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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Oct 04. 2021

플라톤의 흔들리는 이데아설 <파이돈> 분석

숫자와 술어의 이데아는 사물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있다

엘리스 출생의 파이돈은 그리스의 철학자였다. 엘리스 출신인 그는 소년 시절에 전쟁에 휘말려 노예로 팔려 나갔다. 이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소크라테스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임종에 참석했고, 플라톤은 그의 대화 중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서 “파이돈”으로 명명했다. <위키피디아>

플라톤의 성숙기의 대화 <파이돈>는 위대한 걸작으로 그 주제들은 영혼의 불멸설, 인식론으로서의 기억 이론 (=상기설), 존재론으로서의 이데아론,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묘사하고 있다.


대화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철학 이야기에서 가장 적합한 모델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말은 사실 영혼의 불멸을 암시하고 있다. <변명>을 보면 그런 것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덕(德)의 본질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마침내 덕(德)의 본질을 상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덕을 이데아(idea, eidos) 혹은 형상(Form)으로 본 것이다. 덕의 형상 혹은 이데아론에 기초하여 플라톤은 형이상학의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고, 나아가 철학자-왕인 나라 곧 국가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이론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형상의 수의 확대가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했다. 국가에는 단지 가치의 형상(예: 아름다움의 형상, 선과 정의의 형상)등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파이돈>에서는 형상의 영역이 수학 및 논리적 서술어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아의 양적, 수적인 변화는 형상(이데아) 이론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수반한다.

"국가"에서는 선(善)의 형상(=이데아, eidos)은 태양에 비교될 정도로 큰 찬양을 받았다. 태양은 볼 수 있는 것들에게 볼 힘(=빛)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생성과 성장과 양육을 제공한다고 플라톤은 말했다.


"그렇다면 진리를 지식의 대상에게 주는 이 실재와 아는 자에게 아는 힘을 주는 이 실재는 선의 이데아라고 말해야 하며, 그것은 알려진 한도 내에서 지식의 원인, 그리고 진리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508e]
This reality, then, that gives their truth to the objects of knowledge and the power of knowing to the knower, you must say is the idea of good, and you must conceive it as being the cause of knowledge, and of truth in so far as known. [508e]

위에서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국가”에 나오는 이데아는 초월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특히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에 의해 지식과 진리의 근원으로 선언되었다.


이런 초월적(超越的)인 이데아의 세계 속으로 보잘 것 없는 것들, 예를 들어 1, 2와 같은 숫자들 그리고 동일성, 큼, 작음 등의 개념들이 침입해 들어온다. 이런 것들은 선의 이데아에게 주어졌던 태양의 영광을 공유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이와 같은 평범한 것의 이데아는 이 세상밖에 있지 않다. 숫자와 술어의 이데아는 사물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있다. 그것들은 내재적(內在的) 이데아이다.

플라톤이 두 종류의 이데아, 즉 초월적 이데아와 내재적 이데아를 명시적으로 구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파이돈>의 텍스트로부터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이데아의 기능을 원인으로서 규정한다.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큼 그 자체는 모두 원인으로 규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같다: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등이 수 1, 2 혹은 큼 자체보다 우월하지 않다. 모든 종류의 이데아는 평준화된다.


나는 내가 연구해 온 그 원인의 본성을 당신에게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나의 출발점으로서 그 낯익은 주제들로 되돌아가서 절대적인 미(美)(=이데아)과 절대적인 선(善), 큼 등등이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100b)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대 아테네에서 플라톤의 이론이 널리 전해졌고, 그 시대에 대중화되었으며 심지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이제 아름다움과 선의 이데아들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옹호하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서 영혼의 불멸설이 또한 입증된다. 새로운 종류의 이데아들 즉 수의 이데아, 큼의 이데아와 작음의 이데아가 이데아 왕국의 시민으로 추가되어진다. 짝수와 홀수의 이데아 역시 인정된다.


당신은 어떤 것이든 그것이 참여하는 각각의 사물들의 고유한 본질(이데아)에 참여하는 것 외에 어떤 것이든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크게 외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이중성(duality)에 참여하는 것 외에 2의 존재의 다른 원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두 가지가 되어야 하는 것들은 이중성에 참여해야 하며, 무엇이든지 간에 그 존재에 대한 다른 이유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가 되려면 단일성(unity)에 참여해야 한다.

위의 문장의 의미는 이러하다.


숫자 2도 그 존재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이 2의 이데아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수의 존재는 이데아의 왕국에 들어간다. 2는 이원성(=형상)에 참가하고, 1은 동일성에 참가한다. 즉, 2는 2의 이데아에 참가하고, 1은 1의 이데아에 참가한다.


수학적인 대상은 물리적인 대상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이데아에 참가해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면에서 두 가지를 나란히 둔다.

