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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Sep 18. 2023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역사

철학의 항해 91회 방송

철학의 항해 91회 방송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역사


1장. 형이상학과 존재론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철학에서도 어려운 분야가 형이상학과 존재론 과목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형이상학은 인간의 삶과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는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대해서 오해가 많은 데 여기서 제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즉 형이상학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직결되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쇼펜하우어가 한 말로써 인간은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알고 또 이를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즉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타인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또 죽은 자들을 그리워합니다. 저의 경우는 돌아가신 어머니나 일찍 죽은 친구가 보고 싶습니다.  


보통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영원한 생명을 꿈꿉니다. 필자는 이를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현상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죽음의 본질은  무(無)라는 것입니다. 없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반면 삶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있음, 즉 유(有)입니다.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는 있음과 없음 혹은 유와 무의 문제로 치환됩니다.

이처럼 삶과 죽음, 유와 무에 대한 관심이 바로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주제입니다.


2장. 인생무상(人生無常), 색즉시공(色卽是空), 일체 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위에서 말한 생명과 죽음 혹은 유와 무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형이상학적 표현들을 조금 더 알아봅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무상(人生無常) 혹은 일장춘몽(一場春夢) 혹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들 역시 형이상학적인 표현들입니다. 인생무상은 즉 인생에서 남는 것이 없다는 한탄의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 불변적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불교적인 사상입니다. 색 즉 보이는 것이 공허하다 혹은 헛되다 는 뜻입니다.

이는 완전히 형이상학적인 표현입니다. 모든 존재가 헛되다 는 것이고 그래서

일체 유심소조 (一切唯心所造) 라는 위대한 철학적인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입니다. 단 소극적인 혹은 부정적인 형이상학입니다. 뒤에 오는 긍정적인 서양의 형이상학과는 대조가 됩니다. 일체유심소조,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는 사상은 주관적인 형이상학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관념론이라고도 합니다.


3장.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적 범주는     존재와 무 이다.


서양의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출발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라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형이상학 즉 있음과 없음 혹은 유와 무, 혹은 존재와 무를 주제화한 철학자입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죽음, 즉 유에서 무로 바뀌는 것을 싫어 합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에서 무로 바뀔 수가 없다고 합니다. 유에서 무로 바뀌는 것을 생성, 변화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생성과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탄생이나 죽음을 부정합니다, 즉 이런 현상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이다, 혹은 환상이다 라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불교의 색즉시공과 같은 논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합니다.


그 논리는 있음은 있고 없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무(無)가 없다는 생각은 현상계를 부정합니다. 이 뿐 아니라 있음은 있다는 동어반복적인 생각은 있음은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동어반복이란 같은 말을 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에이는 에이이다 (A는A)와 같은 문장을 말합니다.


즉 있음이 없음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즉 유가 무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있음은 영원히 있다 또 없음은 영원히 없습니다. 유에서 무로 바뀌고 무에서 유로 바뀌는 현상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상은 있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유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존재-사유 동일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오류이며 참다운 세계는 오직 이성적으로 파악된다는 서양의 주지주의 전통을 낳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그의 철학시 “자연에 관하여”에서 생성은 소멸되고 소멸은 사라졌다 라고 선포합니다.

Thus is becoming  extinguished  and  passing  away  not  to  be  heard

of.



4장.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범주 : 보편과 개별


플라톤 역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존재는 불변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수용합니다. 단 그 불변적인 존재를 플라톤은 이데아 라고 했습니다. 이데아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유로만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와 달리 플라톤은 이데아가 감각이나 물질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가령 착한 사람은 그 안에 착함의 이데아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착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가 부정한 현상계에 다시 긍정될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그의 “파이돈” 대화에서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자체 즉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의해서 아름답게 된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영육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의 핵심적인 범주는 보편자 the universal와 개별자 the individual의 대립입니다. 보편자는 이데아와 같고 개별자는 물질이나 감각적인 존재와 같습니다.

