 세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상한 건지 모르겠어요.


비누

최근에는 영화를 만듭니다. 여자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venukwak)


재하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라고 (@brimmingoceanofmulbineul)


유나

엉망장자 (@___l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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