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神)으로 세상의 중심 수미산의 궁전에 살고 있다. 그 궁전의 천정은 그물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그물코마다 구슬들이 매달려 서로를 비춘다. 구슬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개개의 존재를 은유하는 것인데, 구슬들은 인연이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구슬은 하나의 코에 하나씩 달려 있지만, 그 속에 여러 개의 구슬은 서로를 비춘다. 하나의 구슬이 변하면 다른 구슬에 비친 모습도 변할 뿐 아니라 다른 구슬의 모습도 변해 보이게 된다. 그러니 하나의 구슬에 맺힌 상은 그 구슬의 것이지만, 그 구슬의 것이 아니고 주변 구슬의 모습인 것이다. 화엄사상이 보는 세상의 모습은 우리 모두가 자연과 세상의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개인 간의 상호작용과 의존을 통해 존재하고 있다. 재고의 여지가 없는 말인데, 그 관계에 대한 인드라망의 구슬은 참 예술적인 은유다.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중국 학자 티모시 브룩 Thimothy Brook은 <베르메르의 모자>라는 저서에서 과학과 기술혁명이 진행되던 17세기 대항해 시대 네덜란네덜란드의 대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 지도, 구, 망원경과 현미경에 반영된 인드라망, 즉 세계의 연결성을 주목한다. 베르메르는 차분한 햇살이 드는 실내의 창가에서 일어나는 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렸다. 델프트를 떠나 본 적이 없는 베르메르의 세상은 그의 작업실 실내의 창가, 벽과 벽이 만나는 귀퉁이에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세상의 귀퉁이 앉아 대항해 시대를 선도한 네덜란드의 전 지구적 연결성을 그림으로 증언한다. 중국, 캐나다,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개인들의 근대적 자아가 발현하는 공간이기도 했던, 베르메르의 귀퉁이에 등장하며 지구 반대편의 상황을 전한다.
17세기에 베르메르가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설치 미술가인 인도계 영국 작가 아니쉬 카푸어가 있다. 베르메르는 무역을 통한 전지구의 구체적인 연결성 그려낸 반면, 아니쉬 카푸어의 설치미술은 존재론적이다. 그가 스테일레스 스틸로 만들에 세상 곳곳에 설치한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와 한국의 리움 미술관, 그리고 우리 동네 미술관에도 하나 있다. ) 다양한 형태의 구슬이 인드라망이라는 은유를 입체적이고 가시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예술의 해석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므로, 서울과 시카고, 그리고 우리 동네 미술관에도 설치된 그의 작품들을 감상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리움 미술관에 설치된 "천 개의 눈"이라는 이름의 구슬 탑과 맞은편에 설치된 하늘을 담고 있는 거대한 원형 거울은 댓구를 이룬다. 아니쉬 카푸어에 대한 어떠한 배경지식도 없던 당시의 나에게 그의 작품 두 개는 세상과 존재의 양태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마구 던져 주었다. 객관이란 존재하는가? 진실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가?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달리보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도 가능하겠다.
수직 기둥으로 쌓인 천 개의 눈을 가진 구슬 탑은 나를 비추고, 내가 속해 있는 환경을 비추고 있었지만 천 개의 구슬의 높이와 각도가 모두 달랐으므로 구슬에 반영된 나의 모습은 하나도 같은 것은 없었다. 수직으로 쌓아놓은 그 반짝이는 구슬 탑의 조형미도 아름다웠지만, 구슬에 반영된 나의 모습과 주변 환경의 변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관찰하고 있어도 싫증 나지 않았다. 그 맞은편에 위치한 오목한 거울은 평면적이고 심플한 조형미를 발산하며 맑은 하늘 위를 바람처럼 떠가는 구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인드라망은 은유이지만, 심리학으로 이야기를 옮겨오면, 아니쉬 카푸어가 조형 학적으로 구현한 세상을 비추는 천 개의 눈은 실은 우리의 두뇌 속에도 존재한다. 거울세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경기제다. 1980년대와 90년대 이탈리아의 신경과학 연구자인 지아코모 리졸라티 Giacomo Rizzolatti 마카카 원숭이의 행동 관찰을 통해, 인간과 영장류의 동물들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는 동안 뇌 속에서 자신이 직접 행동하고 느끼는 것과 같은 시뮬레이션이 일어나고 있음을 뇌영상 연구를 통해 알아냈다. 원숭이의 뇌 세포의 10% 정도가 거울 기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사람들은 훨씬 광범위한 영역의 뇌 세포가 거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발레리아 카졸라 valeria Gazzola와 Christian Keyser 크리스티안 카이저 같은 신경과학자들은 타인의 사회적 행동과 의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체성감각계와 운동신경계의 활동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고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피아노 연주나, 테니스 경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거나 관찰하는 동안 실제로 피아노 연주와 관련된 체성감각과 운동신경계 뉴런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머리속애서 일어나는 거울 뉴런의 시뮬레이션 기능, 즉 간접 경험을 통해 타인을 생각과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공감 뉴런의 작용과 동물의 정서적 행동에 관한 연구 결과들이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인간과 몇몇 고등 동물들은 '논리와 사고력'이 발달되기 이전에 '타인을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 이 가능함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타인의 사회적 행동을 지각하는 데 있어 "신체 감각신경계"의 활성화를 통한 "거울 뉴런"의 작용이 결정적임을 밝힌 결과들은,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논리적 사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성 중심주의를 재고해 보게 한다. 