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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희 Aug 06. 2020

기억의 미래

생체적 기억과 디지털 기억의 중간쯤

테드 창은 서너 해 전 이 도시를 방문했기 때문에 내가 원했더라면 그가 하는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폴 오스터 씨가 다녀간 두어 달 후 테드 창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가 어떤 소설을 쓰는지 몰랐던 나는 그의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았고, 그가 쓴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 소설의 제목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테드 창의 이야기를 들을 절호의 기회를 아쉬워하는 맘 하나 없이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 사람이 SF 소설을 쓴다고 하고 데뷔한지도 20년이나 되었다는데, 별로 관심이 없는 장르라 여태 알지 못했다.


작년에 번역 출간된 <숨> 은 아홉 권의 단편을 묶었는데, 제목만 보아서는 과학의 전방위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작가가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니 뇌과학은 양념일 테고 시간과 우주를 넘나드는 장대한 스케일의 과학 소설을 펼칠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친절하고 친화력을 갖춘 단편들의 제목을 보면 문학적 감성과 철학까지 한 줄에 꿴듯하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데이시의 자동식 기계 보모> <상인과 연금술사> 목차만 보아서는 이 단편집은 굵직한 진주가 알알이 꿰어진 진주 목걸이다. 가장 진솔한 제목부터 시작했다.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이라니...


인간이 가진 기억의 갈래와 그것을 기록해 온 문자언어의 아름다움, 그리고 변화한 시대가 가져올 대안적인 기억을 기록하는 방법, 즉 가상이지만  예상해 볼 수 있는 디지털 기억에 관한 소고다.  인간의 기억은 내용에 따라 지식과 사회적 규범 같은 것을 학습하고 기억하는 의미 기억 semantic memory ,  개인의 경험이나 사건들에 관한 일화 기억 episodic mempory, 악기 연주나 운전, 운동 같은 신체가 기억하는 절차 기억 procedural memory의 세 가지 정도로 나뉜다. 시간에 따라서는 초 단위의 경험인 감각 기억, 분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단기 기억 working memory, 더 긴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장기기억 long term memory로도 나뉜다. 그리고 나라는 개인을 정의하는 정체성 혹은 자아는 이 모든 기억과 경험의 응집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에서 기억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문자언어의 주된 기능은 지식과 역사, 사회적 규범이나 규칙 등을 공유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 왔다. 음성언어가 유동적이고 시간 의존적인데 비해 문자언어는 시간을 초월해 전승이 가능하고 왜곡이나 오류를 배재할 수 있기 때문에 서구 문화권에서는 더 선호되어 왔다. 기억이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되는 수고로움은 지식체계와 역사, 법률, 문학 등 공동체가 공유할 가치가 있는 의미 기억에 주어져 왔다. 개인의 사적인 기억에 속하는 일화 기억 episodic memory 은 본인 스스로 기록하지 않으면, 개인의 머릿속에만 차곡차곡 쌓여있으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개인들의 사적인 기억들이 기록될 가치가 없는 것이냐.... 삶의 크고 작은 경험들은 자아가 싹터서 자라나는 자양분이다. 개인의 정체성 혹은 자아는 생애 전반의 경험에서 생겨나고, 경험의 흔적은 기억이 된다. 경험에 시간이 덧입혀지면 그것은 기억으로 남게 되고 살아남는 기억들은  감정에 의해 가중치를 부여받은 것들이다. 감정은 어떤 경험에 곱해져 그것을 더 좋은 것으로 기억되게 만들거나, 더 나빴던 것으로 기억되게 만들거나, 특정 부분을 과정 하거나 축소시키거나 때로는 장면을 뒤틀어 놓기도 한다. 기억은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화질과 선명도도 퇴색한다. 그러므로 대략 episodic memory= emotion × event ― erosion( time) 정도로 공식화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난 시절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나 가까이로는 줄리언 반스, 초창기의 홍상수 감독은 "그 사건에 관한 나의 기억과 너의 기억 사이의 거리"를 각각 문장과 화면으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무수한 사적인 기억을 토대로 산출될 수 있다. 그러나 감정과 시간에 의해 윤색되거나 퇴색되고 남은  결과가 사적인 기억이라는 것에 우리가 동의할 때, 그것이 오류와 허점 투성이고 극복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미래의 기술자들은 오류와 버그를 제거한 "오리지널 생생 사건"을 기록하는 방법을 개발하려들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가정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기술자들은 개인의 모든 인생 경험을 생생 화면의 기록으로 남기는 기술을 개발하고 싶어 할지 모르고, 그래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 자신의 망막에 과거의 일을 영화처럼 자동 투사하는 놀라운 신기술을 개발할지도 모른다.


