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썬>과 부성을 걷어내고 인간 마주하기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라는 존재의 빈자리를 인식한 순간은 포도송이 앞에서였다.
학부모 참관 수업, 교실은 하나의 작은 무대다. 책걸상을 ㄷ자로 배치했고, 선생님은 쉬운 질문을 던져 누구나 포도 스티커를 받아갈 기회를 주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한글도 채 떼지 못한 나는 뜻밖에도 빨리 포도송이를 채워갔다. 이 수업을 위해 회사를 잠시 비우고 온 어머니의 표정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포도송이의 딱 하나 빈자리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마지막 질문이 내 발목을 잡았다. "아버지의 직업을 설명해 보세요."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던 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지만, 왜인지 모를 자존심과 슬픔이 내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포도알 하나가 비었다. 빈 포도알은 내 결핍에 대한 첫 사회적 표식이었다. 나는 울었다. 눈물이 잠시 빈자리를 채웠다. 엄마의 눈물은 그보다 훨씬, 몇 그루의 포도나무가 될 만큼 흘렀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가 없음을 사회적으로 선언한 첫 순간이었다.
중학생이 된 이후에 마주하게 된 교과 과정은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예전부터 쉽고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 공부가 좋았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있는지조차 몰랐던 분야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단순히 재미있었다. 온갖 문구로 책에 표시해 가며 노트로 옮겨 적는 행위는 마치 내가 영화의 공부 잘하는 엑스트라라도 되는 양 뽐내는 기분마저 들게 해 줬다. 내가 적어놓은 내용 정리와 밑줄, 하다못해 문제 오답 체크들이 이 책은 오로지 나만의 책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새 교과서를 받거나, 노트를 다 채워서 새로 교체하는 날이면 나는 표지에 커다랗게 마커로 이름을 적었고 빈 종이를 채울 생각에 뿌듯해했다.
평소처럼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던 과학 시간,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은 잘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다. 서글서글하던 50대 선생님이 교탁에 선 시간을 아이들은 영악하게도 그때가 놀기 좋은 때인 듯 딴짓하느라 바빴다. 그러든 말든 선생님은 교과서를 읽으며 판서를 하셨고, 나 또한 수도사의 활동 범위에 놀라며 멘델의 표를 옮겨 적으며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싸할 만큼 조용해진 교실, 이상한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고, 바로 내 앞에 있던 선생님이 별안간 내 필통을 바닥에 쏟았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상황 파악하려 애쓰는데 난데없이 선생님의 고함 섞인 꾸중이 날아왔다. 귀를 부여 잡힌 상태로 듣자 하니 그 분노는 마카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가 내 필통 안에서 보드마카를 봤고,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어떻게 필통 안에 보드마카를 가지고 다니냐, 너 학교 재산을 훔친 거냐, 보드마카 흡입하냐는 둥 꾸중이 끝날 줄을 몰랐다. 내가 문구점에서 산 보드마카로 이렇게까지 꾸중을 들을 줄 몰랐던 나는 선생님 발에 차이고 있는 나의 문구들이 더 신경 쓰였다. 하다못해 내것은 유성마카라 교실 칠판에 쓰이는 보드마카도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나의 잘못이라고 수긍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듣기 지쳐 자리에서 일어나 내 문구들을 정리했다. 선생님은 당신 앞에 수그리고 앉아 문구를 필통에 정리하는 학생을 보며 더 기가 찼는지 한 소리 뱉으셨다.
"애비가 없어서 그런가 끝까지 버르장머리도 없네"
여태껏 시끄럽던 교실의 소리가 일순간 응축되는 듯 고요해진 후 아이들의 비난이 공기를 찢었다. 수업 중 시작된 사태는 전혀 진정되지 못 한 체 수업 종이 쳤고, 곧바로 나는 교무실의 학생부장선생에게 불려 갔다. 학생이 선생을 향해 아이들을 선동해서 수업을 망치는 경우는 자기는 듣도 보도 못 했다며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다. 여전히 내가 무엇을 잘못했으며, 언제 선동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어떠한 결핍이 인격의 결핍, 나아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결핍으로까지 비칠 수 있다는 사실에 황망하면서도 나의 담임이 말린 덕에 어머니 귀에 이 일이 들어가지 않고 끝나서 안도할 뿐이었다.
이런 차별적인 경우가 이후로도 많지는 않았으나 없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내게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안 뒤 헤어지라며 성을 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의 결핍은 정작 나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었는데, 나의 결핍이 불편했던 건 세상이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보다 세상이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괴로웠다. 그리고 그 시선은 결국 어머니를 향했다. 부재의 책임은 언제나 남은 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나는 굳이 아버지를 말해야 될 때가 아니면 나서서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게 됐다.
사회는 인간을 판단할 때 인간에게 얽힌 관계를 본다. 관계의 종류와 유무가 인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관계를 역할로써만 해석하고, 이 역할들이 사람을 압도한다. 그 와중 도대체 '아버지'라는 관계는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람들은 그것의 빈자리를 의식하는 것일까. 영화 <애프터썬>은 그 관계의 무거움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아버지 '캘럼'과 딸 '소피', 두 명의 여행을 기록한 캠코더 화면으로 시작하여 유독 쓸쓸한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오프닝 시퀀스를 끝낸다. 이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싱그러운 여행 장면을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부녀의 모습에서 벗어나 혼자인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다.
