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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Apr 26. 2020

토네이도와 헤일 (hail)의 시간


순식간에 대기는 달아올라 오늘 오후의 실외 온도는 80 farenheit (약 26도).  자동차의 실내에선 92 Fahrenheit. 현관 문을 열고 발을 내디디는 순간 신록으로 변해버린 풍경이 살짝 낯설다. 두 주 전의 초록은 어디로가버린 건지... 토네이도가 멕시코만과 루이지애나에 터치다운하는 흔치 않은 일이 발생하는 동안 4월은 중순을 지나 순식간에 5월을 향해 치닫는다. 대기의 회오리가 지상의 것들을 잠시 공기중으로 빨아들였다가 지상으로 훅 내뱉는 신경질을 부리는 동안 그 회오리에 휘말린 것은 뜻밖에도 내 머리였다. 검은 하늘이 지상을 삼킬듯 머리 위로 내려 앉는 영화같은 비쥬얼 이펙트와 함께 하늘로부터 골프공같은 얼음덩어리가 연 이틀 쏟아졌다. 그러나 그렇게 겁만 잔뜩 준 토네이도는 큰 피해는 남기지 않았고 물러났다. 검은 하늘이 낮게 가라앉기 시작하던 지난 주의 어느 밤부터 천정이 빙글 빙글 돌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엔 밤새 놀이기구를 탄 듯 뱅글뱅글 빠른 속도로 돌았다. 토네이도와 싸움이라도 하듯 머리를 빳빳하게 들고 미동없이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서 한 가지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머리를 움직이면 나는 즉각 토네이토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기압변화와 대기 중의 산소 포화도가 내 어지러움증과 깊은 상관이 있을거란 믿음을 굳혀갈 때쯤, 멀리 계신 닥터는 그것이 다 너의 나이 탓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전했다. 1월에 뉴욕에서 재회했던 친구와는 시간차를 두고 겪는 여러가지 증상이 비슷하여 우리 혹시...? 하는 의심이 조용히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나는 여전히 커피를 좋아하고 맛과 향기를 식별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credit khou

어쩌면 기나긴 탈고의 시간이 가져다준 반갑지 않은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이긴 하지만,  원고를 고쳐쓰다보면, 보고 보고 또 보다보면 의미는 미분되고 기호의 장황한 나열만 남는다. 너덜너덜해진 텍스트를 노려보다보면, 이 의미없는 것을 쓰레기 통에 던져넣을 것인가, 모른척 하고 약속을 지킬것인가 갈등의 수렁은 어김없이 발목을 잡는다. 그 갈등의 시간은 학술서든 대중서든 장르를 비켜가지 않았고 여전히 앞을 막아 선다. 석사 논문을 마쳤던 그때에도 우린 자기 논문의 첫단어만 들어도 우엑 우엑 울렁증을 토로하곤 했었다. 그것은 외국어로 박사 논문과 학술지의 챕터 몇 장을 마치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다시 돌아와 우리말로 대중서를 쓰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우엑.... 예전에 대학 선배는 나를 향해 관성과 타성에 길들여지지 않는 이상한 아이라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한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면 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것 같기도 하다. 수렁에 빠지지 않고 살아남아 한권의 책이 완성되고 나면, 갈등의 시간들은 어느 사이엔가 망각의 골짜기에 던져지고, 사방에 널린 점들은 어느 순간 또다시 예쁜 패턴의 거미줄을 만들어 정신을 꼼짝없이 사로잡아 버린다. 자다가 일어나 거미줄을 종이 위에 옮겨 놓고 또 다른 시작.... 생각의 거미줄을 만들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시간의 즐거움은 언제나 원고를 고쳐쓰는 시간의 심리적 구토감을 이겨냈던 거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고백은 그래서 반가웠다. 원고를 시작하기 전에 지인들에게 알린다고.....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자기 원고가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걸 막아줄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던. 하지만 또 세월이 가져다 주는 미덕은 민망함 앞에서 덤덤한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는 사이 초록은 신록으로 변하고 4월은 5월에 바톤을 넘기고 있다.


