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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바다 Aug 11. 2024

메이지 모던 -19세기 후반 일본의 예술과 공예

도자기 예술.  일본 근대의 출발점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일본은 한국이 생각하는 일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것은 이민생활 첫해의 일이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좀 달랐던 것이 살짝 의아했다.  우리가 배운 적 없고 상상하지 못한 무언가를 일본이 갖추고 있음을 인식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알게 된 사실은 19세기 유럽은 japanism 의 열기로 가득했다는 것. 프랑스 그림들을 통해 일본을 알아갔다. 그리고 그 이유와 증거를 보여주는 드문 전시가 이 여름에 진행 중이다.

 

파리의 아방가드 화가들을 열광케 했던 개화기의 일본 목판화, 일본 그림의 색과 그림채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류의 미술에 프랑스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나의 취향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빛바랜 느낌과 화투장 같은 색감이 무섭고, 인물들은 섬찟해서 피해 다니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또 다른 이야기다.  독수리 오형제, 아톰, 캔디, 사파이어 공주, 은하철도 999에서 시작해 지브리 스튜디오 시리즈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 감성은 아마도 우리 세대의 dna에 새겨졌을 것이다. 한글을 깨침과 동시에 흑백티브이로, 그것이 일본 것인지도 모른 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라... 지브리 작품들은 우리 세대의 기본감성이라 하면 틀리지 않는다.  그런 지브리 작품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메이지에서 시작된 꽤 길고 정교한 역사가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




일본의 도자기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릇을 좋아하고 그림을 좋아하는데 그릇에 그린 그림이니

이것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다.

아이보리 몸체에 화려한 금박을 장식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한 도자기는

그 이름도 유명한 사츠마 야끼 (가고시마 도자기)의

심수관 도자기.

화려한 화병에는 110개의 사케병과 술잔, 찻잔, 화병 등의

도자기 모음이 들어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샘플러 또는 카탈로그의 기능을 넣은 것이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디자인을 보여주겠는 각오와 결기 넘치는....

몸체에 감도는 노란빛이 내 노리타케 컬렉션과 닮았다.

금박이 이렇게나 화려하진 않지만,

이런 느낌의 금박이 섬세한 100년 쯤 된 노리타케 찻잔 세트를 갖고 있다.

120년 전통의 도자기 회사 노리타케도 메이지 당시에 설립되었다.


일본이 50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무라이들이 글을 읽고 신문물을 흡수할 수 있어서였다고 하니

칼의 시대는 가고 글의 시대가 일본을 일으켜 세운 것이란...

50년 압축성장으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선 역사라니...

메이지 50년의 결과라니....

반 세기의 차이지만 비슷하다.

많이 비슷하다.




포스팅을 위해 도자기 예술 탄생의 배경을 cht gpt에게 물었다.


—-메이지 유신에 대해 아는 대로 답하시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중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변혁으로, 일본이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유신은 1868년에 에도 막부의 종말과 함께 시작되어, 일본이 봉건 사회에서 현대적인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 배경

메이지 유신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오랜 기간 동안 쇄국 정책을 유지하며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제한해 왔습니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도착하면서 일본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외국의 압박에 의해 일본은 개항을 강요받았고, 이는 일본 내부에서 쇄국 정책에 대한 불만과 막부 체제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켰습니다.

### 주요 사건

- **막부의 종말**: 에도 막부는 1603년부터 1867년까지 일본을 통치하던 군사 정부였으나, 내부 반란과 외국의 압박으로 인해 쇠퇴했습니다.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면서 막부 체제가 끝나고 메이지 천황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 **신정부 수립**: 메이지 천황은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막부의 지방 영주들을 폐지하여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집중시켰습니다.

- **근대화와 개혁**: 메이지 정부는 서구의 과학, 기술, 교육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군사, 경제, 사회 제도가 서구식으로 개혁되었으며, 일본은 강력한 중앙 정부와 현대적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결과

메이지 유신의 결과로 일본은 빠른 속도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작하며, 이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술의 발전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의 시기는 일본의 예술과 도기공예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기술과 서구 문물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표현과 공예품이 등장했으며, 일본의 도기공예는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예 미술: 메이지 시대에는 공예 미술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전통 공예와 서구의 기술이 결합되어 새로운 스타일의 공예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의 공예품은 국제 박람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일본의 공예 기술은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도기공예의 발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의 기술과 시장을 의식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쓰마 도자기: 사쓰마 도자기는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화려한 금박과 정교한 그림으로 장식된 사쓰마 도자기는 일본의 전통과 서구적 취향을 조화시킨 대표적인 예술품입니다.

