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기

마제 정약용 생가에서 캐나다 벌링턴까지

by 윤현희

모처럼 서울 하늘이 맑은 주말 오후, 정약용 선생의 생가를 찾아 남양주의 마제로 향하는 길은 한강을 따라가는 참으로 수려한 길이었다. 가뭄이라 물이 말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짙푸르게 유유히 흐르는 강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깊고도 길게 펼쳐져 있다. 강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팔당대교는 청명한 대기 속에 굳건했으며, 강물 위로 햇살은 잘게 부서지며 빛나고 있다. 이 길을 매일 다닐 수 있으면 세상일엔 귀 닫고 눈감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강을 연결하는 거대한 다리 위의 한 켠으로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나 있었는데, 도로는 건너편 강둑 어딘가로부터 이어지고 있다. 색색깔의 멋진 운동 기어를 갖춘 사람들이 유유자적 자전거를 타는 풍경은 한 달 전 어느 갤러리에서 보았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문득 텍사스 메마른 평지의 아스팔트 위에서 타는 듯한 햇살 아래 도 닦듯 자전거를 타는 모든 선수들이 측은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사이클을 타는 작은 아이에게 창 밖의 풍경을 보라며, tour de france 코스도 여기보다 안 예쁠거라고 감탄을 했더니, 아예 못들은 척 눈을 딱 감고 팔짱을 끼고 있다. 어린 마음에 한국의 사이클리스트들에게 질투가 났던지도....



구불구불 비탈길을 올라가자 잘 다듬어진 다산 문화관과 문화 거리가 나타났다. 매우 잘 구성되어 있긴 했는데, 왕래하는 차량에 비해 주자창이 턱없이 좁았고, 따라서 골목길을 들고 나는 차들은 서로 닿을 듯 아크로바틱 한 운행과 주차를 해야 했다. 다산 문화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유럽식 통나무집을 연상케 하는 예쁘게 지어진 조그마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산 생가를 공원처럼 개발한 문화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문화관 앞에는 실학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현대식 건물이 있었는데, 그 건물 전면에는 "여성 실학과 통하다."라는 특강 제목을 쓴 플래카드가 거대하게 붙어있다. 이 외진 곳에서도 이런 식의 특강이 이루어지고 또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니.... 한국의 교육열은 전 생애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는 입장이 되고 싶어하는 현상의 반증일 수도 있고...



형이상학에 경도된, 생산성 없는 통치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사구시의 프래그머티즘을 설파했던 역할을 생각할 때 정약용 선생은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테크노크랫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험주의 철학에 기반한 프래그머티즘으로 점철된 미국 사회를 경험하는 10년 동안, 또한 본질적으로 실용주의인 행동과학을 공부한 이유로 나 또한 그야말로 실학파가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경험적 자료에 바탕한 증명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닌 공허한 관념들에 귀를 닫는 버릇이 생겼다.