텅빈 집 앞의 거리에선 뭔지 모를 분주한 기운이 느껴진다.고요한 주택가의 인적없는 거리와 나무 위로는 조용히 햇살만 잔뜩 쏟아지는데, 대기중에 가득한 이 분주한 기운의 정체는 무얼까....? 한참만에 깨달은 그 분주함을 정체는 말하자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의 표면 아래서는 굉장히 빨라진 속도로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나무의 튼튼한 줄기속에서는 체관과 물관을 따라 무기질의 통행량이 엄청나게 증가되고 있는 현상 같은것이 아니었을 까.  미시세계에서는 여전히 많은 생산적인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이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생장의 활기가 텅빈 오후의 거리에 분주함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미시세계에서 벌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던 오후란 즐거움이다.





이틀전 카운티에서는 외출시 마스크 강제 착용령이 떨어졌고 위반시에는 1000불의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이 모든 개인들에게 고지되었다. 반다나를 바나나로 표기하는 유머 감각은 덤으로 곁들여..... 로컬 교회들에서는 굳이 바나나를 얼굴에 쓸 필요는 없고 차라리 공짜 마스크를 받으러 오라는 공고를 내기도 했다. 일부 요식업자들과 경찰들은 이 법령이 헌법위반이라는 생각으로 카운티의 방침에 대해 태업을 하겠다는, 그러니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을 적발하거나 벌금을 부과하는 짓은 하지않겠다는 의지를 슬그머니 내비치기도 했다. 이 동네에선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방침이 이렇게 정해지자 고등학생의 학부모인 나는 별안간 전투력이 발동했다. 10년 이상 잠자고 있던 퀼트상자를 열어 홈메이드 핸드 메이드 마스크를 만들기로 했다.


지난 2월, 미국에서 생산된 모든 마스크가 캘리포니아의 웨어하우스로 향한다는 사실을 동네 약국에서 확인 한 이후, 마스크에 관해서는 일체의 신경을 끄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간 천문학적 숫자의 마스크들의 최종 종착지는 그 나라라는 사실은 한참 후에 알았다. 그간 그로서리를 갈 때 말고는 마스크를 사용할 일이 없기도 했다. 전국민적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서재로 칼출근 칼퇴근을 하는 남편은 온 집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화상미팅을 이어가며 근무를 마친 후에는, 온 집안의 스탠드. 청소기, 애스프레소 머신, 세탁기며 에어컨의 컨트롤 패널까지 모든 전기기구들을 아이패드와 각자의 전화기 속으로 연결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 내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을 서재에 앉아 원격으로 조정하며 원하지 않는 light show를 벌이면서 혼자 재미있어 뿌듯해 하거나, 식료품을 사러 나가서는 집안의 청소기를 원격으로 작동시키곤 전화를 걸어 확인하며 웃곤 했다. 작은 녀석은 내게 와서 아빠가 아무때나 자꾸 자기 스탠드 불빛을 색을 바꾼다고... 좀 말려달라고 조용히 하소연을 하고 갔다. 온 집안의 전기 선을 뜯어 고치고 새로 연결하다가 차고에서 언젠가 사둔 3m 산업용 마스크 20개 짜리 한 박스를 발견한 것은 보너스 였다. 그래도 가택연금 상황에서 마스크를 쓸 일은 별로 없어서 개수는 줄어들지 않고 유지됐다.


마스크 패턴을 검색해서 입체 재단할 수 있는 본을 출력했다. 처음 두개를 손바느질로 만들어 보니 얼굴 전체를 다 감쌀 수 있고 코부분도 밀착되어 모자를 깊이 눌러썼을 때처럼 포근한 기분도 들었다. 부드러운 퀼트천이 얼굴을 감싸는 기분이 좋은지 고등학생은 집안에서도 하루종일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고 또 스페어 마스크의 문양은 무엇으로 할까 궁리하며 손바느질에 정신없는 엄마를 기웃기웃 들여다 보곤 했다. 대학생 아들은 물고기 문양의 마스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다음엔 ladybug이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사두었던 천들인데 물고기와 무당벌레가 아직도 하이틴의 사내아이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반갑다. 만들어 놓은 나의 마스크 편대는 혼자서도 모양을 유지하며 잘 서 있다. 행주감으로 사용되는지 독일산 부직포를 필터로 넣고 재봉틀로 네개를 더 만들었다. 장기화된 대기오염에 바이러스 대전쟁이 가져온 대세는 마스크 패션.... 여러개 만들어서 한국 갈 때 선물도 하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씩 누가 옆에서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할 땐 아이패드에 작은 나무를 잔뜩 그려놓는 것도 좋은 해소방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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