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허무'와 '공허' 속 무한한 가능성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by 달달보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극장에서 본 2022년. 2시간 1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영화에 푹 빠져 몸이 앞으로 기울고, 목은 더 거북이가 되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에블린이라는 중년 이민 여성이 세무감사 중 멀티버스라는 우주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그녀는 그 세계를 넘나들며 무수히 많은 자아들과 마주하고, 현실에서 갈등을 빚었던 딸과 깊이 공감하며 얽혔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간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수많은 에블린과 딸 조부 투바키의 화려한 이미지가 겹겹이 쌓여 있기에, 그 겹들을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는 쾌감이 무척 생경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오프닝 15분이 가장 중요하다. 관객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그중에서도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까지의 오프닝 시퀀스는 대부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어와 영어가 뒤섞여 난무하는 빨래방. 그곳을 운영하는 주인공들의 정신없는 풍경 뒤로, 타이틀과 함께 울리는 음악이 터져 나온다. 어찌나 큰 음악인지, 세상 모든 장르를 합친 것 같았다. 길게 이어지는 자막과 함께 수많은 음표들이 직선으로 내 고막에 꽂히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무척 강렬했다.




정신없는 오프닝 시퀀스는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로 살며 이중언어를 쓰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별로 웃긴 장면도 아닌데 웃음이 터져버린다. 딸은 레즈비언으로 여자친구를 소개하지만 정상규범에 시달린 아시아 여성 에블린은 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쉴 새 없이 딸에게 잔소리를 날리던 에블린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요리를 하는 전업주부로, 남편과 대화하는 아내로, 아버님을 모시는 딸로,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사장으로 끝없이 변주된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서 '더럽게 정신없네' 하다가도, '어 뭐지, 왜 이렇게 낯익지?' 싶은 뜨끔함에 목구멍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에블린은 또 다른 멀티버스인 알파버스에서 온 남편 웨이먼드로부터, 자신이 이 세계를 구원할 사람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라니! 내가 뭐라고?’ 평범한 워킹맘인 자신에게 맡겨진 이 엄청난 임무에 에블린은 당황하고 부담을 느낀다. 유연하게 모든 일을 해내지만, 정작 자신의 능력은 과소평가하며 안전지대에 머무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하필 나냐는 질문에, 알파 웨이먼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모든 유니버스를 통틀어 가장 성장하지 않은 평범한 에블린이다. 그래서 가능성이 많다.” 그 말이 어찌나 마음에 콕 박히던지. 억까와 칭찬이 동시에 섞인 모순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어설픈 나를 한없이 위로했다. 그래, 나도 유니버스 중 가장 덜 성장한 달달보름이라면! 성장할 수 있다니 럭키비키쟈나…(눈물)




그런 에블린의 딸은 엄마보다 한 수 위다. 여러 멀티버스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고, 그것을 마스터한 끝에 ‘조부 투바키’라는 이름의 토털 유니버스를 위협하는 최종 빌런이 된다. 모든 이치를 깨닫자 결국 다 허무하다는 결론에 이른 조부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휘휘 돌아가는 검은 베이글을 만든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베이글 앞에서 조부는 자신처럼 멀티유니버스를 경험한 에블린을 유혹한다. “해 보니 알겠지? 어차피 다 의미 없으니 함께 가자” 쉬지 않고 회오리처럼 돌아가는 그 베이글의 중심점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흔들렸다. 세상에 저런 게 정말 있다면, 고통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그 선택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마음도 에블린처럼 지금 흔들리고 있네. 베이글 앞에서.




그렇다. 그 모습은 나였다. 쉴 틈 없이 살아가고 끝없이 변하는 에블린과 조부의 모습은 내 거울이었다. 내 모습을 그대로 풍자하고 있으니 웃기면서도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 들 수밖에. 2022년 당시 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프리랜서 강사이자, 작가이자, 팟캐스터이자, 대학원생으로 시시때때로 역할을 바꿔가며 살고 있었다. 다이어리는 코로나 확진자 동선처럼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투두리스트로 꽉 채워져 있었고, 체크 박스는 O와 X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사는 일이 마치 나를 증명하는 것 같아서, 나는 끝없이 SNS에 나를 전시하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먹고살고 있었다.


