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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Apr 20. 2020

자이로소피 — 나무학

feat 앞머리에 뱅을 넣은 망아지




최근에 새로 발견한 산책로에는 어느 설계자의 선택이었던지 다채롭고 어린 활엽수와 향기로운 덩굴 식물들을 많이 심어 놓았다. 잊고 있던 숲의 향기를 만난다. 꽃 덩굴과 나무가 어우러져 진한 향기를 내뿜는 이른 아침의 산책이 이 오솔길에는 어울린다, 기나긴 호수를 지나고 나면 트리하우스 공원이 나오는데, 거대한 참나무 위에 집채가 하나 올라가 있다. 제대로 된 트리 하우스인데 가끔 가보면 비어있고 인적이 드물어 좋다. 새로 발견한 산책로는 트리 하우스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좁고 하얀 포장도로가 길게 굽이쳐 뻗어있다. 산책로 양 옆으로는 아직 어린 나무들이 서 있어서 부드러운 잎을 매우 가까이서 볼 수 있다.

4월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동안 부드러운 나무의 새로 난 어린 잎새들은 꽃만큼이나 예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봄이 긴 올해는 나무 가지 끝에 돋아난 새순의 붉은색이 채 가시지 않아 마치 나무가 붉은 꽃송이를 달고 있는 듯 어여쁘다. 나무의 정수리에 돋아난 붉은 새잎은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작은 새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름을 모르는 나무들을 지나칠 때마다 빚진 기분이 들곤 했는데, 어제는 그 모든 식물들의 이름을 알게 되어 그간 진 마음의 빚을 다 갚았다. 식물의 사진을 찍으면 바로 이름을 알려주는 어플리케이션을 들고 모든 나무와 덩쿨앞으로 가 이름을 물었다. 스무 개의 나무와 꽃들과 통성명을 했고, 오늘 아침엔 마주치는 나무마다 이름을 불러줄 수 있어서 홀가분했다. 미국 소설에 자주 나오는 향기 높은 인동덩굴의 정체는 허니 서클이었고 잔잔한 레이스같은 꽃송이를 잔뜩 단 dogwood는 산딸나무였고, 새순의 잎사귀가 라임그린과 오렌지를 섞은듯한 타원형을 가진 예쁜 나무는 elm... 느릅나무였다. 집 앞 현관 화단에 삐죽난 길고 딱딱하고 가는 관목은 뜻밖에도 봄이면 여린 꽃잎을 피워 올리는데 이름이 fortnight lily. 이주 (14일) 릴리 라니... 가끔 자전거를 타고 공기를 쐬러 나온 사람들은 따르릉따르릉 벨을 울리며 “넌 안전해 다치게 하지 않아”  신호를 보냈고, 가끔 조깅을 하는 젊은이들이 눈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산책에서 돌아와 펼쳐 든 짧은 산문에서 프랑스 소설가 미셸 트루니에가 만든  xylosophie라는 단어를 마주쳤다. 오늘을 위한 작은 선물이다. 프랑스의 노작가는 세상의 온갖 단어를 모아서 사유의 그물을 엮고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으로 모자라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나무를 뜻하는 xylo와 학문을 뜻하는 sophie를 합쳐서 발음도 단어의 형상도 예쁜 xylosophie 나무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뿌듯해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년의 상상력을 가졌던 소설가가 쓴 산문집이 읽고 싶어 졌다. Xylology라는 단어가 —logy가 붙어 과학을 의미한다면 xylosophie는  (—sophie (sophy)는 문학적 철학을 가진 단어다. 자이롤로지가 석가탑이면 자이로소피는 다보탑에 가깝다.




