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자리의 상실감
상실의 시대. 우리는 어떤 상실감을 안고 살아갈까?
상실감.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태나 그로 인해 겪는 고통, 감정이나 가치가 결여된 상태가 사전이 정의하는 상실의 의미이다. 공허함과 허탈과 동의어인 후자의 의미는 하루에도 여러 번 느끼고 있는데, 잃은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은 언제 느꼈는지 가물가물하다.
상실과 친숙하지 않은 나에게도 가끔 느껴지는 낯선 상실이 있다. 오래된 유적지에 갔을 때, 1000년 이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장소를 둘러볼 때에 감정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태와 유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찬란했던 삼국시대를 품고 있는 경주나 부여등의 유적지와 사찰, 탑을 바라보고 있을 땐 그 시절 하나하나에 가닿았을 민초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동시에 그때의 찬란함을 잃어버렸다는 아픔이 함께 느껴진달까? 고대 문명이 발달한 곳의 유적지를 직접 방문해 본 적이 많지 않지만, 실제 가서 본다면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이 낯선 상실의 감각은 영화 <고스트 스토리>를 보며 더욱 선명해졌다. 영화는 상실의 시간을 안고 가는 듯한 느릿한 롱케이크와 대사 없이 이루어지는 담백한 씬들로 상실의 시간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어설프게 흰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유령의 모습이 우스꽝스럽지 않은 점도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다. 감정의 절제와 느릿한 움직임이 그 허접한 천 쪼가리조차도 진짜 떠나간 사람의 슬픔을 보여주는 듯하다. 불필요하게 긴 롱테이크를 따라가다 보면 숏츠의 시대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그 속도에 슬슬 지쳐가는데, 관객의 감정을 붙잡고 늘어지는 감각이 마치 상실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그것마저 예술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이자 음악가인 C는 연인 M과 함께 교외의 낡은 집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집 앞에 불의의 사고로 C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C는 그 날부터 유령이 된다. M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떠나간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건물이 철거되고 새 건물이 세워지던 어느 날, C는 M이 남겨 놓은 쪽지를 보고 마침내 소멸한다. 영화는 이렇게 상실의 예술에 대해 느리게 그려낸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 연인을 잊지 못한 채 계속 한 자리에 머무르는 모습, 상실은 어쩌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며 우리를 따라다니는 유령이 아닐까?
어린 시절 내 추억을 간직한 고향이 신도시로 바뀌었다. 그곳에 지나갈 때마다 나는 영화 속 C처럼 유령의 모습으로 지나가는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내가 20년을 넘게 살던 작은 마을은 지금의 위례신도시로 편입된 창곡동이라는 서울과 성남의 접경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논과 밭,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서울이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의 조용한 마을이었다. 밤 10시면 버스가 끊겨 집에 오지 못할 정도였고, 토박이 어르신들이 터를 잡고 살았기에 어딜 가나 누구 집 누구 딸이라는 일방적인 질문에 휩싸였다.
우리 집은 구멍가게 앞 언덕 위에 위치한 곳이었다. 봄에는 마당에 키우던 흰둥이 옆에 있는 배나무에 아기 주먹만 한 배들이 열렸다. 그 옆 장독대를 지나면 앵두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나중에 커서 도시 아이들이 앵두를 먹어본 적 없다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도 있다. 봄이 온 걸 알리는 두릅나무와 할아버지가 정성스럽게 가꾸던 파, 배추, 무, 옥수수를 심어 놓은 밭, 그리고 그 뒤 닭장에는 닭과 오리 같은 동물 친구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마치 수호령 같은 밤나무에 보호를 받듯 밤송이에 둘러 싸여 가을이 되면 밤들이 콩콩- 하고 지붕 위에 떨어졌다. 작은 마당과 장독대에는 겨울이 되면 소복이 눈이 쌓였고, 그 눈을 열심히 굴려 눈사람을 만들어 찍은 우리 삼 남매의 사진은 여전히 친정집 사진첩에서 발견된다. 사계절을 자연과 함께 보냈던 그곳이 나의 정체성이다. 한 동안 지긋지긋하다며 이 시골마을을 떠나겠다고 도시로, 해외로 도피하며 표류했지만, 결국 나를 이루던 곳은 창곡동의 작은 마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신도시로 정갈하게 개발된 위례신도시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이상하다. 그곳은 여전히 내 추억이 둥둥 떠다니는 곳인데, 세련되다 못해 지나치게 각이 잡힌 신도시가 된 창곡동은 그 공간에서 내가 쌓아 온 기억의 상실감을 너무나 짙게 느끼게 만든다. 밤나무는 잘려나가 아파트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흐르던 냇가는 잘 정비된 하천이 되었다. 더 이상 앵두나무와 배나무는 볼 수 없다. 풀과 꽃, 숲과 나무, 흙과 자연으로 함께 부드럽게 연결되었던 감각이 끊긴 채 나만 덩그러니 남은 기분. 영화 속에서 연인을 잊지 못하고 새로 건물이 세워질 때까지 떠나지 못하고 부유하는 유령과 같은 상실과 외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 후반부에 C는 M이 남겼지만 열어 보지 못했던 편지를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통해 발견한다. 그때는 열 수 없었지만 이제는 열 수 있게 된 쪽지를 열어 본 순간, C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쪽찌로 자유를얻은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영화를 본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필름처럼 남아있는 기분이 든다. 궁금했다. 대체 어떤 말이었을까? 어떤 말을 보고 C는 한순간에 사라지게 된 것일까?
그 안에 쓰인 편지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은 관객으로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감상이겠지만, 사실 어떤 내용이 들었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쓰여있던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 세기를 떠돌던 상실이라는 탈을 쓴 유령은 찰나의 깨달음으로 M의 미래를 축복하고 자신의 길을 떠난다. 이처럼 상실의 소멸이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는 뜻이자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기 있게 진실을 기꺼이 마주하려 할 때 상실로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을, 상실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는 해방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감정은 억지로 없애는 것도 아니며, 참는 것도 아니고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공기처럼 함께 숨 쉬고 우리와 공존할 뿐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원치 않게 소중한 존재를 잃는 경험을 한다. 운이 좋으면 나처럼 공간이나 정체성 말고 무엇인가 잃은 감각을 아직 겪어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흐른다. 결국 상실은 인생을 살면서 한번 이상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창곡동을 지날 때마다 베어나간 밤나무와 앵두나무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나 영화 속 C처럼 문득, 내 눈앞에 놓인 쪽지를 열어 볼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주 우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것을 열었을 때 떠난 유령의 빈자리는 온기로 채워질 것이다. 추운 겨울에 소복하게 마당을 덮은 눈이불과 같은 따뜻함으로. 상실은 그렇게 한 순간에 사라지기도 하니까. 그것을 잘 알기에 아직 곁에 머물고 있는 마음속 상실감을 오늘도 보듬어 본다.
다음화는 다음주 수요일 8/27일 연재됩니다. 달달보름은 내면을 마주하러 명상하러 떠나게 되었어요. 깨끗해진 마음으로 좀 더 정갈한 글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