영화가 액자식 구성-성인이 된 소피가 옛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며 회상하는 구조-임을 감안할 때, 혼자가 된 '캘럼'의 모습을 '소피'는 회상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딸의 눈에는 결코 포착되지 못했을, 그러나 어른이 된 딸이 상상해 낸 고독한 남자의 얼굴. 그것은 '딸'이 없는 공간에서 자연히 '아버지'라는 의미 잃은 명칭을 벗은 30살 남자 '캘럼'이다.
그 고독의 단면은 수영장에서 드러난다. 캘럼과 소피는 수영장에서 놀다가 문득 캘럼은 물에 잠기고, 생각보다 물속에 오래 머무는 캘럼을 보며 소피는 즐거워한다. 그러나 물속에서 비치는 캘럼의 몸짓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절박함이 있다. 숨을 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어떤 몸부림으로 보인다. 당장에 물 밖으로 나오면 해결될 것 같지만 무언가 그를 자꾸 잡아놓는 듯하다. 성인이 된 소피의 회상 속에서 그것은 아버지의 절망을 상징한다. 말하지 못하는 절망 앞에서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 것. 그는 어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문득 숨막힘으로써 서서히 잠겨가는 것이었다.
돌아온 호텔의 발코니, 소피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놀러 나갔고 캘럼은 소피가 없는 사이 발코니에 나와 멍하니 선다. 어깨는 난간에 걸쳐 있다. 그는 기둥이 아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버팀목의 이미지가 아니라,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난간의 형체로 그곳에 선다. 캘럼은 자신이 스스로 서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누군가가 기대기에는 한 없이 불안한 모습으로.
소피와 캘럼은 후에 튀르키예 여행의 기념품으로 수제 카펫 상점을 방문한다. 소피는 별천지인 듯 수놓아진 카펫을 보며 매혹되고, 캘럼은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하나 사라며 권유한다.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멈칫하지만 잠시 뒤 바로 영국으로 배송도 가능하냐며 되묻고 결제한다.
어른이 된 '소피'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불안한 청년 '캘럼'이 보인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비싼 수제 튀르키예 카펫을 샀을지 읽힌다. 그는 녹아내리듯 울었을 것이고, 피를 흘려냈을 것이고, 아이처럼 웅크려 외롭게 누웠을 것이다.
사회가 인간을 관계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관계를 지지대 삼아 자신의 입지를 세운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약속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지지대는 무너지고 그 빈자리는 책망으로 채워진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중에서도 가장 무겁다. 그 호칭 하나에 사회적 기대와 숭고함은 지금도 덧칠되고 있다. 가정의 리더, 버팀목, 언제나 흔들리지 않을 기둥. 이름은 높아지는데, 누군가에게 그것은 압도적인 책임으로 다가온다.
'소피'는 그 무게를 하나씩 덜어낸다. '아버지'라는 개념을 붙들지 않고, 그 껍질이 벗겨진 자리의 인간을 응시한다. '소피'는 '아버지'라는 초상화가 아니라, '캘럼'이라는 벌거벗은 인간을 발견한다. 그는 누군가를 지탱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보살폈어야 했던 사람, 이미 경제적으로 무너졌고 정신적으로 휘청인 사람이다. 캠코더에 담긴 건 부성의 상징이 아니라, 무너지고 있는 캘럼의 모습이다.
소피는 이제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상상으로나마 '캘럼'을 껴안는다. 이것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이중의 용서다. 자신을 두고 떠난 캘럼을 향한 원망을 넘어서 위태로운 그를 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까지 풀어내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에서 '소피'는 더 이상 '딸'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피 또한 '딸'의 이름을 벗었다. 피양육자와 양육자의 관계적 구속에서 벗어나 한 명의 인간으로 캘럼을 마주한다. '소피' 또한 '딸'이라는 이름에 담긴, 왜 그때 보듬어주지 못했는지, 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관계적 책임을 묻는 자책에서 벗어나고서야 아버지라는 역할은 한 인간으로 환원된다.
관계의 총집인 사회가 개인을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에 부유하는 '아버지'라는 개념은 여전히 단단하고 높아서 '아버지'와 연결 짓는 관계란 아주 두꺼울 것으로 사회는 생각한다. 짊어진 가치가 많은 '아버지'라는 개념이 내가 지닌 관계 중에 없다면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그만한 가치를 전달받지 못 한 불완전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완전한 아버지란 없는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완전한 관계'는 없다고 말한다. 현실의 '아버지', '딸'은 언제나 결핍을 지닌 채 존재한다. 영화가 보여준 것은 그 결핍의 비극이 아니라 결핍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이해했다. 내가 원망했던 건 사라진 아버지가 아니라 관계의 역할만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사회의 잔인함이었다. 교탁 앞에서 나를 꾸짖던 선생도, 침묵하던 어른도 그저 사회의 잔인함에 제 역할을 비틀거리며 해내야만 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던 걸 이제 이해한다. 내 결핍이 오히려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