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된 자아 추구로 인한 분열과 균열
불안한 아름다움으로 마지막 백조 연기를 하는 <블랙 스완>의 피날레 10분은,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잊지 못할 장면일 것이다. 니나의 서사에 몰입한 관객들은 니나가 밟고 서 있는 균열의 틈새를 함께 떠안아야 했으니까. 이 영화는 그만큼 이상한 영화다. 완벽과 불안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고 가는지 아름답게 보여주는 영화. 대런 애러노프스키감독의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블랙 스완>은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면서 동시에 극강의 호불호를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미장센의 미학과 스피디한 화면 전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력 등이 이 영화의 ‘호’ 포인트라면, 반대로 심리적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감정의 섬세함이 관객들에게 트리거가 되어 자극하기 때문에 ‘불호’ 포인트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흑조의 연기를 하는 니나의 피부에서 닭살이 올라올 때, 넓게 벌린 두 팔이 흑색의 깃털로 감쌀 때의 그 시퀀스는 정말이지 보는 나의 온몸에도 똑같은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진짜 몰입했을 때의 아티스트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사실 니나가 보여준 마지막 무대의 모습은 완벽한 예술이자 동시에 집착과 욕망의 그 자체였다. 날아오르는 듯한 몸짓과 아름다운 춤선에 눈을 빼앗기는 동시에 기분 나쁜 찝찝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니나의 무대는 자유로움이 아닌 강박에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애매한 경계 위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니 당연히 관객은 혼란스러우면서 동시에 미학과 공포를 함께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점에서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특징이 오롯이 드러난다.
순수한 백조, 관능적인 흑조라는 두 캐릭터를 모두 소화해야 하는 니나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동안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키운 어머니로부터 받은 통제는 니나를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니나의 패션, 인테리어, 취향 모든 것은 어머니의 스타일로 꾸며지고 심지어 자신의 성적 욕망까지도 다 억누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니나의 서사는 내재된 완벽주의가 어떻게 자아 분열까지 이르게 만드는지 설명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 니나에게 연민이 느껴진 이유는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가 기대하는 역할에 부응하며 나만의 인생 무대에서 완벽한 ‘백조’라는 연기를 하며 살기 때문 아닐까.
10년 동안 강사로 일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 약속을 잘 지킬 것, 신뢰 가는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것. 좋은 강의 평가로 다음 교육으로 이어지게 만들 것 등등. 니나처럼 순수 예술을 하는 아티스트는 아니지만 무대라면 무대 위에 오르는 강사라는 직업은 사실 니나의 ‘백조’ 연기와 다른 것이 없었다. 물집으로 발가락이 부르트고 무지외반증으로 통증이 있어도 구두는 벗을 수 없었고, 출산 후에도 정장을 입어야 했기에 다이어트를 했어야만 했다. 타투를 너무 하고 싶은데 보이는 곳에 하면 신뢰가 떨어질까 두려워 소매 안쪽에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새기며 꽁꽁 감췄고,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다던 탈색은 강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과보로 10년 넘게 해보지 못하고 있다. 니나는 자신을 보러 와준 관객들을 만족시킬만한 연기를 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그동안 지켜 온 강사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교육 내용이라는 알맹이는 고사하고 일차적으로 전달되는 신뢰감이라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여전히 백조처럼 떠 있어야 한다.
아마 이런 모습이 나를 더 압박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술과 담배와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쾌락주의자인데.. 할 수만 있다면 보이는 곳에 타투를 새기고 회색 머리로 탈색을 하며 옥토버페스트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길바닥에 널브러지고 싶은데.. 그런 욕망들이 꿈틀대며 비집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아이를 낳고 ‘엄마’로서 규범 되는 정체성은 더욱 나를 압박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탈은 아기 엄마의 이미지와는 더욱 반대되는 행동이었기에, 내가 감히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졌다. 엄마의 역할은 보이는 에티튜드를 제한하는 것 이상이었다. 청소, 빨래, 냉장고 정리, 아이들을 위한 요리, 교육과 말투 모든 것들이 자기 검열을 엄격하게 하는 기준이 되었다. 지쳐도 지치지 않은 척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가 행복하니까.’하는 거짓된 긍정 확언으로 계속해서 내 안의 흑조를 억누르며 백조 연기를 이어갔다.
