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뭘까?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한지 삼 개월이 되었다. 이제는 여기가 집 같냐면, 아직 그건 아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은 넓고, 깨끗하고, 쾌적하고, 따뜻하고, 풍요롭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이 걸어온 길 쌓아온 생과 닮아 있다는 인상이다. 검박하지만 부족한 것 없이 마냥 밝고 항상 깨끗하고 넉넉한 그들의 모습. 그 곳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완전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편 내가 사는 집은 작고 좁고 약간 불편하고 조금 춥고 쉽게 눅눅해지고 없는 게 많고 무엇보다 늘 약간 불안하고 외롭다. 마찬가지로 나와 닮았다.
베를린에서 살았던 집은 참 아름다웠다. 첫 출근 전까지 안멜둥(거주지 등록)과 콘토(은행 계좌) 개설, 외국인 등록 등 취업 관련 행정처리를 마무리해야 해서 급히 구한 집이라 사실 월세는 무척 비쌌다. 인턴 월급을 전부 털어넣고도 모아놓은 돈을 탕진하게 만들었을만큼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정말로 좋은 집이었다.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다는 동네에서도 누구나 놀랄만큼 모든 것이 완벽한 거리. 그 동네의 그 거리라고? 정말? 동료들조차 모두들 놀랐던 좋은 곳. 오십 걸음이면 지하철역과 유기농 마트였고, REWE, NETTO, ALDI가 백 걸음이면 해결됐던 최적의 지리 조건. 심지어 집 주인이 운영하는 Kneipe(레스토랑을 겸하는 작은 바)가 바로 아래층이라 언제든 문제가 있으면 바로 처리할 수 있었고, 종종 인심좋은 집주인이 주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그들은 1리터, 2리터짜리 큰 병에 직접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공수해온 미친 맛의 맥주를 (정말이지 이건 미친 맛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선물해주곤 했다. 술 깨나 마셔온 (비밀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이 곳의 맥주보다 맛있는 맥주는 정말이지 겪어본 적이 없다. 500ml을 꺾지 않고 한 모금처럼 들이킨 맥주는 정말이지 이 곳의 것뿐이었으니까.
다시 집 이야기로 돌아와서, 높은 천장, 하얀 벽, 널따란 부엌, 완벽한 화장실, 더할 나위 없이 안전했던 보안과 아름다운 정원에 맞닿은 테라스까지 그 집은 누구라도 삶에서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을 만한 공간이었고, 내가 주말마다 모든 구석을 쓸고 닦고 매만지며 진심으로 사랑했던 터전이었다.
아름답고 넓은 부엌에서 오븐 요리를 처음 해봤다. 크기별로 구비된 조리도구, 토스트기부터 커피포트까지 없는게 없는 빌트인 주방에서 곧 요리를 사랑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내 요리의 8할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가을날 독일식 창문을 열어놓고 테라스의 창문도 열어서 온 집안에 바람이 춤출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혼자 노래를 작곡해서 가사를 붙여 불렀던 것도 여기서였다. 노래를 부르지 않곤 견딜 수 없을만큼 충만한 삶, 그런게 정말로 가능했다.
아름다운 전신거울 앞에서 찍었던 수백 장의 사진, 영상, 아침저녁으로 스스로에게 건네던 인사. 모든 것이 지금도 눈 감으면 선명한 촉감으로, 냄새로, 걸음 수로 기억에 남아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모양의 열쇠를 돌리고 황금빛의 손잡이를 잡아 문을 열 때마다 삶을 긍정했다. 행복은 사소한 곳에 배어 있어서 눈치채지 못하게 몸에 묻어난다. 이 곳에서의 삶은 그런 느낌이었다, 행복이 너무 일상적인 존재라 자칫 잊고 지낼 법도 한데도 순간마다 찰나마다 반짝반짝 빛나면서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그러던 어느 날, 베를린 템펠호프 근처의 아이키아에 갔던 날이었다. 공간을 가득 메운 가구들을 바라보며 나는 묘한 슬픔을 느꼈다. 내가 앞으로 영원히 그리워하게 될 나의 소중한 집이 조각조각 잘리고 나뉘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내 집, 내 공간의 모든 것이 아이키아(IKEA)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크 하나, 접시 한 개부터 전등 갓까지 모든게 아이키아. 뭐랄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 어디서든 베를린 집이 그리울 때면 아이키아에 가서 소파에 앉고, 후라이팬을 들어보고, 싱크를 여닫고, 침대를 매만져보면 되겠구나. 싶었으니까.