event=event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딸인 니콜이 아직 젖먹이였을 무렵 앞으로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읽거나 쓰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음성인식이나 합성 기술의 발달로 이내 머지않아 그런 능력이 불필요해 지리라는 것이었다. (독자의 중얼 중얼: somewhat true. 오디오북의 활성화로 어린이들이 책을 듣기를 즐기고 읽으려 하지않아 문자습득 못할까 걱정하는 부모들을 봤다. 스마트폰 닥테이션 기능으로 한글 서툴은 우리 아이들도 한글 텍스트 문제없이 주고받는다) 아내와나는 그런 발상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과학이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우리 딸에게 만은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게 하자고 다짐했다. 그 글을 썼던 이와 우리 부부 모두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니콜은 이제 성인이 됐고 나 못지않게 글을 잘 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글쓰기 능력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예측했던 방식과 달리 니콜은 메시지를 구술하고 가상 비서에게 자기가 방금 한 말을 읽어 달라고 명하지 않는다. 대신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서 하위 발성 subvocalize 한다. 그러면 망막 프로젝터가 시야에 해당 문장을 보여주고 니콜은 몸짓과 안구 움직임의 조합을 이용해 그 문장을 수정한다. 실질적으로는 직접 글을 쓰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런 보조 소프트 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지금도 애용하고 있는 종류의 키보드를 건넨다면, 니콜은 지금이 문장에 포함된 많은 단어들의 철자를 제대로 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특수 상황에서 니콜의 모국어인 영어는 제2언어 비슷해진다. 말은 유창하게 할 수 있지만 글은 간신히 쓰는 외국어라고나 할까.

지난 몇십 년 동안 몇천만 명, 일부는 내 또래지만 대부분 나보다 어린-이나 되는 사용자들이 몸에 장착한 개인 카메라로 자기 삶 전체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그를 유지해 왔다. 사람들은 과거의 즐거웠던 순간을 다시 체험하거나 알레르기 반응의 원인을 추적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이유로 라이프로그를 검색하지만 그것은 이따금일 뿐이다. 검색어를 설정하고 그 결과를 추려내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라이프로그는 완벽에 가까운 앨범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냥 묻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웻스톤 사가 이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제품인 리멤의 알고리듬은 당신이 발음하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묻혀있는 건초 더미 전체를 검색해준다. 리멤은 당신이 하는 말을 모니터하고 있다가 과거의 사건들을 언급하면 시야의 좌축 하단에 해당 사건의 영상을 띄운다. 대화를 할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리멤은 당신의 하위 발성까지 모니터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내가 처음으로 갔던 사천요리 식당"이라는 글귀를 읽는다면 당신의 성대는 마치 당신이 소리 내어 읽는 것처럼 움직이고 리멤은 그것에 입각해 관련 영상을 불러낸다. 웻스톤은 리멤이 편리한 가상 조수 이상의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인간의 자연 기억을 대체해줄 도구라고 말이다.

리멤의 쉽고 빠른 기록 검색 기능은 상당히 인상적이지만 이것은 이 상품의 잠재력에 관한 웨스톤 사의 자체 평가에 비하면 수박 겉핥기 식 감상에 불과하다. 디어드라가 자기 남편이 했던 얘기들을 빠르게 검색했을 때 그녀는 리멤에게 명확한 검색어를 제시했다. 그러나 웻스톤은 사용자들이 이 신상품에 점점 더 익숙해짐에 따라 검색 자체가 일상적인 기억 행위를 대체하고 리멤은 사용자들의 사고 과정 자체에 통합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될 것이다. 무언가를 잘못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오류 정정 시스템을 갖춘 실리콘 조각에 저장된 디지털 동영상들은, 오류투성이였던 우리의 측두엽들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는 아마 20세기 초 러시아에 살던 솔로몬 셰레쎼브스키일 것이다. 그의 능력을 검사해 본 심리학자들은 그에게 일련의 단어나 숫자들을 들려주면 몇 달 심지어는 몇 년 뒤에도 그것들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탈리어를 전혀 못했음에도 그는 십오 년 전 원어로 들은 신곡의 시구를 줄줄 인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완벽한 기억력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는 것 같은 축복은 아니었다. 어떤 구절을 읽어도 너무 많은 이미지들이 떠오르는 바람에 그는 문장의 뜻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무수히 많은 구레적인 사례들을 알고 있는 탓에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따금 그는 의도적인 망각을 시도했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숫자들을 종이에 쓴 다음 태우는 방식으로. 이것은 화전을 일구듯이 마음속의 덤불을 태우려는 시도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깨끗이 용서하고 모두 잊어버려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상화된 우리의 관대한 자아에게는 그런 충고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이 두 행위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리멤이 이런 피드백 고리의 기능을 완전히 저해할 가능성이었다. 삭제 불가능한 동영상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악행의 모든 세부를 고착시켜버림으로써, 용서의 전제 조건인 기억의 연화를 원천 봉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일반적인 지식을 뜻하는 의미 기억과 개인 경험으로 이루어진 일화 기억을 구분한다. 글이 발명된 이래 우리는 의미 기억을 위해 줄곧 기술적인 보조 수단을 활용해 왔다. 처음에는 책, 그 뒤에는 검색 엔진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일화 기억에 대해 보조 수단을 채택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개인이 보유하는 일기장이나 앨범의 수는 그가 가진 보통 책의 수에 미치지 못한다. 명백한 이유는 편의성이다. 북아메리카 새들에 관한 책을 읽고 싶다면 조류학자가 쓴 책을 찾아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매일 쓴 일기를 읽고 싶다면 자기 손으로 직접 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일화 기억을 우리 정체성의 필수 요소로 여기는 까닭에, 그것을 표면화 함으로써 책장의 책이나 컴퓨터 파일과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을 꺼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황도 바야흐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 어린아이는 우리 어른들처럼 과거의 어떤 일을 생각하고 마음의 눈으로 그 광경을 보는 대신 검색어를 머릿속으로 하위 발성하고 신체의 눈으로 해당 동영상을 보게 된다. 일화적 기억은 전적으로 태그 놀로지에 의해 매개될 것이다.