니나는 흑조연기를 자유롭게 해 내며 틀에 박혀 살지 않는 ‘릴리’를 동경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는 릴리의 이미지는 니나가 완벽에 가닿고 싶어 하는 욕망에 기름을 부어 백조와 상반된 흑조라는 또 다른 자아가 된다.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빠져 완벽한 워킹맘을 어설프게 흉내 낸 나에게도 릴리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손을 내밀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친 밤 10시 30분, 사무실에 앉아할 일들을 정리하며 마셨던 맥주 한 캔은 하루 끝 나에게 주는 해방감이자 선물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넘기는 맥주의 탄산은 온몸으로 퍼져가며 오늘 하루 고생했다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가 놀 수 없는 나는 가엽게도 그렇게 사무실에 틀어 박혀 술로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살짝 알딸딸해진 기분은 하루 종일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나에게 허락된 작은 일탈이었으니까. 맥주 캔은 나중에 술병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나와 사무실 앞에 있는 민속주점으로 가 혼자 술을 마시는 시간도 점차 늘어갔다. 나에게 허락된 해방감. 그 유혹에 빠지자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내 안에서 자라난 릴리에게 잡아 먹히고 있었다.
니나는 릴리와 몸싸움을 하다 유리 조각으로 릴리를 죽인다. 흑조는 자신의 것이라고, 절대 빼앗길 수 없다며. 모든 것이 망상이었음을 깨달은 니나는 스스로를 해친 것을 깨닫게 되지만, 완벽한 무대를 위해 다시 한번 무대 위로 오른다. 하얀 발레복 위로 감출 수 없이 새어 나오는 붉은 핏빛을 참고 견디며 무대를 마친 니나는 온몸에 번진 피를 바라보며 쓰러진다. 그 와중에도 니나는 말한다
“완벽한 무대였어요.”
욕망과 완벽주의로 자기 자신을 잡아먹고 나서도 결과만으로 안도감을 비추는 니나의 모습. 이 영화가 가장 공포스러운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피를 흘리면서도, 다치면서도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 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졌기 때문에. 그걸 온 힘으로 버티는 니나의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기 때문에. 영화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난다. 결말 때문에 영화가 더 기분 나쁘고 공포스럽다고 말하는 관객들도 많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곱씹어 봤다.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은 주로 비극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의 메시지를 잘 들여다보면 성찰할만한 굵직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내가 찾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네 안에 릴리는 누구니? 어떤 말을 하고 있니?
나는 그 뒤로 매일 밤 술을 마시며 3년을 보냈다. 물론 그 시간 안에 ‘내 안에 미친년이 있는 것 같아’라고 되뇌며 단주를 한 기간도 있다. 하지만 흑조를 억누르니 그다음 더 큰 괴물의 모습이 된 릴리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멈출 수 없이 술을 마셔댔다. 그렇지만 일 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일은 더 잘 해냈다. 술 마시는 그 시간도 영감의 시간으로, 일 하는 시간으로 만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듯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강사 이미지를 만들어 출근했으니까.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니나와 릴리를 마주하자. 얘가 원하는 게 뭔지 들어보자.
니나와 릴리는 완벽주의가 만든 괴로움의 산물이었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싶은 욕망, 타인에게 흠집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 실수하면 큰일 날 것 같은 두려움. 욕망과 부정적인 감정이 모두 만나 탄생한 또 다른 나의 자아.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 아이는 잘못이 없다. 그저 내가 만들어낸 괴로움으로 빚어진 아이들이기 때문에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나에게 있지 않나? 그들을 바라보았다. 불쌍했다.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건지. 니나와 릴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은 대답했다.
“완벽하지 않은 나를 그대로 받아주는 것”
경쟁사회에서 취약성을 공유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나도 그랬다. 손해 볼 것 같고, 책 잡힐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니나와 릴리와 화해한 뒤, 내 안의 흑조와 백조는 나란히 춤을 추고 있다. 때로는 완벽하게, 때로는 미숙하게. 두 모습 모두 나의 일부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럴 때, 둘의 합은 더없이 아름답다. 다듬어진 니나의 춤선이 아닌, 스스로의 리듬을 타는 자유로운 춤처럼. 그 리듬 안에서 오늘의 미숙한 에세이를 조심스레 품어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위해.
오늘의 질문
1. 완벽함을 위해 나를 몰아세운 경험이 있나요?
2. 내 안의 릴리와 니나는 누굴까요?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3. 니나와 릴리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세요. 어린아이라 생각하면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