아무튼 아이키아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집은 변함없이 애착의 대상이었다. 더 정확히는, 그 공간이 보장해준 나의 성장과 경험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 공간을 배경으로 이룩한 나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혼자만의 시간을 홀로 오롯이 보냈던 몇 달의 시간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다 설명할 수조차 없다. 처음 이 공간에 혼자 남겨졌을 때 나는 대낮에도 벌벌 떨며 이불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덮어쓰고 어둠 속에 웅크려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확히는 독일에 혼자 남겨져있었던 거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되든 누구도 알지 못하고 도와줄 이도 없을거라는 두려움. 이 낯선 민족,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이웃들이 나를 어떻게 인지하고 대우할지 예측도 되지 않는다는 무서움. 이 방 이 집만큼은 내 공간인데도 나는 철저히 타자였고 외톨이였다. 아무도 틈입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범위는 고작 팔다리로 모든 틈새를 막은 이불 속 뿐이었다. 그랬던 날을 지나 나는 내 방에서, 내 집에서 활개쳤고 이윽고 나의 Strasse를, Prenzlauerberg를, 이내 Berlin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전공 수업 교재였던 '숨겨진 차원'에서 사람은 물리적 외연이 자신의 크기라고 인지하지 않는다고 배웠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테두리'만큼을 자신의 범위라고 인지하고, 이 공간을 침입하면 몸에 닿지 않더라도 불쾌감을 느낀다고. 그래, 내 외연이 점점 넓어지는 경험이 바로 이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내 범위가 확대되고 지경이 넓어지는 경험. 그 모든 과정이 어땠었는지는 내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심지어 그 무렵, 군입대 직전 유럽여행을 떠나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던 동생이 내게 했던 말은 잊을 수가 없다.
누나, 누나 정말 생기있어졌다. 뭐라도 할 것 같고, 뭐든지 할 것 같아.
행복한 기운, 에너지 같은걸 온 몸에서 뿜는 것 같아. 내 누나 다양 아닌 것 같아.
사실이었다. 나는 자신감과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약동하는 에너지를 매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공간을 살뜰히 관리할 줄 아는 어른이었고, 나 먹을 것을 스스로 벌고, 나 쓸 것을 스스로 챙기는 내 엄마였다. 게다가 밖에서의 일은 재미있었고, 존중받으며 행복하게 일했고, 상식적인 사회가 주는 안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은 풍요로웠으며, 검소함을 미덕으로 치는 풍조는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비록 돈이 떨어져 저녁마다 라면을 먹을지언정 매일 씩씩하게 걸으며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네~ 매일 이렇게 살다 이렇게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네~ 오늘처럼 평생을 살아간다면~ 평생 노래노래 즐거이 부르리~" 뭐 이런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뚜벅뚜벅 퇴근하곤 했다. 그 무렵의 사진들은 죄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고(정말 입꼬리를 칼로 쭉 째놓은 듯이 찢어져라고 웃는다), 귀국하는 나를 본 부모님마저도 (내 부모님은 외모 칭찬에 매우 인색하다) "저 빛나는 아가씨가 설마 우리 딸이야?"라고 서로에게 물었다고 하실 정도니까.
그 무렵의 기억은 내게 너무나 선명한 레퍼런스로 남았다. 나는 행복했고, 스스로를 사랑했고, 내가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워서 기르는 일에 무척 심취했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나는 독립된 인격체로, 성인으로 계속해서 성장을 성취했었으니까. 그래서 결정한 거였다, 집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선택을.
그리고 나는, 몇 평인지 모르지만 아마 독일 집의 부엌보다 작을 것이 확실한 한 외딴 원룸에 나를 구겨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