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나를 살릴 '고통'과 직면하기

고통 속 비움과 또 다른 채움

by 달달보름




누구에게나 감당할만한 십자가가 있다는 말을 싫어했다. 마치 합리적이지 않은 인생의 고통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니 징징대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이제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본질을 받아들이고 있다.



고통은 사람을 죽이는가 살리는가?



누군가는 그 고통 때문에 죽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고통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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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의 상징인 두 성인


내가 존경하는 두 성인 예수 그리스도와 석가모니 부처이다. 십자가 고상은 내 작업실 이 글을 쓰는 노트북을 올려다보면 항상 볼 수 있고, 고행상은 프린트해 코팅하여 오른쪽 벽면에 잘 붙여 두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 고통 속에서 나는 위를 올려다본다. 그럴 때마다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수난과 고통을 내가 가지는 그것과 비할 수 있을까? 사랑과 자비, 파괴와 혁명. 그리고 고통을 기꺼이 짊어진 인내의 상징.


석가모니 부처의 많은 상들 중에서 내가 고행상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루 쌀 세 톨로 버티며 수행정진 하셨다는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가진 게 너무 많은데 뭐 하나 잘못 됐다고 불평 불만하는 걸 '고통'이라고 명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예수고 부처냐?라고 반문하겠지만,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누구든 예수고 부처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진짜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텐데, 안 할 이유는 뭐가 있을까 싶다.



같은 이유로 영화 <와일드>를 좋아한다. 원작 에세이도 좋지만, 특유의 빠른 편집과 영상미 연기와 OST의 조합이 예술처럼 느껴지는 영화가 훨씬 내 마음을 더 울린다. 조금 오바해서 좋은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내가 보기엔 예수이고 부처처럼 느껴졌다. 작가 본인이 보면 어리둥절 하겠지만, 여러번 영화를 본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그녀는 성인과 버금가는 여정을 마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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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무리하게 걷다가 빠지기 일보 직전인 발톱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고통이지만, 리즈위더스푼의 연기를 보고만 있어도 아프다. 그 고통을 참고 견디며 주인공 셰릴은 제 손으로 발톱을 빼낸다. 비명을 지른다. 빠져버린 발톱과 함께 맞지 않아 자신을 힘들게 한 신발을 바위 밑으로 내 던지며 욕을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욕일지도, 세상을 향한 욕일지도 모르는 말들. 그렇게 실컷 내뱉고 난 셰릴은 급한 대로 판자를 구해 임시방편의 신발을 만들어 다시 트래킹을 시작한다. 가지 않고는 방도가 없으니, 거기서 멈춰 버리면 죽을게 뻔하니까.



이렇게 강렬한 오프닝으로 시작하는 영화 <와일드>는 트래킹을 떠나는 셰릴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하며 그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은유하고 보여준다. 편집이 약간은 정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트래킹이라는 고행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사람의 심리를 아주 잘 묘사한 것 같은 돋보이는 연출법이다.



셰릴은 싱글맘 밑에서 듬뿍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학교도 열심히 다니는 모범생이었을 정도로.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와 함께 대학에 다녔다는 점이었다. 엄마는 평생을 두 아이를 키우며 살다 아이들이 다 컸을 무렵 밀린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우면서도 내심 불편했던 셰릴. 그런데 엄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막 자기 인생을 살기 시작한 엄마에게 내려진 암 선고.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할 새도 없이 떠나보낸 셰릴은 그때부터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한다. 음주, 마약, 무분별한 성행위 등으로 자기혐오를 하던 셰릴.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트래킹을 떠나게 된다.



셰릴이 떠난 트래킹은 미국과 캐나다, 남미까지 연결되는 4000km의 대장정이라고 한다. 초보 트래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코스로,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자기 몸만 한 짐을 들고 떠난 셰릴은 그야말로 아주 무모했고 겁도 없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떠나보낸 엄마와 대화하며 삶의 유한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고통 속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간 절식하며 고행했던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과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보기엔 달라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이 성불하고 예수님이 부활한 것도 고통을 견뎠기 때문이다.셰릴도 그랬다. 비록 완주하지 못했을지라도 수많은 위험을 통과하며 견딘 1000km, 3개월간의 여정이 셰릴을 살렸다. 그녀는 말한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이라고. 그 경험들이 모여 지금 자기 자신이 트래킹의 길에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다들 자기만의 고통 속에 살아간다. 남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통. 그 고통을 통과하는 여정에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세상을 원망하고 신을 원망하며, 자기 자신을 혐오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흘러가는 현상일 뿐이다. 내가 특별해서도, 내가 딱히 못났거나 못돼서가 아니다. 결코 이보다 나쁠 것이 없을 것 같은 고통은 애석하게도 견디면 끝이 아니다. 고통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고통이 언젠간 찾아온다. 그때를 견디려면, 지금 내 고통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셰릴의 트래킹은 자기 자신을 찾는 고통의 여정과 많이 닮았다. 한 없이 무거워 짊어지려 하면 뒤로 나자빠지게 만들었던 짐의 무게도 시간이 갈수록 가벼워진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며, 쓸데없는 짐들은 인생에 무게를 더할 뿐이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남들이 겁먹고 출발조차 하지 않는 곳도 그곳이 진짜 위험한지 아닌지는직접 가 보고 겪어야 알 수 있다. 셰릴은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잡고 있던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씩 하나씩 놓아간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괴롭혔던 신발을 벗어던진 후에는 많이 걸어도 발이 조이지 않는 넉넉한 사이즈의 신발을 갖게 된다. 이 장면을 보고 마치 마음의 크기 같다 생각했다. 여유 있을 땐 다칠 염려가 없지만, 꽉 막혀 있는 좁은 마음에서는 약간의 자극만으로 발톱이 빠지고 소진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꼭 겪어봐야 깨닫는다. 내 마음의 여유가 없었음을, 셰릴처럼 말이다.



3개월의 여정으로 물리적인 무게와 함께 정신적인 마음도 비워낸 셰릴은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다. 엄마와 남편에게 가졌던 죄의식도 놓고, 앞으로 좀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다짐한다. 그렇게 그녀는 글을 써 내려가는데, 그것이 우리가 에세이로 보게 될 원작 '와일드'가 된다. 앤딩 시퀀스가 끝나기 직전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How wild it was, to let it be.'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 삶은, 얼마나 야생적이었던가.



내 20대를 지배했던 말이 있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때는 그 말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뭐 어떤가? 싶은 생각이 올라온 적이 있다.



건강하게 사는 삶 속에 있는 '사는 대로'는 야생적일 수 없다. 그것은 정갈하고, 정돈된 미래를 위한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사는 대로'는 야생 그 자체이다. 자기 파괴적이고 혐오적이며 끝난 과거 속에 살아가는 불행한 현재일 뿐이다. 셰릴의 과거처럼 말이다.



야생적이지 않은 돌봄을 받은 인생은 꽉 찬 것들을 하나씩 비울 수 있는 힘을 주고 비움으로 인한 마음의 여유를 선물한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새로운 채움을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셰릴의 말처럼 우리는 고통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때의 나를 직면하는 힘을 길렀을 때에, 두 번째 세 번째 고통 역시 잘 다룰 수 있는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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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을 때 고상 속 예수님 얼굴을 떠올린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삶이 얼마나 고통인지 나는 절대 알지 못한다. 그 십자가를 함부로 견디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소망한다. 그들이 낡은 신을 벗어던지고 야생적인 삶을 하나씩 가꿀 수 있는 의지가 생기길.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길. 뒤 돌아봤을 때 그 여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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