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라의 길고도 지루한 열기 아래
마음에 난 물길이 바닥을 드러낸 오후엔
비 맞는 한국의 여름 산 ,
흑백의 수묵화 속으로 물을 길러 떠난다.
삼천리의 금수강산의 깊숙한 내륙을 남북으로 달리는 고속도로
- 1번도 좋고 35번도 좋고 45번도 좋다-에 올라
시야 가득 펼쳐지는 산악의 병풍이 뿜어대는 초록에 취하며 달린다.
시속 백 킬로로 달리다가
터널과 터널을 빠져나오며
허공에 놓인 교각을 달리노라면
신록의 거대한 병풍은 비에 젖는다.
산허리 어느 골짜기로부턴가 피어오른 안개가
비에 젖는 병풍 위로 번지며 시야를 흑백으로 물들여 갈 무렵
나는 어느덧 겸재 선생의 인왕제색도 속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삼백년 전의 한국으로..
도심 공항,
현대백화점 에스컬레이터 기둥 사이에는
겸재 선생이 그린 박연폭포가 디지털 스크린 속에 환생해 있다.
폭포 꼭대기로부터, 나뭇잎 같은 조각배와 정선의 빨간색 낙관이 동동 떠내려오다가
물줄기와 함께 수십 길 아래로 수직낙하.
물아래로 떨어진 조각배와 그의 낙관은
-스크린 뒤에 몰래 설치해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던 것인지-
어느덧 꼭대기에 다시 나타나
낙하를 거듭 반복하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던 내 시선은
조각배와 빨간 낙관의 동선을 하염없이 쫓고 있는데,
바닥을 드러낸 내 마음 물길에
폭포의 물줄기 시원하게 내려 꽂힌다.
북악산 아래 평생을 거하던 겸재 선생이
일흔 여섯에 보았던 여름 산의 신비가,
또 박연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300년의 시간을 흘러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 열사의 평지를 적셔줄 수 있으니
겸재 선생의 그림은 옳았다.
겸재 선생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