아리타 도자기: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도자기의 중심지 중 하나로, 메이지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지역의 도자기는 전통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서구의 요구에 맞춘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심수관(沈壽官)

심수관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강제 이주된 조선 도공의 후손으로, 일본 도자기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심수관 가문은 일본의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심당길(沈当吉)을 시조로 하는 도자기 가문입니다.

역사적 배경: 1598년 임진왜란 때 일본은 조선의 도공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심당길은 사쓰마번으로 이주된 도공 중 한 명이었으며, 이곳에서 사쓰마 도자기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심수관 가문의 도자기: 심수관 가문은 400년 이상 도자기 제작을 이어오며, 사쓰마 도자기의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을 도입해 왔습니다.

현대의 심수관: 심수관 가문은 현재까지도 가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도자기 장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심수관 가문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도자기 문화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심수관 가문의 활동은 일본 도자기의 역사와 함께하며,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되며, 전통적인 봉건 사회에서 벗어나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국가로 전환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도자기들은 그러니까 100년 넘은 장수품들이다.

살아남은 시간으로 치자면 엔틱이지만,

마치 전시를 위해 어제 가마에서 나온 것 같다.

회화, 도예, 공예가 결합된 입체 예술품들은 명품의 정의.



글레이즈를 입히지 않은 매트한 느낌의

양감이 기가 막힌 앞시귀로 장식된 화병은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품이다.  

꽃을 꽂지 마시오.

도자기는 문외한이라 그 매트한 양감을 내기 위해

어떤 공정을 거쳤는지 상상과 추측이 불가하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손기술.

흙으로 빚어낸 오묘한 푸른색 또는 오묘한 흰색.

로빈의 알 같다.

그 위에 이다지도 선명한 꽃 그림이라니

칠보 cloisonne

흙으로 구운 병 위에 조금 높이가 있는

은선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에나멜 채색을 한뜸 한뜸 입혔다.

소소해서 더 귀여운 칠보 복초이 화병.

볼그레한 끝동의 화사한 포인트까지.

종합예술이다.

시원하고 세련된 여름 수국


칠보 cloisonne

이건 그냥 보석인데


저 빛나는 대나무 잎은 민트 네온을 입힌 줄 알았으나

빛의 투과로 자체 발광하는 것이었다.

유리와 점토가 어우러질 때 이런 보석 같은 도자기가 탄생한다.

처음 보는 기술. 아주 매력적이다.

눈 위의 하얀 암탉.

어떻게 흰색이 섞이지 않고 닭과 눈이 구별되는지...

그리고 눈 위에 어린 수탉의 그림자.

갑각류가 예술적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재미있다.

가재니?

근데 집게는 어디 갔니?

그럼 새우니?

다리는 왜 열개?

이세아비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에만 있는 spiny lobster라고 하는데

새우와 랍스터의 중간쯤 되는 생물이라고 한다.


그물망에 걸리지 않는 코이 가와이!


갖고 싶었던 은어 수반. 물만 부으면 됩니다


칠보 cloisonne 접시 용도는 쓰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안도 칠보 컴퍼니에서 1910년 제작한 이 접시의 용도는

명함을 놓아두는 소소한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일본-영국 전시에서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작품인데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 접시는 정말 집에 데려 오고 싶었다.

집에 가져와 물 부어 놓고 꽃과 잎사귀 띄워놓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솔솔 풀려 나올 듯.

표면에도 은어가 그려져 있다.


로마인들은 정복지의 거주지마다 바닥을

연못의 풍경을 모자이크로 장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접시는 roman fish bowl mozaic를  떠올리게 했다.

연못에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자이크를 푸른색으로

장식하고 즐겼는데 물고기 부드러운 그림자까지

새겨서 사실적인 느낌 물씬한 로만 roman fish bowl.

 미술관 뒤뜰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풍경. 물론 겨울에도 분수는 물을 뿜는다.

교육관을 합하면 네 채의 미술관 건물이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는 빛의 터널이다. 현대 설치 예술가들 올라프 알리아슨의 노란빛으로 가득한 동굴 같은 터널과, 제임스 터렐의 쇼무대 같은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으로 이룬 빛의 복도 “ 내면의 빛“ 그리고 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미계 작가의 ” 무지개 터널“이다. 미술관의 지하터널은 다채로운 빛의 세계다


https://artsofasia.com/meiji-modern-globalisation-and-experimentation-in-modern-japane se-art/

기사 발췌

“ The exhibition also explores the rise in popularity and demand for Japan’s artistic heritage in Meiji art, which was most visibly seen abroad in the late 19th century at the universal and international exhibitions. After exhibitions in London (1862) and Paris (1867), where Japan and its products had aroused great curiosity, the new imperial government became aware of the role that these exhibitions could play in redressing a difficult economic situation at home due to the decrease in patronage by the large and influential aristocratic families.


