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며
누군가를 잃는 일은 세상이 변하는 경험이지만 아버지를 잃는 것은 세상의 기둥이 부서지는 경험과 닮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무너진 자리에서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부터 다시 굴러간다. 이 책은 그 단순한 사실을 믿으며 시작되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는 늘 존재하지만, 언제나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들은 죽거나, 버려지거나, 추락하거나, 부재한 채로 남았다. 그러나 바로 그 사라짐의 순간에야 비로소 가족이, 혹은 인간이 다시 서로를 붙잡는다. 나는 그 틈새에서 부성이란 신화가 깨어지고 새로 짜이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고전 속의 아버지는 늘 견고했다. 그는 언어의 주체였고, 가족의 윤리였으며, 신의 대리인이었다. 그랬던 아버지의 역할이 시대를 따라 변하면서 부성을 깨트리고 주무르는 걸 우리는 보고 있다. 사라지게 했다가 조롱했다가, 부성은 인간성 실험의 최전방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이야기가 절망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부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공백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아버지가 기능으로 환원된 이후, 가족은 처음으로 권위 없이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를 따라야만 유지되던 구조가 무너지고, 각자는 서로의 약함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남는다. 완벽한 보호자 없이 성장한 세대는 불안하지만 동시에 독립적이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완벽하지 않았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임을 신화로 배우지 않았고, 사랑을 통제로 배우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우상이 아니라 하루하루 버텨낸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부성의 종말’은 곧 새로운 인간의 시작이다. 아버지를 신화에서 끌어내린다는 것은 모든 관계를 다시 인간의 높이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비어 있는 의자 한 개뿐이다. 그 위에 앉는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다. 친구, 연인, 동료, 혹은 스스로일 수도 있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통해 배우는 책임과 윤리, 관계의 감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부재의 윤리’다. 우리가 더 이상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없다면 이제는 그 자리를 ‘함께 지탱하는 자리’로 바꿔야 한다. 아버지의 몰락은 끝이 아니라 관계의 재구성이다. 완벽한 부성의 신화는 해체되었지만 그 해체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윤리가 싹튼다. 그 윤리는 완벽함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함께 감당하려는 의지다. 그것은 실패를 부정하지 않고, 상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더 이상 신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 그 문장 하나가 각자의 관계의 무게를 덜게 해주고 지금 시대의 가장 큰 위로를 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이 그리고자 한 것은 ‘아버지의 초상’이 아니라 ‘인간의 초상’이다. 부성을 둘러싼 모든 신화가 무너져도 인간은 여전히 누군가를 지키려 한다. 그 충동이야말로 부성의 마지막 잔재이자 새로운 인간성을 향한 첫걸음이다.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가족은 여전히 흔들리며, 아버지는 여전히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부재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다. 완벽한 아버지를 잃어야만 비로소 인간으로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