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분노'를 연료로

어쩌면 치유의 시작일 수 있는 분노에 대하여

by 달달보름

분노는 연료다.


최근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어 나가는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속 3장은 이 문구로 시작한다. 바로 오늘 아침, 에세이를 쓰기 전에 모닝페이지르 글쓰기 온도를 높이며 읽어나간 페이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문장이다. 분노는 과연 연료가 될 수 있을까?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억압하면 병이 되고, 컨트롤할 수 없으면 화가 된다.


인류의 발전을 따라가 불의 기원을 살펴보면 불 역시 얼마나 큰 양면성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불은 인간이 직립보행 이후 문명사회를 이룰 수 있을만한 어마어마한 발전속도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불은 동시에 인간이 다른 생명을 착취하는 정복자가 되게 만들었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에게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게 만드는 끔찍한 형벌을 내리기도 한다. '화내다'의 화(火)가 불을 나타내듯, 이 화는 잘 쓰면 미친듯한 발전으로, 잘못 쓰면 미친듯한 폭력으로 정반대의 상황으로 쓰일 수 있다.


영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처음 본 관객들은 이 영화에 나오는 정신나간 캐릭터들에 의해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분노조절장애가 분명한 펫(브레들리 쿠퍼)을 비롯해 섹스중독과 같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이어가는 티파니 (제니퍼 로랜스), 도박에 빠진것 같은 펫의 아버지 (로버트 드 니로)를 비롯하여 메인 캐릭터에 비해 '정상'범주에 속하는 것 같은 다른 주변 인물조차 현실세계에서는 다 '비정상'이 될 법한 이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정신없고 당황스럽고,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보고 있으면 빵빵 터지고 빠져드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모든 인물들이 다 이상한 사람이다 보니까 진짜 이 세계에서 조금 이상한 나는 이들에 비하면 정상인 것 같은 착각과 위로감마저 느껴졌다.


특히 밥을 먹다가 갑자기 냅다 광기어린 소리를 지르는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는 지금 봐도 맛깔난다.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좋은지 오래도록 고민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삶에서는 이렇게 소리 지를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제멋대로 식탁을 뒤엎어 버리는 '미친년'의 모습에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졌던 건 아닐까 싶다. 글을 쓰는 와중에 생각났지만, 저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분노의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던 분노에 잠식된 지난날의 나의 조각들이 떠올라 약간 부끄러워진다. 그래도 영화 속 티파니만큼 화를 내진 못해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있었나 보다.


영화 속 둘은 무엇 때문에 분노에 잡아먹혔을까?


펫은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미 떠난 사랑을 놓지 못한 집착과 배신감이 섞이며, 그의 분노는 예측 불가능한 폭발로 이어진다.

티파니는 결혼 직후 남편을 사고로 잃고 상실감에 잠식된다. 이를 견디지 못해 동료들과의 성적 관계로 자신을 파괴하고, 그 대가로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상처는 곪아가고, 분노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온다.


글을 쓰면서 나는 최근에 언제 분노했나 떠올려봤다. 온 세상을 향한 혐오를 느꼈던 적이 딱 일 년 전이다. 도대체 왜 24시간 내내 막히는지 모르겠는 서부간선도로의 미스터리는 합류지점 끝즈음에 가면 풀린다. 딱 거기까지 쌩쌩 달려오던 차들이 얌체같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 느닷없이 화가 얼굴을 내민다.


'야, 넌 바보냐? 저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도 없이 그냥 새치기해서 끼어드는데, 그걸 왜 계속 넣어주고 있어?'


자꾸만 늘어지는 네비를 보면서 당장 무기 꺼내서 헤드샷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분명 그 지점에서 막힐 것을 예상했다. 양심 없이 바퀴부터 내밀어 슬금슬금 밀고 들어와 비상등을 켜며 '미. 안. 미. 안. 끼. 워. 줄. 거. 지' 불빛으로 말하는 사람들 덕분에 약속된 강의 시간이 점점 지연될 위기에 처해 버렸다. 내비게이션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났고, 늘어나는 시간만큼 내 수명이 단축되는 듯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식은땀이 났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아무리 외쳐도 힘없는 흰색 레이는 끼어들기 타깃이 되기 딱 좋으니까.


