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 많은 글을 쓰겠다던 제 다짐도 한 달 만에 돌아왔으니 비교적 빨리 초심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설날을 맞이해 다들 어떤 기념을 하셨나요? 사실 이 질문 자체를 저는 철회하고 싶은 것이, 새해라면 꼭 어떤 다짐을 하고, 실행해야만 한다는 관념이 사회에 깔려 부담감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글을 쓰는 도중 문득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관심 없는데 제가 왜 물어봤을까요? 관심 없으니 대답하지 않길 바랍니다. 얘기해 주실 마음이 든다면 말해주세요, 그럼 관심 생길 것입니다. 저도 여기엔 말 안 할게요. 궁금하면 댓글 확인 바랍니다.
이번 설을 맞아 할머니 집에 내려갔습니다. 일주일 간의 일본 여행을 뒤로하고 귀국하자마자 바로 할머니 집에 갔으므로 조금은 피곤했습니다만, 왠지 요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정말 작은 샘이 뽕뽕 솟듯 잊을만하면 차 있고, 운 좋게도 이번 설 맞춰 알맞게 차 있어 기쁜 마음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는 길에 교수님 및 본부장에게 새해 문안 문자 보내느라 멀미로 고생을 했지만요.
으레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모이면 그 긴 시간의 간극 탓에 각자 요즘 힘든 얘기, 즐거웠던 얘기들을 새로 갱신하느라 긴 대화를 하곤 합니다. 숫기 없던 지난날에는 그러지 못했으나 요즘은 그런 날들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빠릿하게 참여하게 되지요.
이번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군대 다운 군대 간 사촌 동생이 돈을 얼마나 많이 받고, 많이 쓰는가,에 대한 이야기. 미국에서의 약대 생활이 힘들어 국내 약대로 편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온 가족 마음 쓰이는 이야기, 은밀하게 나를 측은하게 생각하셔 위로하는 이야기, 캐나다 여행 계획 이야기.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어떻게 30년 가까이를 지내면서 서로 이렇게 달랐을까 싶지만 그래도 가족은 가족인가 보다,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보다도 제가 유독 관심이 가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5남매가 지나온 추억 이야기들입니다. 저희 외가는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으로 겨울에 해가 지고 나면 온 마을이 어둠에 잠겨서 가끔 아궁이 때운 냄새와 그 습기로 만들어진 안개가 구름처럼 끼는 곳입니다. 그리고 약 40년 전에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직감하셨던 당시 중학교 교사인 할아버지는 파격적으로 5남매를 전주로 보내 독립시키는 결정을 하십니다. 그때 당시 저희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4학년, 5남매 중 가장 큰누이였던 큰 이모가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 보더라도 무척이나 빠른 독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당신 자식들의 이야기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라 '우리 엄마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며 지금 들어도 신기한 경우가 많습니다.
추억을 헤집으며 나온 이야기는 엄마 곁을 지키고 있다 보면 꼭 한 번은 나오는데, 이번 설날의 이야기는 조금은 엉뚱하게도 식사 자리에서 불쑥 나오게 됐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 팥밥 한 숟갈 입에 넣으며 젓가락을 반찬으로 향하는데 우리 집 멸치볶음이 아닌 것이 멸치볶음의 모습으로 상 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원래 우리 집은 잔멸치를 써서 자그마하고 고추장으로 양념해서 색이 빨갛습니다만, 상 위에 있는 것은 큰 멸치에 간장 양념처럼 색이 누르스름했거든요. 할머니가 해주신 반찬이 아니라 숙모가 가져오신 반찬인가? 싶어 한 입 먹으려는데, 웬걸 정말 전혀 우리 집 짠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 짠지 아닌 거 같은데?" 하며 고개 드니 나를 큰 이모, 큰삼촌, 우리 엄마, 할머니가 아주 음흉한 얼굴을 띄우며 보고 있었더랍니다. 아마 당신들께서 이미 멸치 짠지 다른 거 다 알고 내가 그걸 알아채나 못 하나 보고 있었던 거겠지요. 나 스물아홉인데.
"너 잘 안다?" 하던 우리 엄마의 말 뒤로
"할미가 유튜브 보면서 만들었다!"할머니가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가 혼자서 유튜브를 보신다는 것도 놀라운데, 하물며 백종원 멸치볶음을 따로 찾아보셨다니 그것대로 놀랍달까요? 할머니께서 제게 오타 가득한 문자 보내주시면 그걸 교복 자켓 안주머니에 넣고서 따뜻하게 엄마에게 자랑했던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렇게 먹는 멸치 짠지, 멸치볶음은 사실 썩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만 맛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사리에, 시금치에, 섞박지에, 무생채에 밥을 먹고 있으려니
"옛날에 멸치 짠지 한다고 후라이팬에다 볶으면 우리 거기에 밥 비벼 먹고 그랬는데" 하고 큰 이모가 한 말씀하십니다. 순간 5남매가 그렇게 작은 후라이팬 하나에 달라붙어 밥을 먹었다고 생각하니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할머니는 어떠셨을까요? 그러니 대번에 할머니는
"전주로 너네 반찬 보낼 거 만들면서 멸치 짠지하고 있으면, 담고 남은 통 보면서 '아이고 이거에 밥 비벼주면 애들이 싹싹 먹을터인디' 했다" 하십니다.
그 말씀에 내 마음이 괜히 시큰했습니다. 어른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큰 이모는 지금도 그거만 주면 한 그릇 다 먹을 것 같다고 하시고, 엄마는 맛 기억도 안 난다고 하고, 큰삼촌은 자기는 아직도 먹는다고 하시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한 번 물꼬가 트이고 나니 엄마가 갑자기 킥킥 웃으며 콩고물 훔쳐 먹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신 어릴 때 콩고물이 달고 맛있으니 그것만 주워 먹으려고 당신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그래서 당신 어머니께서 콩고물 못 먹게 하려고 높은 찬장에 넣어놨다고. 그걸 어떻게 당신은 아셔서 의자 위에 올라가 찬장을 열어 콩가루라고 쓰인 통에 한 숟갈 집어넣어 푸지게 입에 넣었는데, 콩고물이 아니라 생콩가루였어서 너무 맵고 텁텁하고 비려 그 느낌이 며칠은 갔다고. 그때는 콩고물 훔쳐먹으려다가 콩가루 먹었다는 걸 들키기 무서워 연신 물만 먹느라 혼났다고. 아직도 콩가루라는 말만 들으면 입에서 그 느낌이 나는 것 같다고.
할아버지께서 푸는 말씀은 또 흐뭇했습니다. 당신 자식들 사는 전주집에 가면 우리 엄마가 우다다 뛰어나와서 아빠는 안 반기고, 아빠 손만 보며 처음 뱉는 말이 "아빠 빵은?"이었다고.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일 나가고, 큰 이모는 학교에 있을 때, 아직 어렸던 큰삼촌과 큰삼촌 친구는 마당에서 놀다가 큰삼촌이 우물에 빠지고, 놀란 친구는 도망가고, 집에 있다가 나왔을 뿐인데 짧은 순간 오빠가 사라진 우리 엄마는 놀라서 오빠 부르며 동네를 뒤지다 집 마당 우물에 빠진 오빠를 발견하고 울며 불며 할머니를 데려와 결국 구해낸 이야기도.
어른들을 이렇게 보자 하니, 시간 지난 내 모습이 결국 이런 모습이겠거니, 지금 있는 내 불안과 불확실함이 결국에는 해결되어 또다시 곱씹을 때 하나의 추억거리로 되리라는 확신이 들어차며 내 마음에는 차가운 안심이 내려앉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