겨울이 일년의 절반인 추운곳에 살다가 위도 30도가 채 안 되는 이 동네에 처음 내려왔을 땐, 동네의 산책길에서 만날 수 있는 나무의 종류는 전나무와 참나무를 기본으로 하는 침엽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일 년의 반이 여름인 기후에서 나뭇잎은 몸의 면적을 뾰족하게 좁힘으로써 무성 해지는 전략을 택했고, 잎새들은 큐티클층을 두껍고 딱딱하게 만들어 열기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다. 가장자리가 엉성한 톱니처럼 생긴 비교적 넓고 긴 잎을 가진 참나무도 있지만 어쩐 일인지 주택가에 심긴 참나무의 수종은 모두 작은 유선형의 딱딱한 잎을 가진 생참나무? (라이브 오크)가 대부분이었다. 삼각형의 실루엣을 가진  소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의 대칭성은 시각적 안정감을 주긴 했지만 잎이라기에도 쑥스러운 마구 돋아난  침 같은 솔잎들은 다소 폭력적으로 촉각을 자극했다. 나는 흐늘거리고 대책 없이 길게 올라가는 포퓰러나무나 자작나무처럼 동그란 예쁜 잎을 가진 나무가 좋았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처럼 숲 속을 찾아들던 시간은 고향처럼 편안했다. 늠름한 둥치가 하늘 가까이 닿은 나무의 까마득한 정수리를 상상하면 나무에 주어진 시간의 끝이 궁금해지곤 했다. 나무의 수령을 생각하다 보면 시간의 처음과 끝이 궁금해지곤 했다. 그러다 보면 맘에 안 드는 지상의 현실들은 무게를 절반쯤 잃어버리고 가벼워졌다.


사진작가 Beth Moon은 지구의 최고령 생물체인 고대의 나무들이 몸에 세긴 시간의 초상화를 만나러 지구 끝도 마다않고 찾아다녔다. 문명으로부터 외따로 떨어졌으나 땅 속 깊은 곳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려 몸체를 키우고 잎을 피워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수천 년간이나 지속해 오고 있는 나무들의 자태는 성스럽기조차 하다. 베스 문이 예술사진의 궁극을 추구했다면, 뉴욕의 레이철 서스만은 수령이 2000년이 넘는 나무들을 찾아다녔다. 그녀가 찾아낸 존재들 중 가장 젊은 생명체는 2000살이고, 지질학적 시간을 살아낸 생명체들은 나무라기보단 유기체에 가깝다. 100년에 1cm씩 자라는 그린란드의 지의류는 최고인내심 상을 주어야 한다. 1억 8000만 년 전 지금처럼 추워지기 전의 남극에 살던 너도 밤나무는 남극 ice age를 피해 한뿌리씩 한뿌리씩 이민을 감행하기도 했다. 남극의 너도 밤나무는 최고 용맹상을 주어야 한다. 그 살아남은 너도 밤나무들은 호주의 퀸즈랜드에 서식하고 있었는데, 최근 호주 대화재때 살아남았을지....알 수가 없다. 켈리포니아에 살아있는 메타세쿼이아나 유타의 지구최장수 나무들을 만나러 떠나는 기나긴 산책을 계획해 보는 것도 좋겠다. 나무는 지구별의 최고령의 목격자였고, 현세기의 역병 사태에도 무관하게 살아남을 것이고, 또 그 아래 드러누워 존재의 시간과 소멸에 관해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지구의 진리에 관한 작은 힌트를 던져주기도 할 것이다.   

Beth Moon <portrait of time >

Standing as the earth’s largest and oldest living monuments, I believe these symbolic trees will take on a greater significance, especially at a time when our focus is directed at finding better ways to live with the environment, celebrating the wonders of nature that have survived throughout the centuries. By feeling a larger sense of time, developing a relationship with the natural world, we carry that awareness with us as it becomes a part of who we are. I cannot imagine a better way to commemorate the lives of the world’s most dramatic trees, many which are in danger of destruction, than by exhibiting their portraits. — Beth Moon

오늘 아침 산책의 으뜸 예쁜이는 ladies teadrop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묘한 빨간 꽃. 히비스커스와 매우 닮은 꽃잎을 가졌으나 꽃의 가운데 빨간 찻물이 한 방울 튀어 오른 모양으로 꽃술이 돋아나 있다. 산책을 마칠 때쯤, 이웃 농장의 말 두 마리도 만났는데, 그중 한 마리는 이마 위에서 뱅을 넣어 갈기를 손질했다. 참신한 뱅헤어를 한 말이라니...누가 그랬니 네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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