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기

지리산 가는 길, 2016 여름 (2)

지리산 - 운해에 잠긴 59번 국도

by 윤현희

골목길을 걷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기를 좋아한다. 지도를 들여다보는 일도 아주 좋아한다. 그렇다고 전 세계의 관광 명승지를 찾아다니는 일을 중요한 목표를 두고 있지는 않다. 그냥 일상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늘 다니는 골목길도 조금 다른 각도로 다른 방향에서 움직여 보는 일에서 재미를 느낀다. 그렇기에 운전하며 길 찾기에 이골이 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35번 고속도로를 따라 내륙 산간을 지나며 세 시간여 달린 후, 구절양장의 굽이 굽이 운치 가득한 59번 국도의 지리산 초입의 밤 머리재를 돌아 넘는 드라이브 코스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햇살 청량한 초여름 오후도 좋고 또는 밤 머리재가 운해에 잠긴 이른 아침 시간도 좋다. 서행하며 밤 머리재라 이름 붙은 지리산의 이 고개를 넘어갈 때 마음 가득 차 오르는 신선한 설렘을 간직한 기억은 멕시코만의 타는 여름을 버티게 해주는 청량제 같은 것이었다. 천천히 곡예하듯 도로를 따라 나갈 때 도로변에 줄지어선 손에 닿을 듯 가까운 애기단풍의 아기자기함은 그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풍경이다. 나는 이 길을 무척 좋아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세 시간이 조금 넘는 이 드라이브 코스는 아드레날린 러시를 이루는 스릴 넘치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신록으로 우뚝 솟은 산과 산을 연결하는 무수한 터널을 지나고 수십 미터 허공에 건설된 이 차선 또는 삼 차선의 좁은 교각을 쉼 없이 통과하는 일이란, 언덕 하나 없이 평평하고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평선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달려야 하는 텍사스의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하이웨이를 달리는 일과 비교하면 곡예에 가깝다고 해도 좋다. 시속 백 킬로미터가 넘는 스피드로 통과하는 도로가, 실은 평지가 아닌 수십 미터의 허공에 놓인 교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순간엔 그 높이감이 온몸으로 느껴지며 아찔아찔하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실감 나게 느끼진 않았었는데, 몸이 지상으로부터 떠 있는 높이에 점점 더 예민해지는 것은 내가 멕시코만의 평지에 딱 붙어살았던 시간이 그리 짧지 않았다는 반증인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산을 뚫고 허공에 아크로바틱 하게 놓인 고속도로를 달리며 생각한다. 한국인의 마음의 지형은 이 아름다운 신록의 첩첩산중을 뚫고 놓인 도로 위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깊은 계곡이 있는 높은 산이 아름다운 것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또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볼 때 눈에 좋은 것이고, 달려도 달려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저기 저 앞산, 그리고 또 저기 앞산 뒤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켜켜이 가로누운 푸르스름한 산자락의 허리들을 관통해 목적지에 다다르는 일은 참으로 피로감을 동반하는 일이다. 아울러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구간 구간 변경되는 제한 속도까지... 한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은 텍사스를 벗어나기 위해 (크루즈를 넣고) 좌우로는 최소 여섯 시간, 북서쪽으로는 최장 열 한 시간을 내쳐 달리는 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재미와 동시에 굉장한 피로감을 선사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의 고속도로는 내게는 애증의 도로이다. 시댁과 친정 사이의 먼 거리를 오가고, 때로는 모교에서 초대한 콜코퀴엄에 참석하고자, 또 어떤 때는 논문의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서울에서 지리산을 거처 대구와 부산까지를 여러 번 왕래해야 하는 한국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길을 달리는 고단한 꿈을 오래오래 꾸곤 한다.



산청에는 동의보감촌이라는 거룩한 규모의 이벤트성 전시공간이 산중턱에 마련되어 있었다. 한 여름에 보는 민들레 홀씨.


한국의 산악지형에선 시원하게 뻗어있는 길 위를 내쳐 달리기만 하는 일도 피곤한데, 길을 만드는 일은 또 얼마나 힘이 들었을 것인가. 고속도로 하나 내는 일도 이렇게 산을 뚫고, 뚫고, 또 뚫고, 수십 미터 높이의 교각을 세우고 또 세우고, 연결하고 또 연결해야 하니, 유럽이나 아메리카 또는 뉴질랜드 대륙의 넓고 넓은 평지에 태어난 사람들에 비하면 참 고단한 삶의 현장이다. 각자가 처해진 삶의 물리적 터전은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의 토대를 구성한다.


