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기

싱가폴 여행기 (1): 센토사 아일랜드

by 윤현희

리사와 나는 아이들이 사이클 경주를 벌이는 어느 봄날의 금요일 밤, 벨로드롬 잔디밭에서 해를 등지고 서서 첫인사를 나누었다. 리사는 아들이 셋인데, 그중 첫째와 셋째는 사이클을 탄다. 많고 많은 부모들 중에 그녀와 특별히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그녀가 캐네디언이고 캐네디언의 미덕을 아주 잘 갖춘 사람이기 때문에 엄마에게 꼭 소개를 해주고 싶었다는 아들 녀석의 부탁 때문이었다. 과연 그랬다. 그녀와는 아주 익숙한, 그러나 오래 전의 기억과 느낌이었던 캐네디언 특유의 열린 친화성과 적절한 세련됨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날씬하고 키카 큰 그녀는 퀸즈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퀸즈는 이민자들의 문화적응 과정 모델을 제시했던 저명한 심리학자 존 베리가 가르치던 학교였고, 또 캐나다에서의 내 슈퍼바이져였던 파멜라 비하리 여사의 모교이기도 했기에, 퀸즈 동문이라는 리사에 대한 호감도는 좀 더 높아졌다. (비하리 여사는 영국계의 백인이었지만, 그녀의 라스트 네임은 인도계인 남편으로부터 왔다. 리자로 끝나는 인도계 이름을 처음 대한 것은 파멜라 비하리 여사로 부터였는데, 이후로 미트라 골나라기, 줌파 라히리, 폴 칼라하리 등 리자로 끝나는 유명한 인도계 작가들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네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진작에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더라면 어렸을 때 즐겨했던 리자로 끝나는 말은 끝말잇기가 무척 쉬웠을 텐데... 리사는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카운티의 공중보건과 관련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각각 열일곱 살과 열한 살 난 그녀의 첫째와 셋째 아들들 역시 캐네디언의 사랑스러움을 고스란히 얼굴에 내비치는 귀티 나는 아이들이다. 첫째는 싱가포르에서, 둘째는 캘리포니아에서, 셋째는 다시 싱가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는 묻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는 스스로 먼저 내게 그 사실을 알려 줌으로써 또 한 번 internationally traveled를 대하는 케네디언의 가치를 드러내 보였다.



여름휴가철을 향해가고 있던 그 날은 서로의 휴가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여름마다 휴런호 남쪽의 죠지안 베이에 있는 자신의 카티지로 귀향을 한다고 했다. 죠지안 베이에 즐비한 무스코카 커티지 중 하나가 리사네 여름집이라니...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도 여름마다 무스코카 스타일의 카티지로 귀향을 하는데, 그 카티지는 죠지안 베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리산 속에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마쳤을 때, 우리는 한참을 깔깔깔 웃었다. 무스코카 스타일의 커티지가 태평양 건너 아시아 동쪽 끝 어느 산 중에 있다니... 어째 그런 일이. 이번 휴가와 관련한 또 하나의 공통점이 찾아졌다. 우리의 귀국 날짜가 정해졌을 때, 올 해는 싱가폴을 경유해서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잡았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그 동선 역시 리사네와 흡사했다. 그들은 싱가폴을 경유해서 베트남에 가서 일주일쯤 지내다가 다시 싱가폴에서 미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를 탈 것이라 했다. 한 주일의 시간 차를 두고 그녀의 가족과 내 가족은 같은 요일, 같은 비행 편으로 싱가폴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리사네 가족에게는 10년 만의 홈 커밍 여행인 셈이었고, 우리에게는 초행의 싱가폴인 셈이었다.


우리가 이용할 비행 편은 열 두시를 조금 지난 새벽에 싱가폴에 도착할 예정이었기에, 리사가 우버가 아닌, 일반 택시를 잡을 수 있는 앱을 미리 내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막상 창이 공항을 빠져나왔을 때, 너무나 질서 정연하게 택시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방금 입국장을 빠져나온 승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한 줄을 서서 택시를 기다리게 되어있었다. 결국 택시를 호출하는 앱은 전화기에서 지워졌다.