또한 그는 이데아 세계의 지식을 가진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비로소 고통의 종식이 있다고 합니다. 철인왕 사상입니다. 또 그는  이데아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동굴 속의 죄수와 같다고 합니다. 참다운 존재인 이데아는 마치 태양에 비친 것과 같다고 합니다. 동굴 속의 죄수들은 이데아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고 합니다.


5장. 아리스토텔레스 : 실체와 속성. 가능태와 현실태. 논리학의 정초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설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세상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의 이데아도 있지만 더러운 것의 이데아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데아설의 다른 문제는 소위 제3의 인간 논변이라고 합니다.

가령 큼의 이데아와 큰 사물이 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이데아와 사물은 둘 다 크다는 공통점이 있고 따라서 이들을 묶어줄 또 하나의 이데아가 있어야 합니다. 즉 이데아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그는 실체와 속성이라는 새로운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범주를 고안합니다. 실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은 실체에 붙어 있는 것 즉 의존적 존재입니다. 그 다음 중요한 범주는 가능태과 현실태라는 개념쌍입니다.

가령 씨앗은 가능성태고 꽃은 현실태입니다. 그는 가능성과 현실성이란 범주로 만물의 발전과 변화를 설명합니다.

그 밖에도 그는 파르메니데스가 부정한 무의 개념을 다시 긍정합니다. 무가 없으면 진리와 거짓이 구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거나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이고 반대로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이다 라고 하여 논리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즉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6장. 아비첸나. 토마스 아퀴나스.  실존과 본질


이들은 중세의 철학자들입니다. 아비첸나는 아랍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형이상학”을 40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비첸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한 가지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본질이라고도 했습니다. 실체는 본질, 보편자, 유 그리고 기체 등에 적용된다는 구절이 “형이상학”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essence)을 과거부터 있어 온 어떤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본질은 희랍어로 to ti en einai 인데 이를 영어로는 the what it was to be 등으로 번역합니다. 사물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것이고 달리 말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산수의 기본 법칙 즉 1+1= 2 같은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첸나는 이런 가능 존재와 대비되는 현실존재를 상정하고 이를 실존이라고 했습니다. 가령 상상이나 기억에서 보는 엄마와 그 엄마가 지금 눈 앞에 나타날 때의 차이입니다. 혹은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엄청난 훈련을 하는 운동 선수가 실제로 금메달을 따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본질과 실존의 차이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보면 본질이란 창조 이전에 신의 머리 속에 있는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신은 창조 전부터 구원받을 자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아퀴나스는 창조 신학을 실존과 본질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즉

창조를 통해서 이런 본질이 현실화된다는 것입니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실존과 본질을 현실태와 가능태 라고도 합니다. act & potency.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비첸나의 본질과 실존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사물은 실존과 본질의 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피조물, 유한자들은 실존과 본질의 우연적인 결합이고 그 반면 신은 실존과 본질이 일치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서 토마스 이퀴나스는 스콜라 철학을 완성합니다. 그는 사물은 실존을 가지나 신은 실존 자체이다 라고 합니다.


7장. 데카르트 – 주관주의 형이상학의 시조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은 객관적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근대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하여 근대 주관주의 철학의 물꼬를 텄습니다. 즉 사유하는 자아가 철학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세상의 존재 증명을 위해 신 개념을 이용합니다. 신의 성실성 때문에 세상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장. 루소 –  사고의 범주로 감각을 정리한다.


루소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개념을 철학의 출발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을 통해서 세상을 믿는다는 데카르트의 사상 대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경험을 내가 결합한다는 새로운 사상을 수립합니다. 이것이 근대 주관적인 형이상학의 토대가 됩니다.

예를 들어 강가의 경치를 본다고 합시다. 강과 나무가 보입니다. 두 개의 다른 대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름 이라는 관념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혹은 우리가 A와 B는 같다 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음과 다름이라는 관념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감각을 비교하고 결합하는 능력이 나에게 즉 나의 이성 안에 있다고 합니다.


