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 그러니까 '공감'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by 달달보름

2019년 안산 센트럴락 롯데시네마까지 찾아가 봤던 영화 <미드소마>가 여전히 내 기억에 강렬한 이유는, 점심 대신 먹으려고 싸갔던 달걀과 채소스틱을 먹으며 봤던 충격적인 장면 때문에 거의 체할 뻔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밝은 포스터, 예쁜 빛, 천사를 상징하는 듯한 하얀 옷, 꽃과 자연. 이 모든 미장센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오컬트 한 영화. 결론적으로 나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영화였지만, 고어한 장면을 보기 힘든 관객분들에게는 권하기 힘든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감정적 키워드는 강력했다. 바로 '공감'. 진짜 공감은 무엇이고 가짜 공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다.



공감이면 다 같은 공감이지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냔 말인가? 이 영화는 그 교묘한 감정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외로운 사람에게 가짜공감이 어떻게 컬트화 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공포영화이지만 심리영화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완전한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힐링영화가 되기도 한다. 힐링영화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면 마지막 앤딩 장면이 힐링이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주인공 대니는 항상 불안하다. 만성적인 우울증이 있는 여성이기도 하고, 지속되는 동생의 자살 기도에 하루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날이 없었을 정도로. 그는 유일하게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남자친구 크리스에게 괴로움을 나눠 달라고 털어놓는다. 몇 년 동안 지속되는 대니의 우울증에 지쳐갔던 남자친구는 어김없이 걸려 온 전화를 대수 롭지 않게 받고 넘겨버리고, 옆에서 떠들던 친구들은 이제 그만 헤어지라며 훈수를 둔다. 그리고 그날, 진짜 일이 터진다. 대니의 동생은 자살기도를 하기 전 함께 사는 가족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버렸고 대니는 그 소식을 듣고 크리스에게 다시 전화해 목 놓아 울어버린다.



대니와 헤어지길 원했던 크리스는 큰 슬픔을 겪는 애인을 떠날 수 없어 결국 헤어지지도 못한 어정쩡한 관계로 남게 되고, 같은 인류학 전공인 대학원 동기 펠레의 초청으로 크리스와 친구들 그리고 대니까지 모두 '호르가'라는 마을에 초대된다. 슬픔도 잊고 크리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크리스와 대니의 벌어진 틈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 산산조각 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울고 웃고 춤추는 어쩐지 조금 이상한 호르가 주민들에게 매료된 대니는 자신이 원했던 진짜 '공감'을 얻고 호르가의 여왕으로 거듭난다.



<미드소마>는 대니를 연기한 '플로랜스 퓨'의 연기가 매우 돋보이는 영화다. 우울해하고, 울고, 웃고, 약에 취하고, 괴로워하고 마침내 해방되는 다양한 표정을 끊임없이 보여주는데 그 섬세한 연기에 묵직한 힘이 느껴지기도 하다. 특히 호르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대니가 겪었을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표정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상태에서 지속적인 자살시도를 하는 동생을 둔 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대니는 그 불안함을 누군가 함께 나눴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더욱 고립되었다. 크리스가 처음부터 공감을 못하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으리라 예상된다. 아마도 지속적인 대니의 우울감에 같이 지쳐갔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감정이지만 영화가 대니의 시선으로 진행되다 보니 크리스의 감정은 과감하게 삭제되었다. 그래서 더욱 대니의 고립된 공허함과 불안감의 여백이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호르가 사람들은 다 함께 웃고 다 함께 울어준다. 마치 '공감'이 공동체의 규칙과 룰인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이 과정에서 아리 애스터 감독의 재치가 함께 나온다. 관객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장면이기도 했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바람피우는 크리스의 성관계 장면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공동체 사람들이 함께 신음하는 웃지 못할 장면이다. 그때 그 장면을 보던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이 영화 속 장면의 완성처럼 느껴졌다. 함께 신음하고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들의 연기가 얼마나 우습고 당황스러운가. 호르가의 '공감'은 그런 식이다. 크리스는 그 순간이 너무 수치스러워 발가벗은 채로 뛰어나오고,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본 대니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또다시 울부짖는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칠 수 없는 호르가의 사람들은 모두 대니 곁으로 달려가 함께 목 놓아 울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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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친구, 남자친구의 공감을 바랐던 대니는 우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함께 통곡하는 호르가 공동체 사람들에게 위안을 얻는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공감'이 어떻게 컬트화 되는지 전복시키는 엄청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진짜 공감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를 진짜 공감해 본 경험이 있을까? 아주 뜨거웠던 올여름 나는 도반들과 함께 모여 4박 5일 동안 마음을 나누는 수련을 하며 강렬한 공감을 느꼈다. 사실 공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전이가 컸던 감정이라 나 스스로가 힘들기도 했던 경험으로 남아있다. 어릴 때 아픈 기억을 나누었던 도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지금 다 큰 도반이 아닌 정말 어린아이인 도반의 모습이 갑자기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 상처받았던 경험을 듣다 보니 그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까지 비추어서 정말 무슨 버튼이 눌린 것처럼 눈물이 계속 흘러 당황했었다. 시종일관 씩씩하고 강한 모습을 보였던 도반도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 그때는 내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울 자격이 있을까 창피하기도 하고 눈치가 보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어쩌면 어린 시절 위로받지 못했던 도반에게 내 눈물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수련을 마친 뒤에 나와서 도반과 나는 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웃고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나는 어떤 목적도 어떤 이익도 없이 그저 함께 울어 주었을 뿐이었다.



심리학자 다니엘 벳슨(C. Daniel Batson)은 '공감-이타주의 가설'(empathy-altruism hypothesis)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느끼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을 돕는다고 한다. 얻을 수 있는 것과 상관없이 돕는 것, 아마도 그게 진짜 공감의 의미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위의 사진을 다시 올려다보면 이 영화가 왜 공포영화로 분류되는지 명확해진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의 일환으로 대니를 포섭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집단이고, 그 명백한 목적으로 함께 울어주고 있으니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 아니다.



그런데 그걸 아는 관객들과 다르게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운 대니에게는 그런 가짜 공감조차 진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놀랍게도 이 공동체에서 대니는 자신의 감정이 진짜 다른 사람에게 가 닿는다는 연결을 경험하고 공동체에 남는 선택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재물을 보면서 대니는 미소 짓는다. 자신의 응어리졌던 공감받지 못한 외로움과 고립감이 함께 타오르는 '정화'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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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란 감정을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아마도 대니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종교집단에 포섭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와 같은 원리 아닐까. 대니의 남자친구 크리스가 힘들고 지치더라도 자신의 괴로움과 상관없이 대니에게 마음을 내어 줄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들이 호르가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난 뒤 대니의 미래를 상상했다. 대니는 호르가에서 메이퀸으로 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끊임없이 속고 속이는 가짜 공감 속에서 계속해서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가짜 공감이라도 대니를 살리는 일이라면 그게 대니에게는 행복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속에서도 우리에게 공감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큰 생명의 양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늘의 질문

1. 내가 마지막으로 타인을 위해 '진짜 공감'을 해 준 경험은 언제인가요?

2. 타인의 공감이 가짜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3. 상대방에게 완전히 공감하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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