모든 종류의 물체는 그들만의 형상(이데아)을 가지고 있다: 형상에 대한 보편적인 교리가 생겨난다. 그는 이전에는 형상을 가치 개념들, 선과 미 그리고 정의에만 부여했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형상을 사물들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형상의 참여 이론은 그것의 또 다른 측면을 지시한다: 이제 형상은 활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참여는 모방과 비슷하다. 개별자들은 형상을 모방한다. 선의 형상은 모든 지상 사물을 초월했다; 형상은 물체에 지식과 진실을 주는 태양과 비교되었다.


그러나 <파이돈>에는 새로운 종류의 형상의 기능이 나타난다: 형상은 개별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에 따라 나타나게 한다. 형상이 개별자에게 작용을 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따르면 형상은 이제 능동인으로(efficient cause)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해결되고 체계화될 것이다. 이 문제들 외에도 비교의 형용사들 즉 "큰" 또는 "작은"은 또한 그들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 그러나 이러한 비교의 속성들은 주관적인 비교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큼이나 작음은 우리가 서로 두 가지를 비교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속성들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주관, 즉 인간의 정신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런 비교적 속성의 발생을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형상과 (비교의) 속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형상의 발생은 플라톤에 의해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형상은 운동 불가능하고, 출생, 성장, 소멸 없이 시간을 초월해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BEING)에 해당한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형상(Form)을 가지고 있다는 플라톤의 형상은, 중세에 와서는 본질(essence)로 표현된다. 

이런 비교의 형용사들 즉 크다, 작다는 대상에 붙어있지 않다. 객관적 사물은 그 자체로 크지도 작지도 않다: 두 가지 사물의 비교는 세 번째, 즉 관찰자나 측정자의 관점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그 자체로 볼 때 크지도 작지도 않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비교 표현이 그 자체로 고립되어 고려될 때 엄청난 오류가 발생한다.

소크라테스가 물었다: "이제 이에 동의한다면,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 크고, 파이돈보다 작다고 할 때 심미아스는 큼과 작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102)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심미아스라는 개체 안에 큼의 이데아와 작음의 이데아가 있다는 말이다. 


필자의 주장:  플라톤 말기의 대화라고 알려진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런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플라톤의 저술로 믿어온 대화 <파르메니데스>의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세 번째 남자 논변(The third man argument)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발명되었다. 큼, 작음의 논쟁은 제 삼인 논변과 유사성이 많다. 우리는 이미 <파이돈>에서 세 번째 남자 논쟁의 싹을 볼 수 있다. 


위에 따르면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 크고 파이돈보다 작다면 심미아스에는 큼과 작음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심미아스의 큼을 심미아스 자신과는 더욱 구별한다. 심미아스의 큼은 심미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큼의 형상에서 오는 것이다. 형상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심미아스의 작음은 심미아스라는 남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음의 형상에서 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가지 형상, 즉 큼과 작음이 심미아스라는 한 남자 속에 공존하게 된다. 


형상으로서의 큼을 인간의 속성으로서의 큼으로 대체한다면 형상 이론에서 비롯된 난관을 쉽게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돈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형상-이론을 끝까지 주장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자체에, 형상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심미아스라는 남자는 작음과 큼의 매개체 또는 단순한 수용체로 간주되어진다. 즉, 인간 심미아스의 통일성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 주장은 인위적이다.


게다가, 이미 언급했듯이, 작음과 큼은 독립적인 속성이 아니라, 두 가지를 제3의 관점으로 비교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비교되는, 대립되는 형용사가 실체화될 때, 즉 독립된 존재로 간주될 때, 대립자들은 헤겔의 “정신 현상학”과 비슷한 변증법적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비교 속성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플라톤은 두 가지 형상들 사이에 반발(밀치기)의 게임을 상정한다: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일어나야 한다 즉 작음이 그쪽으로 진격할 때, 큼은 도망치거나 또는 철수해야 한다. 그 작은 것이 가까이 올 때 큼은 이미 중지되었다." 


밀치기의 행동을 통해 대립자들의 형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한다: 큼은 크게, 작음은 작게 남아있다. 한 형상이 다른 형상과 충돌하는 경우는 없다. 소크라테스, 심미아스, 파이돈 이 3인 키를 재는 경우 파이돈이 가장 키가 크고 심미아스가 중간 키, 소크라테스가 가장 작다. 파이돈은 큼 자체만 있고 소크라테스는 작음 자체만 있지만 심미아스는 큼과 작음 둘 다 가지고 있다.


심미아스 안에서 큼과 작음이 투쟁에 임하게 되고, 심미아스가 키가 소크라테스를 능가할 때 큼의 형상은 작음의 형상을 밀어내게 된다. 반대로 심미아스가 파이돈(Phaido)과 함께 키를 재면 작음의 형상이 큼의 형상을 배척하게 된다.

  

그렇다면 심미아스는 두 사람 사이에 있을 때, 그는 작고 또 크다고 말해진다. 
( · · ·)
나는 생각한다. 큼 그 자체는 결코 커지거나 작아질 수 없다. 우리 안의 큼도 결코 작은 것을 인정하거나 그 자신이 압도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102d) 

실재하는 것에는 아무런 변화와 생성이 없다. 형상이 실재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교리를 그대로 따른다. 플라톤의 주장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체와 속성의 구별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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