내 화는 딸랑딸랑 소리를 내다 파아- 하고 퍼지는 압력밥솥의 수증기처럼 솟아 나왔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올라온 심박수를 제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 순간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차피 차 안에는 나밖에 없으니, 소리라도 지르자 싶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흔한 클리셰 같았다. 문 닫힌 차 안은 아수라장에 육두문자가 난무하는데 선팅된 차 밖에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그런 상황. 밥상을 뒤 엎던 티파니에게 빙의되어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지랄발광을 펼쳤다.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상황을 곱씹으며 떠올려봤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교통체증과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의 무질서, 그리고 강의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뒤범벅되어 분노가 된 것이다. 시간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예의범절을 우선 가치로 두고 사는 한국 사람에겐 중요하니까. 누군가와의 약속을 저 버린다는 건, 결국 나의 신뢰를 깨 버린다는 것이니까. 어떤 마음인지 내 마음의 꼴을 파악하고 나서 마음 챙김과 명상을 접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진짜 (한국 사람들이 반문을 가질 때 하는 부사이자 감탄사) 사람이 살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 그래서 신뢰를 잃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잖아?


이 아하 모먼트는 놀라웠다. 그 사이에 얽혀있던 또 다른 공포와 두려움이 줄줄이 사탕처럼 빨려 올라왔고, 그 매듭을 툭- 놓는 순간 그것들도 다 같이 사라져 버렸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불길이 불씨로 잦아든 것이다.

사실 어쩔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그냥 인연이 나와 거기까지 인 것이다. 그 뒤로 딱 9개월 뒤에,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내 심장은 그때처럼 바운스- 바운스- 뛰지 않았고, 너무나 고요했고 시계를 보는 나의 마음도 평화로웠다. 캠핑을 마치고 온기만 남은 불씨처럼.


펫의 통제 불가능한 상황은 이미 떠나버린 전처 니키의 마음이었고 티파니의 그것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전 남편이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지나가버린 인연에 대한 집착, 그것이 두려움과 공포로 이어져 분노와 화로 표출되었다. 온기로 쓰여야 할 에너지가 용암처럼 들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노를 나의 연료로 어떻게 써야 할까?《아티스트 웨이》의 저자는 분노의 예시를 '질투', '열등의식' 등으로 표현한다. 앞서 내가 경험했던 고속도로 위 분노는 연료로서 쓰이기엔 부족하다. 그보다 더 한 분노는 사실 타인과의 경쟁에서 비롯된다.


30세가 되기 전까지 내 멱살을 잡고 나를 이끌었던 감각도 그것이었다. 질투. 질투를 빼고 내 청년시절을 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게 너무나 싫고 어리석어 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를 키워 준 엄청난 연료였다. 좋은 대학에서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대학원을 진학하게 만들었고, 서비스 직군에서 괴롭힘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던 상사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비스 강사로 전직했다.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은 무조건 짓밟고 싶다는 질투심에 누구 하나를 표적으로 삼고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무식하고 단순했지만, 그게 나의 기름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펫과 티파니 역시 잘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에 분노의 연료를 사용한다. 그들을 서로의 닮은 점을 파악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춤을 추며 리듬을 맞춘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고 감정에 휘둘릴 때 그것을 회복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부드러운 자기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을 만나는 것이다. 심리학 용어로 '거울 치료'. 서로를 바라보며 나는 쟤 보다 낫다는 자기 위안을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 펫과 티파니는 춤이라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서로의 회복을 돕는다. 분노를 연료 삼아 잘 살아갈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火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좋은 예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불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화재 위험에 대한 안전 교육을 받고, 가스 밸브 점검을 하거나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를 쓰며 자란다.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음식을 익혀 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물질을 녹여 새로운 것을 만들도록 도우니까. 분노도 마찬가지다. 분노를 다루는 가장 첫 단계는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화가 나고 있구나 인정하고 가능하면 표출하기. 이를테면 내가 아무도 모르게 차 안에서 내던진 육두문자처럼. 가능하면 창조적 방법으로 표출하면 더 좋다. 분노의 양치질 같이 분노의 타자기 질로 글을 써보든가, 종이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욕을 잔뜩 써 놓고 진짜 불로 태워 버리든 어떤 방법도 좋다.



오래된 분노를 마주하며, 그 안에서 유레카를 외쳐보자. 세월 속 땅속에서 단단해진 용암처럼, 우리를 이끌어갈 창조의 분노는 누구에게나 있다. 펫과 티파니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춤을 배웠듯, 나 역시 활활 타던 화염을 온기를 품은 불씨로 바꿔왔다. 그 불씨는 앞으로도 꺼지지 않고, 나를 더 깊이 데리고 갈 것이다. 이 글의 불씨 역시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 닿아 온기가 되길 바란다.




오늘의 질문


1. 내가 최근 가장 분노를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요? 그 수간에 나는 어떤 행동을 했나요?


2. 분노로 나타나는 내 진짜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나는 어떤 연료로 전화할 수 있을까요?


3. 내 안에서 아직 식지 않은 오래된 불은 뭘까요? 그걸 꺼내면 어떤 창조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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