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네사의 동물관 그리고 나
평소에 내게 이것저것 알려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 외에도 그녀는 꾸준히 귀여운 동물 영상을 보내왔다.
자기가 좋아하는 햄스터는 심지어 일을 하다가도 내 자리에 와서 "다양, 이 햄스터 새 영상 업로드됐어!"하고 보여주었다. 평소에는 받아서 보기만 하다가 오늘은 나도 내가 평소 좋아하던, 화난 듯한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인 고양이의 영상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반응이 좀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매우 그녀다웠다.)
"음. 고양이가 짜증내고 싫어하는데도 사람이 계속 괴롭히고 있어. 이건 좋지 않아."
"응? 아니야! 이 고양이는 원래 이런 얼굴을 하고 있어. 다른 영상들에서도 얜 다 이런 얼굴이야! 그리고 이 사람은 고양이 주인이야. 고양이를 괴롭히는 게 아냐. 주인이랑 장난치는 거야. "
"얼굴의 문제가 아냐. 고양이는 표정으로 말하지 않아. 바디랭귀지, 고양이의 귀를 봐. 다른 사진들에서 고양이의 귀는 편안해보여. 세워져 있고 앞을 향해 있지. 그렇지만 화가 나면 고양이는 귀를 뒤로 납작하게 젖혀. 이 영상 속에서 고양이는 화가 났어. 싫어하는 걸 계속하는 건 장난이 아냐. 괴롭힘 당하는 고양이를 귀여워할 수는 없어."
나는 민망해져서 넌 그걸 어떻게 아냐고, 고양이를 길러봤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것을 아마도 유치원에서 어릴 때 배웠다고, 동물이 싫은걸 어떻게 표현하는지 배우는건 당연한 상식 아니냐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작은 동물들이 화나거나 싫을 때 어떤 바디랭귀지를 보여주는지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내게 고양이는 톰과제리의 톰 정도였고 고양이에 대한 이해는 전무했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고양이가 진심으로 화나고 싫어서 짜증을 내는 영상을 보면서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도... 내가 어느날 함부로 샤워시키면 안된다는 토끼를 물에 담그는 영상을 봤을 때, 그게 귀엽다고 친구를 태그하는 사람들을 보고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그녀가 나를 보고 오늘 느꼈으리라 생각하자 부끄럽고 멋쩍어져서,
"그렇구나, 넌 정말 동물 전문가같다. 알려줘서 고마워!" 하고 대화를 끝내버렸다.
사실 그녀는 이전에도 내가 아슬아슬하게 간식을 주지 않고 약올려서 삐져버린 햄스터 영상을 찾아 보여줬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왜 괴롭히는거야?"
"그냥.. 몰라 근데 귀엽잖아?"
"안 귀여워. 햄스터가 가여워."
생각해보면 그녀가 좋아하는 동물 영상은 자연스럽고 행복한 것들이었고, 장난을 치거나 하는 것은 불쾌하다고 말했었다. 동물에게 어떤 코스튬을 입히거나 괴롭히면서, 화가 나고 답답해서 방방 뛰는 모습을 귀여워하는 것은 사실 작은 동물들에 대한 대한 인간의 우월감과 권력감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불곰이나 호랑이가 화가 나서 날뛰며 인간을 물어뜯거나 죽이는 것을 보면서도 아 귀여워♥️하지는 않으니까. 우리가 강아지나 고양이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보며 귀여워하는 것은 투우와 뭐가 다를까? 아무리 괴롭혀도 끼잉 하며 가엾게 굴어야 귀여움을 받을 동물들.. 그들이 반격하는 순간 호러물이 되겠지, 그리고 사람을 공격했다는 죄로 그 작은 동물들은 죽임을 당하겠지.
동물이 자연스럽고 그 자신답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과, 인간답게 행동하며 격한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동물 영상에 대한 내 취향에 어쩌면 좀 문제가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했다.
그녀가 가끔 너무 과도하게 진지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뿐이 아니었다. 어느날 그녀에게 베를린은 물가가 싸서 고기를 양껏 먹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때도 이런 반응이었다.
'음..아니, 난 그래서 베를린이 싫어. 고기를 싸게 먹을 수 있을수록 고기 소비가 많아지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동물들이 죽게 되잖아. 살아있을 때도 인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던 동물들이, 죽음조차 저평가받는 것은 옳지 못해. 동물들은 더 인도적으로 사육되어야 해. 그로 인해 드는 비용이 고기값을 비싸게 만든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 돈을 내고 고기를 살거야. 고기는 비싸야 해. 그건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생명이었던 것의 죽음이야. 죽음의 가치를 낮춰서는 안돼. 그건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속화시킬거야.'
나는 무척 무안해졌지만, 곧 동의했다.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다정하고, 적극적이고, 도움을 주고 싶어하고, 예의바르지만 동시에 절대로 '그런 척', 중립을 지키는 척, 그것도 동의는 하지만 나는.. 과 같은 애매한 화법은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제대로 알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거침없는 그녀. 그녀와 이야기하면 종종 무척 민망해지기도 하고, 난 왜 이렇게밖에 생각을 못하지? 싶을 때가 많았다.
솔직히 사람들 앞에서 딱 잘라서 "아니? 난 아닌데?" 하면 너무 민망해서 좀 미울 때도 많았지만, 나는 그녀의 가치관과 행동방식을 닮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사실 그녀만이 아니라 내가 이곳에서 만난 거의 모든 독일 여자들은 그녀랑 느낌이 비슷했다. 정이 많고, 적극적으로 남을 도우려고 하고, 예의바르지만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는 거침없고,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의사표현 확실하고, 독립적이고 자연스럽다.
베를린을 떠올리면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던 보라색의 입술로 활짝 웃던 해맑은 미소, 신나서 보여주던 햄스터의 사진들, 그리고 그녀의 나른한 발음과 끈적한 목소리, 단호한 단어선택이 떠오를 것 같다.
독일 여자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한국여자인 내게는 참 좋은 일이었다, 아주 여러가지 측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