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껴안는 방법
육 개월 만에 제주 여행을 떠난다. 처음 비행기를 타는 두 꼬마들은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하는 초등학생들이라 신이 나 보인다. 문제는 그 옆에 있는 갓난쟁이였다. 이륙 후 귀가 아픈 건지, 낯 선 건지, 무서운 건지 깨앵 깨앵 울기 시작했다. 노이즈 캔슬링을 뚫고 넘어오는 소리에 고양이가 함께 탔나 싶었다. 띵- 하는 벨트 사인이 꺼지자 울음소리도 점차 잦아든다. 짧은 제주 비행은 이 시간이 쏜쌀같이 지나간다. 30분 뒤 또 착륙. 그리고 또 들려오는 울음소리. 이건 아기다. 토닥토닥 하는 아기엄마로 추정되는 양육자의 등 두드리는 소리가 소리만 듣는데도 긴박하게 느껴진다. 혹여나 같이 탄 승객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달래는 손짓의 소리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는 계속해서 깨앵깨앵 고양이처럼 울고 있었다.
세상과 만나는 아기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울음으로 인사한다. 울음으로 짜증, 무서움, 배고픔, 불쾌함을 표현한다. 놀랍게도 양육자는 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구별하는 미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를테면 깨앵은 아파요, 응애는 배고파요, 우우웅은 불쾌해요 등등 말도 안 되지만 그 미묘한 울음소리에서 하고픈 말이 다름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눈물이란, 인간에게 최초로 부여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통로이자 언어가 아닐까? 아기는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울고 싶으면 울고 표현하고 싶으면 표현한다. 그렇게 살아야 자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듯이.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궁금증이 여기에 있다. 왜 슬픔 이가 아니라 기쁨이가 먼저 나왔을까? 아마도 아기의 천진난만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영화적 설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감정을 리드하는 자리에 있으려면 가장 먼저 태어나는 위계가 있어야 할지도 몰랐을 테니.
자궁밖으로 꺼내지는 아기가 가장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 불안, 고통에 가깝다고 한다. 편안한 양수에서 탯줄이 끊긴 채 코로 호흡해야 하는 불편함. 좁은 산도를 뚫고 온 힘을 다해 나와야 하는 고통, 자신을 감싸던 양수 속이 아닌 손 발이 허공에 휘저어지는 익숙하지 않은 공포. 이 모든 감정을 폭발시키는 ‘응애’의 소리에 의료진은 “건강합니다”라는 말로 가족들을 안심시킨다. 태어난 아기가 울지 않고 웃는다면(사실상 아기가 웃는 것은 불가능하다) 울 때까지 궁둥이팡팡을 당할지도 모르는 게 현실이다. 아마도 영화는 이 위대한 아기의 탄생의 여정은 생략하고 아기가 주체적으로 인지할 때부터를 영화의 시작점으로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위의 내용이 오프닝 시퀀스라면 어땠을까라는 괜한 상상도 해본다.
기쁨이(조이)는 영화 속 주인공 라일리의 머리(혹은 마음)의 리더이다. 다른 다섯 개의 감정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반장. 행동명령을 내리는 계기판 센터에 누가 앉았는지에 따라 리더가 누구인지 은유된다. 마치 걸그룹 센터 같은 대형이다. 라일리의 아빠는 버럭이, 엄마는 슬픔 이가 나머지를 리드한다. 기쁨이, 버럭이, 슬픔이, 소심이와 까칠이까지 다섯 개의 감정은 제 각각 상황에 따라 계기판을 조정하는 센터로 자리이동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진짜 센터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기쁨이는 라일리의 쾌활한 성격과 행복한 관계를 만든 것이 자신의 헌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때로는 그 고귀한 희생정신은 오만함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의도랑 다르게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슬픔이의 방해네 기쁨이는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슬픔이의 이유 없는 나댐으로 라일리가 슬퍼하자 기쁨이는 슬픔이 근처에 결계를 치며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재밌게도 그 모습을 보고 많은 관객들이 기쁨이더러 ‘조이코패스’(조이와 사이코패스의 합성어)라며 함께 분개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생각난다. 내 안에 있는 감정들이 의인화가 되었을 때, 슬픔이라는 감정 하나를 다른 감정이 억누를 때 그 모습이 언짢았던 사람들은 알았을지 모른다. 무엇인가 억지로 옥죄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것인지를. 그런데 그게 내 감정이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기쁨만을 만끽하고 사는 것이 힘듦을 잊는 주문이자 자기 최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그때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이 저게 미쳤나?’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도의 결은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했으니까.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복직을 하며 느낀 사회생활은 야생이었다. 나는 우리에 갇혔다 이제 막 탈출한 원숭이였고, 주변엔 수 없이 빠른 토끼, 하이에나, 치타, 호랑이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거나 피하거나 남의 것을 탐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거나, 도망치지 않으면 따라 잡히는 그야말로 살벌한 그곳에서 나도 슬슬 적응을 해야만 했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앞으로의 길을 하나씩 탐색해도 모자랄 판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허황된 그린라이트를 향해 전력질주를 했다. 그 속도는 스릴 있고 즐겁다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계속해서 달리던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휴대폰에는 타임스탬프로 찍힌 인증 기록 밖에 남지 않았고, 하늘을 언제 올려다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커피의 맛은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각성을 위해서 들이키는 약으로만 사용했고, 놀아달라는 아이들의 부탁은 보챔으로 느껴져 짜증이 났다. 영화처럼 조이가 조이코패스가 되어 나를 닦달하고 있음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의 기쁨이가 조이코패스가 되었구나.
