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거실 불을 켜고 소파에서 잤다. TV를 보다가 잠들어버려 미처 불을 못 끈 게 아니다. 피곤해서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자고 싶은데 그럴 순 없고, 글 쓰겠다고 버티고 앉아있을 재간도 없다. 꿀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타협점을 만들었다. 불 켜고 눕기. 그러다 보면 새벽에라도 깨지 않을까 하는 기대, 나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다. 손톱만큼 남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기도 하다. 꿈에선 글의 얼개를 다 짰다. ‘글 첫머리에는 이걸 쓰고, 본론에는 핵심 메시지를 드러내고, 끝부분엔 저렇게 마무리 지어야지.’ 이런 생각을 분명히 했었는데. 당연히 글의 형체는 남아있을 리 없고 대충의 계획도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왜 누웠을까, 잠이 오면 이성적인 생각 버튼이 작동하질 않는다. 시험 전날 벼락치기조차 망한 학생처럼 나 자신을 탓해보지만 소용없다. 이미 아침은 밝았고 편히 눕지 못해 몸은 찌뿌둥하다. 일단, 빨리 샤워를 하고 밥을 안친다. 나는 슬프게도 본업이 작가가 아니라서, 글을 핑계로 아침 식사와 출근 준비를 미룰 수 없다. 하지만, 글쓰기 수업을 듣는 수강생이니 늦더라도 글을 써야 한다. 나와 글쓰기 동무에 대한 약속과 책임이다. 그렇다면, 내가 공략해야 할 시간은 한 번의 지하철과 또 한 번의 버스에서의 시간이다. 다행히 7호선 지하철 출발점 석남역에서 타니 앉아갈 수 있다. 춘의역까지 16분. 800자를 목표로 해본다. 춘의역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15분. 버스 안은 혼잡하여 집중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겨우 서 있을 정도니까. 300자 보태서 1,100자 만든 후, 틈틈이 살을 보태야지. 노안이 와서 핸드폰 글자가 잘 안 보일 때도 많지만 어쩔 수 없다. 시간에 쫓기면 어쩔 수 없이 엄지손가락을 바삐 놀려 핸드폰으로 글을 써야 한다. 그렇다고 핸드폰 글쓰기가 힘든 것만은 아니다. 나름대로 장점도 있다.
첫 번째,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글에 대한 집중도가 수직으로 상승한다. 글쓰기 예열시간 또한 짧다. 컴퓨터로 작업할 때는 전원 켜고, 메일함 한 번 확인하고, 블로그 이웃 글 훑기, 물 마시기, 커피 내리기 등. 막상 화면을 열고 타자를 두드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내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시간보다 더 길다. 핸드폰으로 쓸 때는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 창만 열면 된다. ‘70-2번 버스 잠시 후 도착’이라는 전광판을 확인하고도 엄지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출근 시간을 1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틈새 시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괜찮다. 두 번째, 아이들이 잠든 후 새벽에 글을 쓰면 글의 분위기가 무거워질 때가 있는데, 핸드폰으로 쓰면 그럴 염려가 적다. 밤에 쓴 글을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감성을 넘어서서 감상적인 흐름으로 치우친 문장이 많아 몇 줄을 지워버려야만 했다. 아침 혼잡한 출근길에 쓰자니, 감성이 흘러넘치기가 어렵다. 무거운 내 글에 불만인 나에게는 핸드폰 글쓰기가 딱인 셈이다. 세 번째, 출근 시간 풍경이 글의 글감, 소재가 되어 문장으로 바뀌기도 한다. 조용한 지하철에서 핸드폰 화면을 골똘히 보는 사람들, 버스를 기다리고 올라타는 춘의역 7번 출구 근처 버스정류장 풍경, 버스 창밖으로 느껴지는 날씨가 오늘의 문장이 되어 내 글 한쪽에 자리 잡는다. 엄지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다가 글이 떠오르지 않아서 고개를 한 번씩 들 때 툭 하고 들어오는 선물이다.
물론,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보자니 오타가 잘 보이지 않고, 한글 프로그램의 맞춤법 검사 도움받기도 어렵다. 분명, 핸드폰 글쓰기는 퇴고하기에 불편한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글쓰기 장점을 이리 나열하는 나는 오늘도 마감 시간을 어겼다. 핸드폰 글을 쓰는 자세한 상황과 장점은 글 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는 나의 허접한 변명이기도 하다. 본업이 작가는 아니지만, 글쓰기를 어떻게든 이어가고자 하는 ‘쓰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몸부림이 필요하기도 하다.
《캣콜링》 시집을 출간한 이소호 시인의 북토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글을 주로 핸드폰으로 쓴다는 시인의 말에 주변에서 "우와 MZ세대 시인은 시 달라.", "어떻게 핸드폰으로 쓰지? 그래도 글은 조용한 곳에서 컴퓨터로 써야 잘 되던데." 이렇게 들썩들썩했다. 나만 속으로 좋아하며 씩 웃는다. ‘나랑 공통점이 있잖아.’ 아, 이소호 시인은 핸드폰을 글 쓰는 용도 외에 폴더를 만들어 아이디어가 생기면 적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고 했다. 내가 폰 메모장에 가끔 쓰고 싶은 글이 있으면 한 번씩 올리는 걸, 폴더 여러 개를 만들어 분류하는 작업도 핸드폰으로 하는 셈이다. 그리고,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점은 마감일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라는 점이다. 청탁받은 원고의 계약일 2개월 전에 원고를 보내기도 한다니 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겨 핸드폰을 꺼내는 나와는 다르다. 도구의 진화라고나 할까? 나처럼 막판에 몰아치기로 글 쓰는 게 아닌 건데. 괜히 공통점이라고 좋아했다. 그래도 글쓰기 동반자가 핸드폰이라는 점이 통했으니 위안 삼아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