시간대를 의심게 하던, 믿을 수 없이 낡아빠지고 냄새나던 홍콩의 빨간 택시와는 달리, 싱가폴의 야간 택시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는 점과 기사분이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택시처럼 편안했다. 싱가폴 남서쪽 끝에 위치한 센토사 섬의 리조트까지는 삼십 분 정도 소요가 되었다. 뉴욕만큼 번화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대도시 중심가와 큰 차이 없어 보이는 시내를 관통할 때, 심야의 대기는 맑았고, 건물들이 내뿜는 불빛 또한 영롱해 보였다. 예술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도로변의 모든 그로브 트리들은 공항에서부터 보이던 수퍼트리 그로브와 닮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싱가폴의 시각적 이미지를 30분 이내에 방문객들에게 심어주는, 통일성 있는 디자인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섬 안으로 들어서자 차양 벽처럼 길의 좌우를 둘러싼 숲 깊이 이어졌고, 그 길은 무척 안전하고 손길이 많이 간듯했지만,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무성했다. 오래전에 익숙했던 바다의 냄새와 습기가 차 안으로 스며들어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숲길을 빠져나와 밤에 당도한 거대한 리조트 호텔의 로비는 정면이 아니라 건물의 뒷면을 향해 입구가 나 있었고, 1층이 아니라 4층쯤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들어오는 게스트는 우리뿐이었고, 은은한 등을 밝힌 텅 빈 호텔의 로비는 해무에 감싸인 듯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했다. 10층을 배정받아 엘리베이터를 타러 건물의 우편으로 꺾어 들었을 때, 밤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수평선 가득 늘어선 불빛들은 정박 중인 선박들이 밤이 되어 깨어 있는 중임을 알리는 듯했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하이틴이나 된 지금에도 여행에 있어 아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은 호텔 수영장에서 텀벙거릴 때다. 어려서의 원초적 즐거움이 깊이 각인된 것인지, 작년의 홍콩 여행에서도 우리가 묵었던 조그마한 부틱 호텔의 수영장을 원 없이 즐겨주었다. 해서 올해도 수영장 중심으로 호텔을 골라보았으나, 이제는 호텔 수영장은 졸업한 듯했다.






남중국해를 전경으로 바라보며 하와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샹그리라 호텔에서는 하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해수와 수영장의 담수를 모두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리조트에 속한 널찍한 수영장은 무척이나 깨끗하고 맑았으나, 호놀룰루 해변을 연상하게 했던 센토사의 남중국해를 면한 해변은 실제로는 감상용이었던 것이다. 파도가 심하고 탁한 바닷물에서는 항구의 냄새가 났다. 물에 들어갈 엄두는 감히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조식 뷔페로 향하는 계단에는 정말로 공작새들이 한가롭게 뒤뚱거리고 있었다. 마치 북미 대륙의 도로 곳곳을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 거위나 사슴과도 같은 자태로.. 호텔의 앞마당뿐만 아니라 긴 산책로에서도 화려한 깃털을 우아하게 걸친 공작새들은 우리를 마주쳐도 놀라는 기색도 없이 동네의 골목대장 역할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이 구석에서 저 구석까지 구역 정리를 하고 있었다. 덥고 습한 지역에서 야생식물들은 통제불능의 속도로 마주 공간을 잠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그마한 녹지라도 인간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기에, 매우 인공적이었지만 깔끔히 정돈된 센토사 섬은 싱가폴 사람들의 자연 극복을 향한 의지의 표상처럼 느껴졌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흠뻑 젖은 습기를 아이들은 묵묵히 헤치고 산책을 했지만, 조금만 덜 습했더라면 매우 상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섬의 전경을 둘러본 아이들은 의외로 덤덤했다. 하와이처럼 만들려고 애를 쓴 것은 알겠는데, 하와이처럼 상쾌하지는 않고.... 그렇담 싱가폴스러움은 어떤 것이냐는 참 어려운 질문을 했다. 가로수로 서 있는 나무에서 떨어진, 이름을 외우기가 어려운 매우 낯이 익은 꽃은 하와이의 주화이기도 했다. 도로에 툭 떨어져 누운 상처 없는 깨끗한 꽃잎이 아까워서 줏어다가 커피용 머그에 물을 붓고 담아두었다. 이 동네 골목대장인 공작새 모양이 케익 상자와 함께 탁자 위에 얹어 소박한 센터피스를 만들어 두었다.




리조트가 운집해 있는 해변에는 짚라인이며 로지며 여러 가지 액티비티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높은 곳에서 카트를 타고 굽이진 길을 내려오는 로지를 두 번 타겠다고 했는데,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찌는 것 같기도 한 야외의 햇살 아래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저런 액티비티를 즐기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실내에 들어가 시원한 공기를 즐기게 하는 것이 나을지.... 다행히 남자아이들이라 열기와 지루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했고, 나는 계속 전화로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가까이 있는 팥빙수 가게에 들어가 천정에서 쏟아지는 얼음가루를 보면서 에어컨을 즐겼다. 그곳에서도 한국 팥빙수 가게가 성업 중이라니 또다시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잠시 헷갈렸다.


센토사는 말하자면 부산의 영도 같은 입지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섬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가 지불되었다. 그리고 섬 안에서의 이동은 몇 가지 노선의 트램과 순환 버스로 가능한데 트램은 섬의 내부의 몇 군데 중심지역을 연결하고 외부까지도 나가는데 비용을 따로 지불하지는 않았다. 버스를 갈아타면서 섬을 모두 돌아볼 수 있었고, 트램을 타고 섬 밖으로 나가서 매트로 교통 환승을 겸한 쇼핑 구역인 비보시티에서 전철이나 버스, 택시를 이용해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물가가 비싼 시간 비싼 장소만 다녀서 그랬던지, 싱가폴의 물가는 꽤나 비쌌고 히든 코스트가 상당했다. 이를 테면, 자정이 지난 시간의 택시 이용에는 심야 비용이 붙는다던가, 러시아워의 택시비용에는 러시 아워 차지를 따로 붙인가든가 하는... 또한 호텔과 가장 번화한 쇼핑몰 안에서는 세금에 더해 소셜 서비스 차지가 더 붙는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고비율의 숨은 비용의 전부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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