--- > 독자 (나)의 중얼중얼:. 전적으로 매개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것 같지 않다. 디지털 신기술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면 구글 안경은 왜 실패했나? 시리를 누가 활용하나? msn에서도 사이버 어시스턴트 만들어서 오밤중에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 나를 놀라게 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지 않나. 절대적인 필요성이 아니라면 귀챦아서 안 쓰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사람들이 생각만큼 그리 부지런하지도 용감하지도 않다.


그런 의존 관계의 명백한 결점은, 소프트웨어가 멈출 경우 사용자들이 사실상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버릴 가능성이다. (독자의 중얼중얼: 무리한 주장이다. 기억이 덜 분명해지긴 하겠지만 기억상실증으로 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술적인 오류 못지않게 내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성공을 거둘 경우 빚어질 결과다. 깜빡이지 않는 비디오카메라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보게 된다면 사용자의 자아상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독자의 중얼중얼: 재미있는 질문이긴 한데 그런 일 안 일어난다) 인간의 인지 과정에는 힘든 기억을 완화해주는 피드백 고리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낭만적으로 채색해주는 피드백 고리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  뻔하다.

자서전에서 진실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문학 평론가인 로이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의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진실이 일치하는 지점은 그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 우리의 기억은 사적인 자서전의 집합이며 나의 기억에 할머니와의 오후가 두드러지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 기억과 결과 결부된 나의 감정들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찍은 동영상을 통해 할머니의 미소는 사실 건성에 부과했고 실은 재봉틀이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짜증이 나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냐게 그 기억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내게 안기는 행복감 때문이다. 그것을 위태롭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어린 시절 전체를 연속적으로 찍은 동영상에는 사실들이 가득하겠지만 감정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는 사건의 감정적 차원은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본다면, 할머니와의 그날 오후는 수없이 많은 다른 오후와 다르지 않다. 만약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모든 동영상을 불러낼 수 있는 환경에서 성정했다면, 특별히 어떤 날을 선택해서 더 많은 감정을 부여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노스탤지어의 핵심이 되어줄 수 있는 경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상 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만약 모든 사람이 모든 사건을 기억한다면, 개개인 사이의 차이 또한 깎여 나가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자아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방범 카메라가 기록한 무편집 영상이 영화가 될 수 없듯이 완벽한 기억이 절로 이야기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쓰기는 테그놀로지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는 테크놀로지가 매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며 그 사실은 우리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오로지 구전을 통해서만 지식을 전달하는 문화는 글쓰기를 채택하기 전에는 지극히 쉽게 자기 역사를 수정할 수 있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전 세계의 음유시인들과 그리오 들은 청중에 맞춰 구비전승을 이어갔으며 그 결과 과거의 지식은 현재의 필요성에 맞춰 점진적으로 조정됐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 마땅히 불변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글을 쓰는 문화가 글에 대해 느끼는 외경심의 산물이다.



그리고 피날레에서는  상상해 볼 수 있는 디지털 기억에 관한 작가의 입장이다. 기술의 무한 진보가 일견 비인간적이고 인간의 본성을 뒤집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역시 잘 생각해 보면 자아성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 스마트 폰이 나왔을 때도 스마트한 사람이 스마트폰을 잘 사용할 수 있다는 말들을 했었다. 인간이 기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믿음을 나 역시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 유럽인들 전반의 삶에 문자를 가져다주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고, 인쇄술의 발명에 버금가는 21세기 인터넷 기술의 발달이 인간계를 어디로 데려다 갈지 걱정도 되고 심히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 수십 세기 쌓아온 인간의 기본 조건과 덕목들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할 것 같진 않으니 오늘도 자아 성찰하고 발 밑을 살피며 살자는 이야기다.  



개인의 기억에 관해서는 나는 앞서 말한 입장과는 정반대 편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체적인 기억에 입각한 정체성의 소유자로서 나는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주관이 완전히 제거될 가능성이 두렵다. 개개인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말하는 일은 문화의 경우와는 달리 가치 있는 행위라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시대의 산물이며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다. 구전 문화가 글의 도래를 막지 못했듯이 우리는 사람들이 디지털적 기억을 채택하는 추세를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 장점을 찾아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디지털적 기억의 진짜 혜택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이렇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과거의 여러 시점에서 틀린 적이 있고 잔인했거나 위선적으로 행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일들 대부분을 망각한다. 바꿔 말해,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 거의 모른다. 자기 기억을 신뢰할 수 없다면 개인적인 통찰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일일까?



https://www.newyorker.com/culture/persons-of-interest/ted-chiangs-soulful-science-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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