대한민국의 1번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건설되었다. 당대의 민주 투사를 자처하던 양김이 온몸 던져 무효화 하고자 했던 그 1번 고속도로의 탄생이, 민주투사들의 뜻대로 성공을 했더라면, 우린 아직도 푸른 산커튼의 어느 자락에 깃들어 정말이지 산골소년과 소녀로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라면서는 이 고속도로를 이용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가정을 꾸린 후 그리고 한국 방문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길이 되었다. 이 외에도 남북을 종단하는 35번과 45번 고속도로를 애용하고 (55번을 탈 일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50번 역시 시원스럽다. 나를 포함하여 이 고속도로가 건설된 후 태어난 세대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시간을 돌이켜보면, 역사를 돌이켜보면, 광활한 초원이나 평지를 삶의 터전으로 태어났더라면 지평선 저 멀리를 응시하며 탐험의 호기심에 반짝였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시야는 켜켜이 처진 저 푸른 산 능선의 커튼에 가려져 계곡 너머 맞은편 산등성이만 바라보며 내가 사는 산동네의 규율에 마음이 묶여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높은 산 아래 깊은 계곡에서의 생활은 우리의 시각장을 수렴하게 만들어, 지평선 저 먼 곳 어디쯤을 내 삶의 지표로 정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기보다는, 같은 계곡 내 옆사람만 곁눈질하고 나와 비교하는 습성을 몸에 베개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우리가 태어난 삶의 터전에서 눈뜨면 확인하게 되는 사실이 하늘과 맞닿는 것이 드넓은 대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랐더라면 그 좋은 시력으로 옆사람과 동네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고, 시각장은 밖으로 확장 일로를 거듭하며 사고와 행동반경을 넓혀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쯤이면 산허리를 관통해 놓인 그야말로 빠르고 높은 고속도로가 반갑고도 마음이 아리다. 숱한 고속도로가 동서로 남북으로 이렇게 사통팔달로 뻗어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로 열린 인천공항이 매일같이 북새통을 이루며 세계가 한 마을이 되고 있음에도, 사람들 마음에 가로 놓인 높은 산과 언덕들이 아직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산등성이 커튼을 뚫고 전국을 잇는 고속도로가 건설된 것이 채 반세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숱한 이유로 나와 너 사이에 산 하나를 얹어 놓고 깊은 계곡을 하나 흘려 놓는다. 정말 우리는 저 넓은 세계로 지구촌 한 가운데로 몸과 마음을 던지기 보다는 계곡 안에 모여 살면서 궁극의 경쟁으로 한 생을 보내고 말 것인가. 사람들 마음에 놓인 언덕과 높은 산들이 가파른 침식과 풍화를 겪고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력을 회복하기를....

비행기 안에서 본 아리조나 어디쯤일 것으로 짐직되는 타운. 황무지를 기하학적 조형미 넘치는 거주지로 탈바꿈 시킨 현장


땅의 용도가 감이 잡히지 않는 미국의 남동부 어디쯤. 참 평평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차를 달리는 동안 어느덧 시골집에 도착하였고, 지리산 아래 안착하여 마음을 비우는 시간은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말하자면 가톨릭에서의 피정 같은 시간. 대원사 계곡에 발을 담그고 산의 향기와 계곡 물소리를 귀에 가득 담는다. 여름 산의 정다운 정경과 산허리로부터 피어오르는 운해를 눈에 가득 담아 다시 세상으로 나갈 휴식을 취하는 언제나 그리운 시간이다.


놀라운 초록빛 계곡물. 휴런호를 인접한 토버머리 호수를 떠올리게 하는 초록빛이다.



시골집 소박한 돌담을 예년에는 보지 못했던 능소화와 접시꽃이 치장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고속도로 주변이며 도시 내의 방음벽을 뒤덮은 것도 저 능소화이다. 전국에 능소화 만발한 한국의 여름, 아름답다.

일부러 키우시는 화초도 아닐 텐데 산의 힘은 휴스턴의 내 정원과는 비교도 안되게 아름답다. .

계절이 어느 때든 일년에 한번은 지리산에 오를 수 있기를... 그리고 내년엔 노고단에 오를 수 있게 되기를... 그리고 카톨릭식 인사로 고향 사람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빕니다.



© Yoon Hyunhee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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