신경심리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이 같은 연구들의 축적된 결과를 토대로 데카르트의 오류라는 저술을 통해 심신 이원론, 혹은 인지주의에 반기를 든다. 논리적 이성은 신체적 감각, 느낌, 정서와 별개로 자율적 힘을 가진다는 데카르트적 사고에 반대하는 다마지오는 결국 인간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힘은 생존본능이며 생존의 안정성이 확보되었을 때, 좀 더 나은 상태를 향한 발전적 동력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그 발로는 신체의 감각 기관을 통해 유입되는 다양한 양태의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느낌 (예를 들면 온도의 감지, 통증의 감지는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생명유지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체성감각계에 유입된 정보를 통해 유발된 "느낌")이다. "느낌"은 생존과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며 이로부터 나아가 다양하고 섬세한 감정의 레퍼토리가 형성되며, 감정은 '문화'와 '이성의 작용'을 창출하는 토대가 된다. 쾌와 불쾌, 통증과 즐거움은 유기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느낌이며, 문화는 본질적으로 쾌와 불쾌,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만끽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안정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과 지향의 축적된 산물이다. 신경과 의사이기도 한 다마지오는 서구 문화가 왜 그토록 쾌락을 추구하는 약물에 취약한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살아남아서 번영하는 일이며,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타인들의 느낌을 탐색하고 감정을 교류하여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서 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 머릿속에는 타인과 상대방을 비추는 거울 기능을 하는 세포들의 연합체인 뉴런 회로, 즉 인드라의 망이 들어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맥락에서 인드라망을 해석할 수 있다. 윌리엄 페어베언, 하인츠 코후트, 도널드 위니콧 같은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개인의 정신과 자아 발달에서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상관계 이론가들이라 불리는 이들은 “유대감을 원하는 생물학적인 욕구”는 감정의 영역에 속하며, 영아나 유아의 생득적인 자기 보존 수단이자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중요한 타인을 ‘자기 대상(self object)’이라고 부르는데, 유아의 자기 대상은 부모나 가족, 중요한 보호자들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대상 관계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을 통해서 향후의 대인관계들에 대한 정신적인 표상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정신적인 표상은 대인관계에 대한 기대와 예상, 관계 속에서의 자기를 인식하는데 레퍼런스가 되고, 자아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유아가 자기 대상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이 부족할 경우는 파괴적 충동으로 귀결되기 쉽다. 유아에게 필요한 공감이 결핍되고 욕구좌절을 경험한 결과, 아동은 강한 자기주장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이는 부정적인 충동이라기보다는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본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본능적인 공격성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인간 존재 조건과 관계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인 인드라망이라는 화엄사상이 꼭 불교에 국한된 생각만은 아니었고, 현대의 최첨단 신경과학 연구들은 우리의 뇌 속에 들어있는 인드라망의 생물학적 실체를 증거 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에서 대항해 시대의 세계의 유기적 관계성, 인드라망을 유추해낸 캐나다의 역사 학자 티모시 브룩은, 존 던의 시의 첫 문장 No man is an island을 인용하며 책을 맺는다. 인간 존재 조건과 관계의 역동성에 대한 은유를 내포한 인드라망의 화엄사상이 꼭 불교에 국한된 생각만은 아니었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은 죽음에 이르는 열병을 앓는 와중에 "병의 단계마다 드리는 기도”(1924)라는 산문집을 저술했다. No man is an island로 시작하는 17장은 잘 알려져 있다. 마지막 구절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제목으로 헤밍웨이가 소설에 차용했고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