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기술(알박기)

빌런인가? 아니야 다소 추한 기술이다.

by 워커

직장 생활에서 탐나는 기회가 종종 생긴다. 관리자 포지션, 자격증/국내외 연수/학위과정 기회 및 주재원 선발 정도이다. 회사 내 평가, 인간관계(속칭 라인), 소속 부서 영향력 등이 기회를 잡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중 가족까지 혜택을 받는 주재원은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주재원 선발 경쟁이 치열한 이유는 개인에게 성장, 가족에게 다양한 문화를(자녀 영어교육 등) 접할 기회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주재원은 현지에서 상위 관리자급이기에 한국 본사와 포지션 격차가 크다. 주요 매출 국가로 파견 시 커리어 성과로 이어질 수 있고, 생산 기지에서는 상당 수준의 관리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인도/동남아 지역의 생활 편리(운전기사, 가사도우미 등)와 자녀의 교육 기회(국제학교) 등은 탐낼만한 보상이다. 그런데도 아프리카 일부 지역은 방탄차와 보디가드 조건을 제시해도 지원자가 없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역 험지 주재원은 누구나 거부한다. 반면, 선호 지역의 주재원에 목맨다. 간혹 귀임한 주재원이 다시 파견 나고 싶어 안달 나기도 한다.


2010년 일본 도쿄 주재원 L부장의 임기가 끝났다. L부장은 연초부터 자신의 도쿄 주재 기간 연장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마무리되지 않은 업무 완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임기 만료가 다가올수록 후임 C책임의 일본어 및 업무 역량 부족 험담까지 서슴지 않았다. L부장을 지켜본 C책임은 그의 언행이 못마땅했지만 침묵했다. 결국 L부장의 임기 연장이 무산되었고, C책임은 주재원 준비를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 일이다. 자리보전을 위한 '후배 욕하기'는 눈에 보이는 알박기 초보 기술이다.


그러나,

L부장의 추한 기술은 지금부터다.


2010년 연말이 갑자기 L부장은 아이가 아프며, 귀국 시기 연장을 요구했다. 아이의 병원 현재 치료 중인 도쿄에서만 유일하게 치료할 수 있으며, 치료 기간을 예측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읍소했다.


- 어떡하지? 애가 아프다는데?


C책임의 주재원 부임 프로세스를 멈추고, 회사는 L부장의 귀국 시기 연장을 검토했다. 여러 가지 대안이 고려되었으나,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L부장은 마치 귀국 연장 확정한 듯 C책임에게 인수인계하지 않았다. L부장은 아이가 치료해야하므로 절대 귀국할 수 없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도저히 한국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면서 귀임 시기는 계속 미뤘다. C책임의 부임 시기가 기한 없이 보류되어 집, 아이 학교, 배우자 직장 등 파견을 위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의 알박기가 성공한 듯 보였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산리쿠 연안에서 규모 9.0의 초거대 지진이 발생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 쓰나미가 덮쳤다. 일본 정부는 원전 반경 20km 이내 주민 강제 대피령을 내렸고, 전 일본이 패닉상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에 비교되는 심각한 상황으로 보도되었고, 방송사 기자와 피디들이 현지 취재 거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아무도 그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했다. 250km 떨어진 도쿄가 위험 최고 수준의 험지로 한순간에 전락했다.


L부장은 가족과 함께 바로 귀국했다. 다급한 L부장은 후임 C책임에게 빨리 부임 준비하라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다. L부장의 알박기로 주재원 준비를 시작하지도 못한 C책임은 어이없어하며, L부장의 간사함에 불같이 화를 냈다.


- 지금 일본에 누가 들어갑니까? 원래 있던 사람이 자리를 지켜야지!


C책임은 일본 부임을 거부했다. 회사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후임자의 결정만 기다렸다. 사고 초기 피폭 공포가 절정에 이른 일본에 누가 가족을 데리고 가겠는가? 일본 총리가 나와서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을 먹는 퍼포먼스는 몇 년 후에나 있었고, 사고 당시 일본은 죽음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긴급히 가족과 귀국한 L부장은 호텔 생활을 하면서 아이의 치료는 한국에서 할 수 있다며 기간이 끝났으니, C책임의 빠른 부임을 요청했다. C책임이 L부장 아이의 질병은 가벼웠다. 주재원 연장을 위해 그가 아이를 감성팔이에 이용했다고 전해주었고 C책임은 일본행을 거부하다가 경쟁사로 이직했다. 퇴직 사유는 '열받음'이었다. 선배에 대한 치졸함에 실망했고, 회사의 우유부단함을 책망했다. C책임은 소위 인기 있는 기술 보유자로, 경쟁사로부터 꾸준히 이직 제안을 받는 핵심인재였다. C책임의 퇴사로 L부장의 주재원 기간이 연장되었다.


도쿄 주재원 후임이 선정될 때까지 L부장은 도쿄지사에 근무해야 했다. 휴가를 모두 소진한 L부장은 C책임의 퇴사로 귀임 명분이 사라져 도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한국으로 출장 나와 후임 선발 재촉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패닉 상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각 도시의 피폭 가능성이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되었다. 도쿄는 안전하다는 공식 보도와 위험하다는 음모론이 동시에 돌았다. 타 계열사 일본 주재원들이 '도쿄 사람들은 평온하고 후쿠시마 농수산물만 피하는 분위기'라고 알려주었다. L부장이 심리적 안정을 되찾았을 땐, 사고 당시 급하게 귀국한 비용과 가족들의 한국 호텔 비용까지 요구하는 꼼꼼함을 보였다.


- 동일본 대지진 때 도쿄에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 다들 도망갈 때 나는 일본으로 들어갔어~


한동안 L부장은 단신으로 도쿄 주재원으로 머물렀다. L부장 C책임은 중요한 순간 도망간 놈이고, 자신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진정한 회사원'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의 주재원 '알박기' 시도와 '치졸한 언행'을 사람들은 샅샅이 기억하고 있다.


- L부장은 미운 사람일까?

-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개인을 희생한 아빠인가?


회사가 치열할수록, 경쟁적일수록, 보상이 좋을수록 회사원의 성취욕과 빌런 행동은 종종 혼동된다.


'빌런의 심리학'(오시오 아쓰시, 시그마북스, 2025)에서 사람의 어두운 면을 4가지로 구분한다.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다‘ - 나르시시즘

‘패배한 사람을 무시하고 싶은‘ - 사디즘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 - 마키아벨리즘

‘남이 괴로워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 사이코패시


모두가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자신의 어두운 성격을 회사 생활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간혹 어두운 성격이 기막힌 '운'과 만나면 성과로 포장되기도 한다. 잘 살펴보면 빌런은 곳곳에 있다. ‘내 생각과 나의 성과가 기가 막힌데,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후배 빌런류는 드물게 나타나고, 거의 모든 상사(관리자급)가 빌런이 되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안줏거리가 된다.


아쓰시가 말하는 빌런의 유형에 따라 주변을 좀 더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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