나의 감각들을 한데 모아 비교하는 이 마음의 힘은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다. 주의력, 성찰, 반성, 또는 여러분이 무엇을 원하든 간에, 여전히 그것은 사물 안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물들로부터  인상을 받을 때만 그것을 생산한다.


9장. 임마뉴엘 칸트.  주관과 객관의 형이상학


칸트는 루소의 통찰을 받아들여 근대 관념론을 정초합니다. 그의 철학은 존재론이라기 보다는 인식론입니다. 그러나 그는 근대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물꼬를 틀어 주었습니다. 그는 루소의 결합하는 자아를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루소의 결합하는 자아 혹은 비교하는 자아의 개념을 칸트는 “선험적 통각”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결국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아와도 같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모든 표상과 생각에는 선험적 통각이 깔려 있다고 합니다. 이를 그는 “모든 표상에 수반하는 아이 싱크 (I Think)” 라고 합니다. 가령 너는 예쁘다 라고 말할 때에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는 언어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주요한 공적은 논리학의 12범주를 선험적 통각의 기능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즉 성질, 분량, 관계, 양상 등의 개념이 모두 선천적 통각이 가진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루소와 거의 똑같이 의식 즉 통각이 다양한 외부적인 경험을 종합적으로 통일한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칸트의 업적은 무엇 보다도 주관과 객관 이란 형이상학적인 대립항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장. 피히테.  자아와 비아의 변증법


피히테의 업적은 바로 칸트가 못다한 작업을 수행한 것입니다. 즉 선험적 통각 혹은 의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12 가지 오성의 범주를 도출해 내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칸트가 전제한 것을 피히테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피히테는 논리학의 근본 법칙인 모순율을 넘어서는 난제에 빠집니다. 가령 실재성(긍정성)에서 부정성으로 가는 과정이 선명하지가 않습니다.

그는 이를 내가 아닌 것 즉 그의 용어로 비아(非我)가 자아에 대립한 것으로 풀이합니다. 피히테 철학의 3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Ⅰ. 자아는 근원적이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Ⅱ.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전적으로 반정립된다.

Ⅲ. 나는 내 속에, 가분적 자아에 대립해서 가분적 비아를 정립한다.


다시 말해서 자아(自我)에서 비아(非我)가 나와야 합니다. 비아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를 다시 자아의 작용으로 설명을 해야 합니다.


11장 헤겔 근대 주관적 형이상학의 완성


헤겔의 작업은 방대하지만 위의 피히테와의 관점에서 한 가지만 생각해 봅니다. 결국 모순율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즉 변증법입니다. 선험적 통각 내지 사유하는 자아가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운동하는 주체를 그는 절대자라고 합니다. 그는 모순이야 말로 생명과 존재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헤겔은 그의 주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은 스스로 자신의 타자가 되는 운동이며 동시에 이런 타자성을 지양하는 운동이다” 라고 썼습니다.


즉 A에서 not A로 이행하는 과정이 바로 주체라는 것입니다. 가령 헤겔의 주저인 논리학 1장의 경우 존재에서 무로 이행합니다. 그는 순수존재(純粹存在)는 순수무(純粹無)와 같다 라고 하면서 변증법적인 논리를 수행합니다. 그 이유는 순수한 존재는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에 순수한 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유와 존재 혹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 일어납니다. 즉 사유의 운동이 세계의 운동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란 것도 사유로 구성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세계란 경험적인 세계가 아니라 학문적인 세계 혹은 철학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모순율 위반의 문제점


헤겔이 그의 철학을 모순 개념 위에 세우기는 했으나 평소 생활에서 이를 함부로 위반하면 안 됩니다. 이는 고도로 추상적인 범주들의 연관성 문제에 한하여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 철학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을 기초 존재론이라고 합니다. 그는 그만큼 존재와 무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존재론과 형이상학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학문은 존재 일반에 관한 진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학은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말하고 있기에 이는  결국 인간학이나 윤리학 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론은 어느 특수한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일반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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