Artistic production played a vital role in enhancing the reputation and prestige of the nation and helped to redress the trade balance caused by the cost of modernisation by creating an export demand. Therefore, the government carefully selected the artists, objects, and products to represent Japan in the exhibitions in Vienna (1873), Philadelphia (1876), Paris (1878, 1899 and 1900) and Chicago (1893) and to show off their new Meiji art.


To emphasise the uniqueness of the country, the Japanese pavilions were modelled on traditional buildings – to create a fascination for the country and showed the uniqueness of Japan. The plan paid off and the universal exhibitions were a commercial success, as Western audiences were not only fascinated by this long-isolated country, but were also entranced by the objects that were offered to them (another attraction was the advantageous price).


The Craftsmen of Japan and Meiji Art

Craftsmen in Japan had always been recognised for their skills and the quality of their work. The idea of Japan in the West stems from this time – goods that showed time-consuming perfection and a painstaking and patient execution of  craft, objects  showing a new aesthetic and sense of the use of space in design. In the Meiji era, due to the march of science and industrialisation, this skill and taste was able to be married to create Meiji art with a remarkable progression in techniques in the fields of metalwork, lacquerware, and cloisonné  objects.


The government played a vital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se technical skills by encouraging and sponsoring education and technical schools –  National Industries Exhibitions were organised in all the main cities of Japan to encourage competition and growth in domestic and export industries. The first National Industrial Exhibition was held in Tokyo in 1877, featuring products appropriate for the integration of Western technologies into Japanese industries.


Western Modernisation

However, in the face of Western modernisation, an art movement grew up in Japan in response to this change, which sought to define and affirm its cultural identity by turning to its past, creating a new style of Meiji art. At home, there was renewed interest in the Rinpa school that was in decline by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burst of creativity and art during the Meiji era reaffirmed Japan’s own identity through producing arts and crafts that were deeply reverential to its past.  This can be seen in the traditional images often chosen for surface decoration, such as the world of the samurai, or images of Edo-period courtesans of the floating world, all memories romanticised from an earlier age that could be used on modern commercial products for export. The lure of Japan’s past sold in the West.


Establishment of Cultural Institutions and Publications

At the same time, cultural institutions such as museums, art schools, and art history magazines were established – all supporting the culture of Japan and its ancient cultural past, supporting the revival in such crafts as lacquerware and basketry. These crafts and skills were also recognised, honoured, and given a new perspective in society. In 1871, the Daijo-kan (Great Council of State) issued a decree to protect Japanese antiquities called the Plan for the Preservation of Ancient Artefacts and a second law was passed on December 15, 1897, that included supplementary provisions to designate works of art in the possession of temples or shrines as ‘National Treasures’. The laws of 1897 are now the foundations of Japan’s current designation and protection laws.


The Meiji period also saw Japanese painting (Nihonga) develop in a new way – works that use techniques and materials of traditional Japanese painting as opposed to Western style paintings. Nihonga was inspired by Japanese traditions and Chinese ink paintings, but also integrates Western influences, including Western perspectives and shading.


The movement also created an artistic community where painters, enamellers and ceramists often worked together rather than alone. The Tokyo University of Fine Arts, founded in 1885, played a vital role in the Nihonga movement, under the direction of the scholar Okakura Kakuzo (1862-1913), who became famous as the author of The Book of Tea (1906), a long essay linking the role of chado (teaism) to the aesthetic and cultural aspects of Japanese life.


With the American philosopher Ernest Fenollosa, Okakura sought to promote painting with a national character and to strengthen the links between painting and decorative arts. The work of the artist Watanabe Seitei, who spent several years in France, where he met Degas, is a prime example to show the relationships between decorative arts and painting.  Linked to the rise in interest from abroad for all things Japanese, the craze of Japonism was born and signalled the globalisation of Japanese taste. This new aesthetic became the inspiration for many Western artists, who quickly adopted the trend and created hybrid works as their response to these new foreign works they saw,  one of the most visible movements was Les Nabis,  a movement emerged in late 19th-century Fra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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