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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Mar 13. 2020

시간을 되감기-back to square 1

결국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다음 주에 시작되는 봄 방학 이후 학생들에게 캠퍼스로 돌아오지 말라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으로 학기를 마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매우 미국스러운 선제적 방어조치에 마음은 안정을 되찾고 봄에서 여름 사이의 시간을 계획한다. 덕분에 아이들을 대학 보내고 잠시 자유를 누렸던 엄마들의 느긋한 일상은 다시 원위치로 back to square one with both kids at home. 그럴 생각은 아니었건만,  아침에는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여 단단한 야채를 죄다 피클을 만들고 있었다. 긴 시간을 준비하는 무의식의 발로였던 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 시기가 생각보다 일찍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샘솟았다.


스페니쉬 플루 이후 100년 만에 돌아온 전 지구적인 유행병은 순식간에 지구를 삼키고 마치 진행 중인 영화를 되감기 fast backward 하듯이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주가를 일 년 전의 시점으로 되돌리고, 유가는 최저점을 갱신하고, 스포츠 경기장과 콘서트 홀에 운집한 관객들의 광기도 잠시 소강상태로 돌리고, 집을 떠났던 아이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신기를 연출하고 있다. 너무 가까워진 지구촌의 거리도 환기하고, 너무 시끄러운 소음도 잠시 묻어두고 강제적 소강상태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 트험프가 예고도 없이 앞으로 한달간 유럽의 미국입국 금지를 명한 와중에 제발 비행기 좀 그만 타라던 환경 소녀 그레타 툰베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 소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접어두고 그냥 궁금해졌다.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온타리오에 있는 친구 Cheryl 이 자기가 영상에 나왔다며 스키 클럽의 광고 동영상을 전송해 온 것은, 트뤼도 수상이 직접 쓴 자기 부인 소피 여사가 영국 다녀온 후 고열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는 공고를 읽고 있던 때였다. 여전히 겨울왕국인 단풍 나라 스키장에서 친구는 여전한 금발의 웨이브를 늘어뜨리고 16년의 세월을 비켜간 듯한 어제의 그 얼굴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바이러스 걱정 없는 밝은 미소가 무척 반가웠다. 스키장은 캐나다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 옛날, 워털루에서 청소년 그룹치료를 함께하던 동료였던 타라 역시 금요일이면 밤을 달려 죠지 안 베이의 블루 마운틴 스키장으로 향했다가 월요일 새벽에 돌아오곤 했던 것을 기억한다. 셔릴의 아들 제인도 고등학교 때 블루 마운틴에서 스키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녀와 나의 아이들은 워털루 대학의 심리학에 속한 유치원을 다녔고,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으니 우리가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꽤 오래 묵은 인연이다. 심리학과의 특성상 모든 교실에는 oneway mirror가 달린 관찰방이 있었다. 교육대학 소속도 아니고 심리학과 소속인 유치원이라 아기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던 유별난 유치원이었다. 선생님들이 노련한 천사들이었고, 모든 아이들에게 보조 천사들이 한 명씩 따라다니던 재미있는 유치원이었다. 첫 아이를 학교에 보낸 처지라 우리들은 관찰 방에 앉아 마음을 졸이기도 하며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관찰하며 아침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녀와는 전공이 같았다는 공통점도 있었지만, 냉소적인 농담을 마음 놓고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여서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녀는 캐나다인이지만 꽤나 화려한 스타일이라 오히려 텍사스 여인들의 블링블링 스타일과 더 잘 어울렸다. 휴스턴에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본인도 마침내 고향에 제자리를 찾아온 것 같다고 웃으며 휴스턴이야말로 자기 스타일의 도시라던 기억이 어제 같다. 그때는 우리가 서른몇 살이었다. 그녀의 나머지 이름이 bourne franzen이었던 덕분에 나는 franzen, mortensen 같은 북구의 라스트 네임이 친근하다.


매우 독특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감각을 갖고 있던 그녀는 부업으로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기도 했었다. 텍사스의 주택들도 크고 다채롭고 화려하지만 대개는 단정해서 따라 하기가 쉬운데, 셔릴의 실내장식은 따라 하기 힘든 복잡성을 갖고 있었지만 세련되었다. 다이닝의 붉은 벽과, 거실에 우아하게 놓여있던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체이스, 복층 키친의 체크무늬 타일, 등산을 해야 할 만큼 높았던 침대의 강렬한 인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장난꾸러기였던 아들은 제인은 사립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각종 수상으로 지역 미디어에 유명세를 무척 탔는데, 그 정점은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국가로부터 받은 전액 장학금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그 모든 노력과 헌신의 귀결은 아들을 일 년에 한 달도 채 볼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게 왜 밴쿠버로 보냈니.... 가까운 데로 보내지 않고. 이 바이러스 폭풍이 지나고 나면 외로운 친구를 위로하러 발걸음을 한 번쯤 할지도 모르겠다.


1월에 뉴욕을 다녀오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너는 뉴욕엔 꼬박꼬박 가면서 그리운 온타리오에는 왜 가지 않는 거지?' 뉴욕엔 친구들도 가까이에 모여 있으니 만나기가 용이하고, 밤엔 같이 오페라도, 재즈도, 뮤지컬도 볼 수 있으니까.... 캐나다에서는 애기들 우느라 친구들과 놀아본 경험이 없어서, 그곳은 생활의 현장이었기에 놀러 간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고착된 마인드 셋을 가지고 있는 거다. 미국 생활 첫 10년은 숨쉬기조차 바빠서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고, 그 와중에 여권 갱신하러 한번 올라갔었을 때는 다시 미국으로 발걸음을 돌리기가 힘들었던 기억. 일주일을 예약했던 호텔에선 정작 하루밖에 묵을 수 없었던 것은 중국, 캐나다, 일본이 고향인 친구들이 앞다투어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보지 못한 시간이 오래 흘렀음에도 그들과는 친구 이상의 정이 쌓여 있었다. 친구들은 너무나 바쁜 생활인들이었고 먼동이 트는 시간에 내 손에 열쇠를 쥐어주고는 새벽같이 출근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저녁에 퇴근 후에 다시 만났지만, 또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친구들에게 함께 놀자거나 방문객 행세를 하기는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육아가 종료된 이제는 뉴욕이나 토론토나, 버펄로 모두 세 시간 비행이면 닿는 거리다. 세상은 넓고 국경은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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