정작 당쟁의 소용돌이와 정치 일선에서 물러서 있었던 유배생활은 그가 실학을 정리하고 집대성하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시간이었지도 모른다. 오년 전에 다녀온 강진 땅의 다산 초당은 운치있는 듯했으나, 워낙 관광지 개발의 노력이 집중된 후라,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초당을 찾아가는 갈은 참으로 외지고 외졌었던 기억이 있다. 정조가 조금 더 명이 길었더라면, 도산 선생의 활약 시기가 조금 더 길었더라면 조선이 조금은 나은 사회가 되었을까. 도산 선생의 일대기를 디오라마로 만들어 놓은 문화관 한쪽 벽면에 세겨진 다산 선생의 시 애절양(哀絶陽)은 삼정의 문란으로 백골징포 황구첨정의 아비규환을 겪던 조선 후기의 양민 잔혹사를 반영하고 있었다. 불과 200년 전의 이야기다. 인신이 매매의 대상이 되었던 노비들의 고통은 말할 것 없었겠지만, 간신히 면천을 하고 보니 정부로부터의 잔혹한 세금 징수의 참상은 애절양이라는 시를 접하고 보니 마음이 불에 덴 듯 눈물이 차오른다. 그러고보면 그렇게 강렬한 시를 남긴 도산 선생은 대단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봉건제가 해체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 신기술이 전 세계로 퍼져 나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공맹의 도를 논하며 관이 앞장서 국민들을 수탈하고 노비로 전락시키고 있었다니... 불현듯 시간은 동일한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는 시간의 상대성이론이 와락 실감이 난다. 20세기 초의 어지러운 반세기가 지난 후, 1960년대로부터 90년대를 거치며 두 번째 반세기가 이루어낸 한국의 현재는, 세계사의 시간을 놀라운 속도로 따라잡은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조선의 500년과 대한민국의 반세기 50년. 시간의 상대성이론을 이보다 더 은유적으로 또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도 없을 것이다. 패망 국가가 되어 식민지가 되었고, 해방 후 내전으로 초토화되어 에티오피아와 필리핀으로부터도 원조를 받던 국가가 반세기 안에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 세계 6위 수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현재 진행형의 역사를, 현재의 위상을 도산 선생의 시 애절양을 새긴 벽을 면하고 생각한다. 오천 년을 세계사의 변방으로 지내던 나라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급부상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라 안 밖의 요인들. 과도한 국가적 교육열이 가져다준 긍정적 결실들... 한국을 세계 경제의 한가운데로 밀어주던 외부에서 불어오던 순풍.... 중국이나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



캐나다의 ESL 클래스에서는, 러시아 영향 아래 있었거나 일찍이 공산화되었던 국가들 폴란드,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체코 등에서 온 연세 지긋하신 엔지니어 아저씨들과 많은 토론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조국이 현대에 와서 이데올로기 문제로 아픔을 겪기는 했지만, 온화했던 개인들의 면면들은 참 기품있고 절도 있었고, 유럽의 화려하고 앞서갔던 문화를 짐작케 해주던 분들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그룹에 속하던 그들이 조국에서 -몰락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다- 평생 노력해 일군 재산과, 서른을 갓넘긴 우리가 -개발도상국에서 한발 더 떼보려하는 신흥 경제대국 출신의 신혼부부다 -결혼 후에 장만한 아파트 한 채 겨우 팔아서 준비한 캐나다에서의 새 출발 자금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그 구체성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젊은 우리가 평생 일하신 그분들보다 편하게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 우리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을진데, 왠지 그분들 앞에서면 늘 미안한 마음이 들고 조심스러워지곤 했었다. 한국에서 자라나 성인이 되면서는 절감할 기회가 없었던 한국이 가지는 크레디트를 나라 밖에 나와서 체감하게 되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이민 온 지 오래된 중국 출신의 엔지니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왜 한국처럼 잘 사는 나라를 떠나서 캐나다에 와서 이른바 맨땅에 헤딩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어하기도 했다. 실제로 작년 GDP는 캐나다 바로 아래가 한국인데 두 국가 간에 큰 수치상의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엔지니어는 내 친구 비비안의 남편 미스테 웨이 씨였는데, 그는 고소득이라 소득세를 35%이상 내고 딸이 하나 있어서 소위 우유값이라고 하는 child tax benefit 매달 6불씩 정부로 부터 지급 받았었다. 60불이 아니고 6불....그랬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우리는 세금을 내고 싶었으나 수입이 없었기에 국가에 납부할 소득세가 없었고 아이가 둘이 있어 두 아이 앞으로 매달 500불씩이 child tax bebefit이 정부로 부터 자동 입금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린 신청한 적 없었지만 국가가 개인의 삶에 좀 많이 개입한 결과였으므로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세금 많이 내는 웨이씨를 만날 때 마다 늘 미안한 마음 가득했고, 좋은 직장 잡아서 성실한 납세자가 되자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뿌려진 세계의 젊은이들의 피, 그리고 그 모든 어머니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난 아들이 둘이고, 남동생이 둘이고, 각별하게 친했던 외삼촌이 두 분이라 군인들에 대한 마음이 각별한 편이다. 내 아들을 모르는 나라의 전쟁터에 보낸다는 일은 나 같은 졸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두 남동생들의 제대가 가까워질 무렵에는 하루하루 무사 제대를 기도했던 터라, 캐나다에서도 현재의 거주지에서도 뜻밖의 장소에서 문득문득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아로새겨 넣은 기념비들과 기념탑들을 마주치게 되면 억누를 수 없이 눈물이 솟구치곤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의 젊은이들이 내 나라 전쟁터에 와서 산화해 갔다니... 그들이 지켜낸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 땅을 떠나와서야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이런 아이러니라니... 송구하고 고마운 마음 가득하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도로들은 (Korean war veretan road/parkway ) 캐나다의 온타리오 호수를 면한 평화로운 동네에서도, 텍사스의 가장 분주한 지역과 시골 오지로 가는 국도에서도, 워싱턴 DC에서도, 맨해튼 하단의 페리 부두 입구에서도 만나게 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북미의 젊은이들이 한국전으로 파병되었기에 가는 도시마다 그들을 기리는 기념탑과 기념비, 도로들이란 말인가. 한국에서 내가 살던 바닷가 아파트에서 차로 10분 거리에는 유엔군들을 기리는 묘역이 있었다. 김중업 선생이 설계하신 버섯기둥을 연상하게 하는 공원의 대문과 긴 삼각형 모양의 채플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구조물이었다. 첫 아이가 걸음마를 뗄 떼, 가족과 가끔 유엔 공원엘 가곤 했는데 공원은 찾는 이가 없어서 늘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전사자들의 이름이 세겨져 있었다.