'강사님 진짜 대단하시다.'

'어떻게 그걸 다 해요?'


칭찬들을 연로 삼아 나는 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책상에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SNS에 업로드하던 책과 영화들 대신 술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쌓여가는 술병만큼 자기비판과 혐오의 구멍은 더 커져만 갔다. 그 허무함을 애써 매우기 위해 나는 더 나를 전시했다. 또 들려오는 칭찬으로 구멍을 막는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없었다. 쉼 없이 반복되는 정체성과 바쁜 일분일초의 속도로 술독에 스스로를 밀어 넣으면서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브레이크도 없이 마치 끝없이 돌아가는 베이글의 회오리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어둠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마음속의 조부는 나를 향해 속삭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해, 그렇게 산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삶의 무상함과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신'과 '절대적인 진리’들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했던 말로 알려져 있다. 조부 투바키나 에블린처럼 무한한 멀티버스를 다 경험하고 온다면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같은 기분 아닐까? 니체 허무주의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극단적 절망감이다. 조부와 에블린이 베이글로 진입하기 직전까지 느꼈던 허무함, 내가 술독에 빠져 나를 잃어가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감정과 같은 공허함이다.


만약 여기서 영화가 끝난다면 이 영화는 비극이다. 허무주의를 산만함과 코믹스러움으로 포장한 영화인 만큼 영화가 비극이었다면 이렇게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리한 감독들(다니엘즈)은 이 지점을 마지막 짧은 시퀀스로 한 번에 풀어버린다. 뱅뱅 꼬여버린 줄의 트리거를 찾아 가볍게 해결해 버린 느낌이랄까? 놀랍게도 그 극단적이고 절망스러운 허무함을 채워주는 것은 '다정함'이었다. 그것은 에블린에게는 너무나 무능력하고 별 볼일 없었던 남편 웨이먼드의 말 한마디였다.


"내가 아는 유일한 건, 우리가 친절해야 한다는 거야. 상대방한테 친절하게 대해.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때는 더."


시종일관 무능력하게 앉아서 카메라 분량조차 알파버스인 다른 차원의 웨이먼드에게 다 뺏겨버린 진짜 현실의 웨이먼드. 그는 어떤 목적도 어떤 의도도 없이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혼란함에 빠져 다 같이 베이글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니체가 말한 두 번째 허무주의는 이것이다. 의미 없는 허무 속에 의미를 찾아가는 것. 감독 다니엘즈들이 전달했던 이 영화의 의미, 삶의 의미는 다정함, 친절함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베이글은 딱 반전의 이미지로, 주변 사람을 살피는 다정한 눈동자로 변한다. 마치 니체의 허무주의의 수동적인 모습이 능동적인 허무주의로 반전될 때처럼 말이다.


영화 스틸컷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스틸 이미지



나는 이 영화가 너무 좋았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극장에서 세 번을 본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음 해 2023년에 술을 완전히 끊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은 나를 먼저 돌보았다. 나에게 친절함과 다정함을 베풀며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껴안았다. 스스로부터 형성된 다정함을 주변으로 옮기다 보니, 이 책을 기획하는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허무주의에 빠져 삶을 중단하려 했던 가족을 구한 웨이먼드의 한 마디처럼 영화 속에서 건진 장면과 그 장면으로 돌아보는 감정이 여러분을 구할 거라 믿는다. 그것이 이 책이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다정함이자 여러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최고의 친절함이다.



오늘부터 20편의 영화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을 함께 하려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도화지 같은 삶 속에 스케치를 더 해가며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그 길잡이를 함께 할 내면 트래킹을 천천히 곱씹으며 동행한다면, 우리 모두의 다정함이 또 들불처럼 주변으로 퍼질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를 살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세요.


1. 오늘 당신이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고, 가장 많이 소진시킨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2. 그 역할이 없어진다면, 나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피곤함? 안도? 허무? 공허? 혹은 기쁨이나 해방감?)


3.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느끼고 있는 가장 작은 다정함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