다른 감정들을 철저하게 누르며 살던 과보는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쏟아졌다. 쾌락은 즐거운 것이라며 고통을 잊던 술, 담배, 도피성 여행, 시끄러운 음악, 넷플릭스 등의 일회성 도파민들이 밑 빠진 감정의 독을 얇디얇은 그물망으로 메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퍽- 하고 깨져버린 독은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이라는 심각한 질병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인생을 좀 더 즐겁게 채우고 싶다고 했던 얕은 쾌락으로 다른 감정이 어떻게 가려져 왔었는지. 철학책, 심리상담, 정신과 약, 요가, 명상, 종교..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는 내면을 위한 방법으로 나는 깨진 마음의 독을 다시 정성스레 빚어나갔다. 무엇인지 모른 채,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일단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로 한 것이다.
라일리의 무의식 속 유아기 친구 빙봉은 라일리가 자신을 잊었다는 사실에 서럽게 사탕 눈물을 흘린다. 빙봉에게 특유의 화법 “럭키비키“로 위안을 해 봤자 사탕 눈물을 멈추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빙봉을 위로한 건 그저 말없이 들어주고 함께 공감해 준 슬픔이의 따뜻한 손이었다. 덜컥 눈물을 삼키고 해야 할 일을 준비하는 빙봉과 슬픔이를 보고 기쁨이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런 슬픔이의 위로와 함께 하던 기쁨이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 행복한 미래를 위한 조언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그저 바라보고 함께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비록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 더하도 그저 슬픔을 슬픈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기쁨이에게 지배당한 지난 35년 이상의 업보 때문인지 나는 여전히 내 슬픔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슬픔이 올라올 땐 ‘그것 역시 지나가는 감정이구나‘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울었던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명상을 깊게 하던 어느 날 이유 없이 눈물이 터진 날도 있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글을 써 내려가다 엉엉 울기도 했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며 감정 표현이 무딘 영이 규호에게 이별을 고할 때에도, 간밤에 꾼 꿈을 떠올리며 일기를 쓰다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은 인지하지만 왜 울었는지 묻는다면 여전히 모르겠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모르지만 이제 나는 안다. 모르겠어도 눈치 보지 않고 울 수 있는 용기, 아기처럼 슬픔을 표현하는 자유로움이 치유의 시작이라는 것을. 거부 없이 그것들을 온전히 껴안을 때 그다음 감정들도 차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기쁨이와 슬픔이는 얼떨결에 유배길을 떠난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는 여정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기쁨이는 자신의 기억이 왜 슬픔으로 바뀌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슬픈 기분을 적극적으로 느끼고 울었을 때 해소되며 다시 기쁨이 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은 상반된 감정이지만 사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기쁨과 슬픔. 이 사이에서도 자유롭게 그러나 지혜롭게 파도를 타야 편안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 마음속 감정의 집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바람처럼 드나든다. 그 아이들 하나하나를 다 살펴보진 못하지만 감정의 문을 열어두며 자연스러운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슬픔이의 자리가 이제는 양지로 옮겨졌다. 오래도록 감정컨트롤 계기판 가운데에 자리 잡았던 기쁨이는 최근엔 새로운 친구 편안이에게 자리를 내어 준 듯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일시적이라는 사실과 변할 것이라는 진리도 알기에, 언제든지 녀석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핵심자리를 양보할 수 있을 정도의 유연함을 챙기려 노력하고 있다. 더 이상 감정들이 그늘로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의 감정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질문
1. 오늘 하루 내가 느낀 기쁨과 슬픔은 무엇인가요?
2. 최근 가장 행복했던 경험, 화가 났던 경험의 이유를 떠올려 보세요.
3. 슬픔을 충분히 느낀 뒤 추억이 된 이야기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