한국을 떠나 살면서 발견하고 깨닫게 된 것은 국가 간의 군사적 동맹은 차치하고라도, 글로벌 시티즌들이 서로 통행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조율해 놓은 국가 간의, 대륙간의 경제적, 학문적 연합체 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그 나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글로벌 동맹에서 얻을 수 있는 혜택과 크레딧에 무한히 감사하다. 뜻있는 자 어디서든 그 뜻을 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 그 글로벌 징검다리들에 대한 고마움을 나는 아이들에게도 자주 이야기한다. 네가 살고 싶은 대륙이 어디든 넌 가서 살 수 있고, 중요한 것은 니가 선 자릴 박차고 떠날 수 있는 용기와 세상을 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실력을 가지는 일이라고. 한반도가 실질적인 섬나라 상태를 벗어난 시대에 태어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다산의 일생을 디오라마로 관람하고 건물 밖을 나오니, 초여름의 땡볕아래 정약용 선생의 동상 앞에 곱게 두 손을 모으로 큰절을 하는 소녀 둘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들인데, 소녀들은 무슨 마음으로 절을 했을까? "백성들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니면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 불러서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어찌나 정성스레 큰 절을 올리는지 보고있자니 감동스러울 지경이다. 저 아이들의 미래에 좋은 일과 축복이 가득하길 나도 빌어본다.




기념관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디선가부터 노란색 코스모스로 가득 찬 꽃밭과 강가의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으로 옮겼을 듯한 서정미 가득한 꽃밭은 첫눈에는 쇠라가 그린 그량자뜨의 일요일 오후를 연상케 했다. 노란색 코스모스가 만발한 강가의 눈부신 풍경은 전에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그 풍경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금계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코스모스를 닮은 이 노란 꽃이 외래종이거나 개량종이어서 그랬을 듯싶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애국 행위는 없어도, 나라 안에 거할 때는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현재의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유네스코는 2012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을 헤르만 헤세, 드뷔시와 함께 올해의 기념인물로 정했다고 한다. 유네스코가 발굴한 실사구시의 정신. 어떻게 하면 일상에서 실사구시 할 수 있을까..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문헌학적인 고증의 정확을 존중하는 과학적·객관주의적 학문 태도를 이르는 말임." (두산동아 국어사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